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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의 작품들~~

☞墨香·古書畵/古서화·기타

by 산과벗 2008. 4. 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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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19세기에 서양만 요렇게 그림을 잘 그린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뛰어난 화가들이 있었는데 너무 홍보가 안된건 아닌가 싶어요.
얼마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저자이자 미술사학자로 문화재청장이 되신
유흥준님이 쓰신 <화인열전>읽고 조선시대 화가들을 많이 알게되었지요.^^
그중에서 아주 재밌는건요,
네덜란드에 <고호>가 있다면, 한국에도 고호같은 칠칠이 괴짜화가 <최북>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답니다.
어느정도 괴짜냐면, 부정부패가 심한 탐관오리 양반이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하자, 최북이 거절을 했드래요.
그런데 권력을 이용해서 계속 협박을 하니까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눈을 만들어버렸다지 뭡니까.ㅋ...
거기에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 링크해놓을께여.
* 요크셔친칠라  (2007/01/26 21:30)
 
그러고보니 몇몇 이름만 교과서에 나오고 나머지 분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칠칠이 화가 그림은 많이 본든 해도 이름은 오늘 처음 접합니다.
당연 괴짜스러운 이야기도...^^

** 최북 (崔北 1712~1761?) **
 
 두보(712∼770)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지만 흔히 중당 中唐 시기의 대표적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유장경(709?∼789?)이 있다. 유장경은 자존심이 매우 강했을 뿐만 아니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상급자인 절도사나 관찰사 등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불행과 좌절을 겪은 불우한 관직생활이었지만 그는 항상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던 청백리였다. 유장경은 769년 남행하여 호상 湖湘 지방을 유랑한다. 그 해 겨울 무렵에 <눈을 만나 부용산 주인집에 투숙하다 逢雪宿芙蓉山主人>는 시를 쓴다.
 
날은 저물고 푸른 산 아득하고
날씨는 찬데 가난한 오막살이 보인다.
사립문 밖에 개짖는 소리 들리나니
눈보라 치는 이 밤에 누가 돌아오는구나
 
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
이런 것을 두고 '시 가운데에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숨겨진 뜻을 본다 詩中有畵, 畵中見情'고나 할까?
바람과 함께 더욱 쓸쓸한 개소리.
 
최북이 유장경의 시구 가운데 ‘풍설야귀인'을 손가락을 사용한 일명 지두화 指頭畵를 그렸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은 최북의 간일 簡逸함과 호방함, 그리고 파격적인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다 보니 손가락에 묻힌 먹을 떨어뜨린 것 같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뭉개버렸다.
 
온 화면에 휘이윙 부는 바람소리와 함께 왈, 왈, 왈, 왈 악쓰듯 짧고 무섭게 짖는 개소리가 가득하다.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나뭇가지가 도리어 구부러지면서 왼편으로 심하게 기우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엄청난 힘으로 부는 듯 하다. 인기척을 감지하고 문밖까지 이미 나온 검은 개가 꼬리를 치켜들고 짖으면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다. 하지만 나그네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고 무심하게 걸어간다. 지팡이를 끌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인다. 웬 바람이 이렇게 심하게 불지,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춥지, 집은 얼마나 남았지? 개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다양한 모양으로 깨진 얼음 같은 느낌을 주는 산의 형상은 화면을 더욱 춥게 만든다. 그런데 풍설 부는 밤에 돌아가는 그 나그네는 혹 최북 자신은 아닌지? 화면의 중간과 위 부분을 검은 듯한 느낌을 주듯 처리하여 밤을 그리고자 하였는데,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신광하는 <최북을 노래하다>는 시에서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초구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은 뉘 집 자제인가?
너희들 멋대로 거들먹거리다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최북은 비천하나 정말로 애닯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날카롭고 사나와서
스스로 화사 호생관이라 했지
작은 몸집에 한 눈이 멀고
술이 석 잔이 넘으면 거리낌이 없도다
북쪽으로 숙신까지 갔었고 흑삭도 거쳤으며
동쪽으로 일본에 들어가 적안을 지났다네
귀한 집 병풍의 산수도에서
안견과 이징을 모두 쓸어 없애 버렸네
술 찾아 마시며 미친 듯 노래하고 비로소 붓을 놀리면
높은 마루 밝은 해에 강과 호수가 생겨나네
열흘 동안 굶주리다 그림 한 폭을 팔고는
몹시 취해 밤길 가다 성 모퉁이에 쓰러졌다네
묻노라, 북망산의 진토된 만인의 뼈
어찌하여 최북은 세 길의 눈 속에 묻혔는가?
아아, 최북의 몸은 비록 얼어죽었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으리.
 
라고 읊는다. 조희룡은 최북에 대하여 “북풍이 너무 맵다. 부잣집 광대노릇하지 않은 것만도 장한 일인데, 어찌 그다지도 괴롭게 한 세상을 지냈나"라고 하였다. 최북은 눈이 오는 날 취해 쓰러졌고 그것으로 괴롭게 지낸 한 세상을 마감했던 것이다.


