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나? 1900년대 초 이미지로 보는 코리아니티(koreanity, 한국성) |
상화하택(上火下澤)’. 대학교수들이 올 한해를 돌아보며
꼽은 한자성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물과 불,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대립을 해왔다고 한다. 지난해 선정됐던 사자성어 역시 패거리를 지어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의미의 '당동벌이(黨同伐異)’였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이처럼 사분오열 상일까. 이 같은 모습이 한국인의 한국인다움일까.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이 유난히 강한 민족이었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라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와 ‘우리 집’, ‘우리 민족’ 등의 표현은 여타 민족, 나라에서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은 대부분 ‘나의(My)’라 한다. 중국은 ‘우리’라는 한자가 아예 없다. '상부상조’ 역시 우리네 민족의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사회가 급변하고 생활양식과 시대상황은 항상 바뀌어 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에게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은 특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상부상조의 전통이 돌연 ‘드잡이질’로 변할 수는 없다. 미술사학자 이돈수 씨가 소장해온 옛 사진자료 등을 통해 한국성(Koreanity)을 되돌아 본다. 차례는 ▲1편 한국인의 인성(근면함, 상부상조, 좌절하지 않는 민족, 효) ▲2편 한국인의 저력(과학성과 창조성, 높은 교육열과 기개, 장인정신) ▲3편 한국인의 문화(다양한 놀이, 우리 옷의 색과 멋, 자연과 건축의 조화, 춤과 소리의 민족) 순으로 싣는다. 기사에 소개된 사진과 이미지는 1900~1920년대의 것들로서 정확한 연도 파악은 불가능했다. 이미지 가운데 채색이 된 것은 당시에 엽서로 사용됐던 것들이다. |
웃음을 잃지 않은 해맑은 어린이들이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이들도,어린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집안 일을 돕는 것이 관례였다. 가을 수확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벼를 수확하고 있다. 이 때 쯤이면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빠지지 않고 일을 도왔다. 추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역시 함께 모여 도리깨질을 하곤 했다. 복(福)조리를 사고 파는 모습.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한밤 중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놓는 조리. 조리장수는 초하루 전날 밤부터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각 가정에서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복조리를 사는데, 밤에 미처 사지 못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샀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이 풍속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생선을 차곡차곡 쌓아 말리고 있다. 짚을 이용해 초가집 지붕을 만드는 일도 쉴 새 없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경성 거리를 행군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 한국을 전쟁터로 삼았던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들이다.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배가 정박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산된 쌀의 약 20~30%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에 조선인들은 쌀이 모자라 보리쌀과 만주에서 들어온 조와 수수 등 잡곡을 혼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게다가 1937년에는 일본이 지나사변을 일으킨 것이 세계 2차 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정부는 전시동원령을 내려 군량미를 싼 값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우리 농민들은 공출미라는 이름으로 일본 정부에 쌀을 헐값으로 바쳐야만 했다. 공출제도에 시달렸던 우리 농민들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곧 공출제도의 폐지라고 여길 정도였다. 부모님 묘소 앞의 움막. 부모님 상(부친상,모친상)을 당하면 묘 앞이나 근처에 이처럼 간단한 움막을 만들어 묘를 지키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시묘살이를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앞에서 곡을 하는 모습. 곡은 상(喪)을 치를 때 소리내어 우는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곡이 의식화한 것은 '주자가례'가 전례된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회갑연. 회갑은 61세(만60세) 되는 생일로 육갑년도(六甲年度)에서 태어난 지 6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 간지년(干支年)의 생일을 뜻한다. 환갑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에 환갑을 맞이하는 일은 경사 중의 경사로 그 자손이나 제자들이 잔치를 마련하고 축하하는 관습이 생겼다. 종로거리(1907) 칼을 찬 순경이 죄인을 감시하고 있고, 오른쪽 이발소 간판 밑에 가로등이 보인다. 앞의 종탑은 명동성당이며, 뒤의 흰 3층건물은 샬트 수녀원이다. 옛 조선호텔 앞 거리(1900) 일본에 의해 황근우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 전의 모습이다 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줄무늬 상의를 입은 소년과 목판에 엿을 담은 어린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다. 소년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왼쪽에 밤섬이 보이고, 이곳 마포 나루터는 화물 선착장으로 유명했다. 진고개는 현재 충무로 2가의 고갯길로서 흙이 몹시 질어 진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명동성당과 북악산이 보인다. 1906년 8척 가량 파내어 길을 닦고 높이 5척의 방주형 수멍을 묻었다. 이것이 서울시내 수멍도랑의 시초이다. 당시 이거리는 도성에서 제일 넓은 거리였다. 왼쪽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있고, 오른쪽 건물엔 일본관리인과 군부대가 있었다. 소공동 거리(1907) 소공동 주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이 많았는데 일흥노약방 뒤로 원구단 누각이 보인다. 당시 이곳에는 곡물창고가 있었고 왼편의 건물은 전차수리소이다. 멀리 보이는산은 인왕산이다. 뒤의 누각은 경복궁 동십자각이며 백악산 밑에서 경복궁을 거쳐 청계천과 합류하였다. 하천 주변에 주민들은 이곳을 빨래터나 목욕터로 이용하였다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는 하천이며 말그대로 물이 맑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 각종 채소들이 집산되어 시내로 유입된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의주통이라 불렀다. 충무로 입구에서 바라본 명동성당이다. 당시 충무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서부역 부근(1907) 이곳은 저지대라 비가오면 진흙땅이 된다. 멀리보이는 건물은 약현성당이다 |
30년전 월남전 일부사진 (0) | 2006.03.29 |
---|---|
조선 시대의 여인 (0) | 2006.03.22 |
옛날의 추석 풍경 (0) | 2006.02.28 |
아주옛날/조선시대 사진 (0) | 2006.02.28 |
사진으로보는 한국전쟁 (0) | 2006.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