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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 /③ 비색청자

☞국보·보물·유물/도자기·청자

by 산과벗 2006. 2. 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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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조화 빌려왔나 미궁에 빠진 그 푸른빛


△ 국보 94호인 청자참외모양 병. 거르고 거른 듯 순도높은 푸른빛 색감과 담담한 기형이 어울린 비색청자의 걸작이다. 미술사가 최순우가 “우리네 옷빛깔에도 나타나는 민족의 성깔”이라고 했던 이 해맑은 비색을 지금은 아무도 재현하지 못한다.

③ 비색청자

자랑스런 문화유산 목록에 첫손 꼽히는 고려청자의 매력은 무엇일까. 표면을 파고 무늬를 새겨넣는 상감기법과 투명한 푸른 빛 비색(翡色)을 단연 압권에 꼽을 만하다. 화려한 외양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미감은 다채로운 무늬의 상감기법을 우선시하는 편이지만, 옛적 감식안들은 그 우미한 비취빛 때깔에 더 매료되었던 듯 하다. 청자를 다룬 옛 문헌을 뒤져도 상감이나 모양새(기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신비스럽고 속깊은 비색에 대한 상찬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옛사람들은 청자 대신 비색 혹은 푸른 항아리란 뜻의 ‘벽호’(碧壺)란 용어를 즐겨 썼다.

‘나무를 베어내니 남산이 빨갛게 물들었네/불 피워 연기가 해를 가렸지/푸른 자기잔을 구워내/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구나/선명하게 푸른 옥 빛 나니/영롱하기는 수정처럼 맑고/단단하기는 돌과 맞먹네/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하늘의 조화를 빌어왔나 보구료’

옛사람들 ‘상감’ 보다 ‘비색’ 에 도취
탁한 중국청자 고려 신비한 빛 못내
유약층 공기방울의 마술 수수께끼

고려의 대문장가인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는 저 유명한 <동국이상국집>에서 절묘한 묘사로 비색청자의 미학을 노래했다. 연기가 해를 가릴 정도로 공 들여 청자를 굽는 힘든 공정과 옥 같은 비색청자의 빼어남, 튼실한 기능성까지 짧은 싯구에 녹여낸 재기가 놀랍다. 애주가로 유명했던 그가 우연히 술을 따른 청자잔에 눈길이 미치자 비색을 얻기까지의 갖은 산고를 세심하게 떠올리며 지었음에 분명하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비취빛이란 뜻으로 중국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불렀다. 고려 인종 때인 1123년 송나라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의 여행기 <고려도경>에는 “고려인이 푸른빛 자기를 귀히 여겨 비색이라 일컫는다”면서 “근래 제작이 공교로와지고 색깔이 더욱 아름다와졌다”고 적고 있다. 중국에서는 월주지역 가마의 청자를 명품으로 쳐서 신비스런 빛깔이란 뜻의 비색(秘色)으로 불렀는데, 고려청자가 또다른 색의 격조를 띠었다하여 다른 뜻의 비색을 이름붙인 것이다. 태평노인이란 송나라 학자가 쓴 책 <수중금>에도 천하제일 명품의 하나로 고려비색, 곧 청자를 명시해 놓고있기도 하다.

이런 비색 청자의 걸작은 상감기법이 본격화한 13세기 이전 작품들 가운데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고려 인종의 장릉에서 나온 청자 참외모양 병(국보 94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참외모양의 미끈한 몸체, 길쭉한 목에 꽃잎모양 주둥이가 특징인 이 병은 기형의 고고한 기품과 은은하고 세련된 발색을 자랑한다. 사색의 아취가 느껴지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오리연적, 고려의 드높은 하늘을 비춘듯한 같은 미술관 소장의 청자상감학구름무늬매병 등도 놓칠 수 없다. 비취빛 표면의 광채가 꿈결처럼 흘러가는 청자상감모란구름학무늬베개, 청자 양각 물가풍경무늬 정병(이상 국립박물관 소장) 등도 감상의 백미로 꼽히는 명품들이다.

고려 비색은 중국 월주요 청자와 비교하면 단박에 진가를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올리브색, 갈색조로 조금 탁한 월주 비색에 비해 전성기 고려청자의 비색은 그지없이 맑다. 도자사가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옥처럼 만들려고 두껍게 유약을 입힌 월주 청자는 기름에 튀긴 중국음식처럼 느끼한 맛이 있지만 고려청자의 비색은 무침처럼 담백하다”고 말한다.

비색의 매력은 표면의 미세한 기포에서 나온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유약층의 무수한 공기방울이 투과되는 빛의 일부를 차단해 은은한 때깔을 낸다는 얘기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해강 유근형(1894~1993)을 비롯한 근현대의 숱한 장인들이 비색을 재현하려고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는 점이다. 국내 미술사학의 비조인 우현 고유섭이 오월신록(五月新綠), 우후청천(雨後靑天:비온 뒤 갠 하늘)의 미라고 극찬했던 청자비색의 비결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인가. 이규보의 또다른 청자예찬시를 읽는다. ‘푸른 사기 베개 물보다 맑고/옥을 만지듯 매끄럽네/몸 날려 그 속에 들지말라/어지럽고 황량한 꿈이나 덧없는 한단몽 같다고 무어 그리 부끄러울까.’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한겨레 신문 05/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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