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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에 얽힌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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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17. 8. 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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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처사와 숙종대왕 (명릉)

 

숙종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 지금의 수원천 부근을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하다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어떤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저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 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

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뭍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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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陵 (명릉)

 

서오릉의 하나로 경기도(京畿道) 고양군 신도읍에 있으며, 조선(朝鮮) 숙종(肅宗)과 숙종(肅宗)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동계비(同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을 명릉(明陵)이라 함 

 

명릉 홍살문과 정자각

서오릉

숙종의 왕비는 원비(정비) 인경왕후 김씨(익릉),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로 3명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쌍분)

  숙종(肅宗)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숙종과 두 왕후의 비각과 비석

 조선국 / 명종대왕명릉 / 인현왕후부좌

 숙종(肅宗)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명릉

 숙종(肅宗)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른편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쌍분 명릉, 왼편은 인원왕후 김씨

왼쪽 19대 숙종(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오른쪽은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조선국  / 인원왕후부우강
*** 부우강 : 오른편 언덕에 따로 모심 을 뜻함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비각과 비문

숙종의 정비(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숙종 원년(1674)에 왕비가

되었으나 1680년 경덕궁에서 춘추 20세에 승하하여 이곳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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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숙종(肅宗)

 

생몰년도 : 1661년 ~ 1720년재위기간 : 1674년 ~ 1720년생애이야기

숙종은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원자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한 1674년(현종 15)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 시대에는 당파 간의 정쟁이 극에 달하여, 붕당정치가 파경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숙종 즉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대거 실각하였고, 남인을 물리치고 실세를 얻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 때 숙종과 중전인 인현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삼고자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노론의 무리들을 처결,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 경덕궁의 융복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화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생몰년도 : 1667년 ~ 1701년생애이야기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 4월 23일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났으며,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승하함에 따라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조정은 당파간의 분쟁이 한참이었는데, 왕의 여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암투마저 벌어졌고, 인현왕후는 한 때 이러한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 아이가 없던 차에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훗날 희빈 장씨)가 득남을 하였고, 당시 열세였던 남인 세력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에 반대하는 서인 세력들을 숙청하였다.  


인현왕후는 이 때 함께 폐위당하여 궐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을 통해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과 동시에 복위되어 궐로 돌아왔다.  

1700년(숙종 26) 원인 모를 병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승하 후 희빈 장씨의 거처 부근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었다. 숙종은 이에 분노하여 총애하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일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다.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서 인현왕후를 폐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고, 스스로의 영화 역시 되찾길 바라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는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과 하직하였다.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생몰년도 : 1687년 ~ 1757년생애이야기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687년(숙종 13) 태어났으며,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남편인 숙종이 먼저 승하한 후 1720년(경종 즉위)에 대비가 되었고, 1724년(영조 즉위)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1757년(영조 33) 71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명릉의 오른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일화

2007년 2월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인원왕후가 당시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遺事)』가 세간에 소개되었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 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인경왕후(仁王后) 김씨

조선 제 19대 숙종의 정비, 본관은 광산 김씨이다.

장생(長生)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딸이다.

 

1670년(현종11년)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義洞) 별궁(別宮)에 들어 갔고,

1671년(현종12년)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현종15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숙종2년) 정식으로 왕비의 책명(冊命)을 받았다.

1680년(숙종6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 痘患)의 증세가 보였는데,

 

이 때 숙종도 천연두를 겪지 않아서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건의에 의하여 왕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왕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慶德宮)에서 죽었다.

경덕궁 영소전(永昭殿)에 위패가 모셔졌고, 능은 고양에 있는 익릉(翼陵)이다.

소생으로 명선공주(明善公主)ㆍ명혜공주(明惠公主)ㆍ명안공주(明安公主)가 있었으나 명선ㆍ명혜 공주는 일찍 죽었다.

 

1713년(숙종39년) 존호(尊號)로 광렬(光烈)이 올려졌고,

1722년(경종2년) 휘호(徽號)로 효장명현(孝莊明顯)이 올려졌고,

1753년(영조29) 존호로 선목(宣穆)이 올려졌고,

1776년(영조52년) 존호로 혜성(惠聖)이 각각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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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五陵 (서오릉)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신도읍(神道邑)의 다섯능(陵)으로

 

조선조(朝鮮朝) 예종(睿宗) 및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숙종(肅宗)과 숙종(肅宗)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및 동계비(同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명릉(明陵),

 

숙종(肅宗) 비(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

 

영조비(英祖妃)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弘陵),

 

덕종(德宗) 및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의 경릉(敬陵)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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