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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金海金氏) 본관시조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2. 2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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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김해김씨(金海金氏) 본관시조

   김해김씨 시조 본관  유래  
   
     1. 시조 : 김수로

     2. 김해김씨 본관 및 시조의 유례

      김해(金海)는  경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6가야 중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나  680년(문무왕 )에
     김해로 개칭하였다. . 일찍이 가락국 역사와 함께 문호를 개방한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해 김씨의 연원은 [삼국유사]와 [가락 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에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씨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그후 10대 구형왕이  532년신라에 항복하고 상등의 작위와 가락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유신(庾信) 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삼현파(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목경의 맏아들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영서(永瑞),·영정(永貞),·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 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를 지냈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일세조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의 아들 맹(孟)은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 기손, ·일손 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로 일컬어졌다.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일손은 참수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뒤에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의 목을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 되었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에  숙부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그 밖의  인물로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 홍도(弘道)가 유명했고, <해동가요>를 남기고  [청구영언]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3,767,0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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