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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이야기

☞역사·족보·전통/건국신화·왕 계보

by 산과벗 2008. 2. 28.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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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이성계의묘)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사 적 : 제 193 호

 建元陵의 특징
조선조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 재위7년)의 건원릉은 전형적인 조선조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동서 방면 3면의 곡장 안에 단릉의 봉분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뒤에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의 현릉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입니다. 또한 건원릉에는 홍살문 안쪽 정자각 우측 비각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를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제릉(신의왕후의묘)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齊陵의 특징
태조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1337-1391)의 능인 제릉은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 이전에 승하했기에 개성 근처에 단릉으로 봉릉하고 조선 개국 이후에 추존 하여  제릉(齊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신의황후 약사(略史)
신의황후는 고려 말기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인 안천부원군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성계와의 슬하에 6남[방우, 방과<정종(定宗)>, 방의, 방간, 방원<태종(太宗)>, 방연] 2녀[경신, 경선]를 두고 55세에 승하했습니다. 처음 시호는 태조가 즉위한후 절비(節妃)라 하였고, 정종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 되었고 태종 10년에 종묘에 신주를 부묘 했습니다.  근세 대한제국 성립후 1899년{고종(高宗): 광무 3년}에 황후(皇后)로 추존 되었습니다.


정릉(신덕왕후의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 87
사 적 : 제 208 호

 貞陵의 특징
태조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 -1396)의 정릉은 처음 도성 안 황화방  북원(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승하 후에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 했었던 일[1차 왕자의 난]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성 밖 양주군[현재의 정릉 자리]으로 능을 옮겼습니다.  또한 종묘에 부묘 되지 못했고, 그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현종 10년에 종묘에 배향되면서 복구되었습니다.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병풍석(屛風石)이나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정릉의 수난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神德王后 약사(略史)
고려말 권문세가인 판삼사사를 지낸 상산부원군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젊은시절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에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받은 바가지에 버들잎을 보고 화를 냈다가 이유를 알고 여인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슬하에 방번, 방석 2남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핍박으로 사후에 무덤이 옮겨져 방치되다가 현종대에 종묘에 배향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날 한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려,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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