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愍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 묘소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 2리
(景賢門)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節孝公 극일(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남계(南溪)공 金孟이며, 어머니
는 李氏로 3男이다.
세조 갑신 정월 칠일에 운계리 구제(舊第)에서 태어 나시었다. 태어나실 때에 전계(前溪)에 자기(紫氣)가 무지
개처럼 뻗치었으며 그 서기(瑞氣)가 날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17세까지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 <동사강목> <사서> 등을 배우고 이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
어가 김광필, 정여창, 강혼 등과 함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23세 되던 1486년(성종 17)에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 갔다.
(永慕齊)
1491년(성종 22) 장래가 촉망되는 문신(文臣)에게 주어지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혀 학문연구와 독서에
매달리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 정언, 吏曹佐郞 ·正郞 등을 두루 거치면서 공직자로서 자질을 더욱 향상시켰다.
한 때 글의 음운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알아오는 임시직인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
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정유라는 사람이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를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玄武峰)
이렇게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할 즈음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종은 세조 때부터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사림파의 의견을 수용해 주어 여러 면에서 성
리학을 접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곧은 관료이자 부정과 비리를 적발하고 시정하는 직책인 정언과 이조(吏
曹)에 근무하면서 기득권층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비판했던 탁영( 길일손의 호)은 유자광, 이극돈 등
권신들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스승 김종직 또한 남이장군의 옥사(獄事)가 간신 유자광의 무고로 생각하는 등 훈구 세력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동안 사림파를 옹호해주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克一의 二男 贈 吏曺參判 南溪(탕영의 父 묘)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하고, 그 뒤 헌납(獻納) 때 이
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화(禍)를 입었다.
(특색있는 碑石)
1498년( 연산군 4) 때마침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던
탁영은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
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화(禍)를 입었다.
1498년(연산군 4)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한다.
(南溪墓 안산)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엇보고 있던 훈구파들은 김종직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
를 도모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하니 대노한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은 관을 쪼개어 목을 잘랐을 뿐 아니라 그가
쓴 책마저 불살라 버리고 관련자를 처형했다.
이 때 희생되거나 죄를 받아 처벌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南溪墓 前의 道淵金海金公之 墓 : 司贍寺參奉道淵亭 金致三)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한 사람은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고, 곤장 100대에 3천
리 유배된 사람은 표연수, 정여창, 홍한, 이총, 강경서, 이수공, 등이며, 이주, 김굉필, 박한주 등은 장 80대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밝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보려던 선비 탁영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훗날 바른 평가가 내려지면서 순조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淸道水也 山靈峰에 고히 잠드신 탁영 선생 묘소)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 가네.
1489년(성종 20) 4월 29일 그의 나이 26세 때 섬진강에서 지리산을 읊은 시라고 한다.
(문민공 탁영 김일손 선생 묘)
생육신인 남효온과 더불어 죽림칠현의 한 분인 신영희(辛永禧)가 “그는 참으로 세상에 드믄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다”라고 했을 뿐 아니라, 점필재 문하생으로 가장 촉망받던 3인방 탁영, 김굉필, 정여창 중에서 이른
바 선두주자였다고 할 수 있는 탁영 선생만이 왜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는지 아쉽기 그지없다.
(안 산)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
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묘역 石物)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
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선생이 생전에 아끼든 거문고 일명 탁영금(濯纓琴)은 우리나라에서 악기로는 유일하게 보물 제957호로 지정
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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