표훈사도 表訓寺圖 족자 종이에 수묵 담채, 38.5*57.5cm, 한국 개인 소장
 
금강산의 표훈사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듯 뚜렷하게 넓은 폭으로 전개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일종의 평원산수법 平遠山水法에 의해 내산과 외산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묘사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산으로 들어갈수록 멀리 있는 높은 산들이 오히려 낮게 보이는 시각의 착각 현상을 그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서치홍포
 

맹우도 猛牛圖 종이에 채색, 24.2*32.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힘차게 고개를 위로 쳐들고 물을 건너는 황소와 그 위에 채찍을 두 손으로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꾸부린 목동으로 전체를 채운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물결의 무늬나 짐승의 털을 그리는데 있어 사실적 기법의 의도가 보이나 소털 하나하나의 올을 매우 굵게 그려 사실감이 많이 감소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그림은 소의 힘찬 운동감이나, 두 눈 사이가 아주 멀어서 대단히 해학적 諧謔的으로 보이는 목동의 얼굴 등 매우 재미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초옥산수 草屋山水 종이에 수묵 담채, 31*36.1cm, 서울 개인 소장
 
이 그림은 가운데 접힌 흔적으로 보아 화첩의 한 장이었을 듯 비교적 작은 산수화이다. 그림 왼쪽 위에는 '공산무인 수류화개 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제 題가 있어, 그 구절대로 공산 空山의 텅빈 초옥 草屋이 보이고 그 옆에 선 두 그루의 나무가 근경을 채우고 있다. 그림 가운데 얕은 산봉우리가 보일락 말락 엷은 먹으로 그려져 있고, 왼쪽으로는 약간 강한 묵점으로 숲이 울창한 계곡이 암시되었다. 나무 가지들도 실제의 모습과는 아랑곳없다는 듯 제멋대로 뻗었다. 일반적 화법을 무시한 이 모든 점이 작가의 기이한 성격과 높은 예술적 감각을 잘 나타내 준다.
 
조어산수 釣魚山水 족자 종이에 담채 66.3*42.9cm 서울 개인 소장
 
최북은 여러 분야의 소재에 두루 능하였으며 전래된 작품도 적지 않다. 비교적 섬세하게 그린 실경산수는 당시의 화풍을 대변하며, 사의적 寫意的인 산수는 활달한 필치로 두드러진 개성이 보인다. 조어산수는 광생 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 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 設彩 등 중국에 잇어서도 양주팔괴 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 畵員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 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 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갈피화룡 葛陂化龍 종이에 수묵, 55cm x 32.5cm, 개인 소장
 
이 작품의 화제 畵題에 쓰인 갈피화룡 葛陂化龍은 칡이 있는 언덕에서 용이 오르는 모습을 보는 광경으로 작품의 의미와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여백의 미를 살린점을 볼 수 있으며, 작품속의 인물의 심정이 용이 오르는 모습에 배어 있는 듯 하다.
 
최북은 당대의 기인중의 기인이었으며 어떤이는 미치광이 라고 하였을 정도로 괴팍한 성격과 온갖 기행을 남긴 화가입니다. 최북의 일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의 기행과 성격이 네덜란드의 고흐와 비슷한 점이 많아 '한국의 고흐'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어떤 귀족이 최북에게 그림을 부탁하자 최북이 이를 거절하였는데 귀족이 최북을 협박하였다고 합니다. 최북은 이에 분노하여 한쪽 눈을 송곳으로 찔러버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최북은 한쪽 눈이 멀었고 항상 안경알을 하나 붙이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고흐가 한쪽 귀를 자른 사건과 비교되는 사건입니다. 기행과 괴짜의 삶을 살다간 최북의 일생과 그림들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최북은 조선 영조 정조시대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화가입니다. 최북은 스스로 호를 '호생관'이라 칭하였는데 '호생관'이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의 한자입니다.
 
최북의 원래 이름은 최식 崔埴입니다. 그러나 최북은 스스로 이름을 최북 崔北이라고 개명을 하고 북 北자를 둘로 쪼개어 칠칠 七七이라고 호칭합니다. 말그대로 '칠칠이'화가가 바로 최북입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기이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최북은 1712년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사람은 최북이 49세에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북은 키가 작았고 눈이 하나 멀어서 항상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최북이 눈이 멀게 된 사연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느 귀인의 모욕을 받게 되어 분을 이기지 못해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버렸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 졌다면 tv뉴스에 나올만한 사건입니다. 이쯤되면 최북의 고집과 불같은 성미가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성격대로 최북은 술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최북은 하루에 5,6되의 술을 마셨고 집안의 책과 종이와 술을 바꿔 먹을 정도로 술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광'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기이한 행동과 술과 그림을 벗을 삼아 한평생 살았던 최북은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날 마침 폭설이 내렸고 최북은 눈속에서 그만 얼어죽고 맙니다.
 
그가 몇살에 죽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75세 정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유홍준 <화인열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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