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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당 (대유) 선생 행장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2. 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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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삼족당 (대유) 선생 행장

삼족당 선생 행장

선생의 휘는 대유(大有)요 자는 천우(天佑)며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니 동계공의 장자요 절효 선생의 증손이시다. 성종대왕 10년 기해(서기 1479년)년에 태어 나셨다.
연산 난정에 계부(季父:아버지의 맨 마지막 남동생을 이르는 말) 탁영선생의 화(禍)로 직제학공(선생의 아버지)과 함께 호남의 귀양지에 계시다가 중종반정후 은사(恩赦)로 귀향하였다. 이듬해 정묘정시(丁卯廷試:조선 시대,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보이던 과거(科學).)에 장원진사하고 고향에 돌아와 선묘(先墓)를 받드시더니 때에 중종대왕이 국내(國內)의 올바른 행실 하는 선비를 구하니 향리에서 선생을 제일로 추천하여 현량과(賢良科:조선 중종 때 경학(經學)에 밝고 덕행이 높은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대책(對策)으로 시험을 보아 뽑던 과거전생서직장(典牲暑直長)에 추천하였으며 그 해에 등제하여 성균관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 벼슬)을 거치고 호조좌랑겸 춘추관기사관 및 정언(正言)으로 임명하였으나 사절하고 취임하지 않으셨다.
칠원 현감을 제수하니 부임하신 3월에 선덕을 크게 베푸시어 백성들이 신명(神命)같이 여기시었다.
조 정암 김 충암 등 제선생이 화(禍)를 입음에 선생도 제선생과 도의(道義)의 오랜사귐이 있는 관계로 화(禍)가 미치어 관직을 삭탈 당하셨다. 선생이 세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대장(大壯) 대축(大畜)대아(大雅)는 삼계모(三繼母)출생이라 우지애지(友之愛地)하여 가산을 나눔에 있어서도 쓸모 없는 밭은 공이 쓰고 두 번째 세 번째 계모의 봉사위토(奉祀位土:묘제(墓祭)의 비용을 위하여 경작하는 논밭. 준말 위토)까지라도 그 아우들에게 다 주셨다.
선생이 기묘사화이후 별당을 운문 우연(遇淵)에 세우고 스스로 호를 지어 삼족당(三足堂)이라 하니 곡천당 눌연정 소요대 등이 모두 선생의 휴식처라 수행함에 있어 산수 간에 스스로 체득하신 그 고풍아량(高風雅量)은 한점 진루(塵累:세상살이에 관계되너저분한 일)가 없으시더라.
일일은 조정의 명을 들으시고 길을 재촉하여 식량을 싸지 않으시고 떠나사 일일 백리의 길을 가시더니 종자더러 일러 편안히 살아온지 오래임으로 갑자기 원행을 하여 병이 생겼으니 가히 행하지 못하리라 하시고(고의로 그와 같이 핑계를 만드시니 부귀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 돌아온 후 운문산중소요자락(逍遙自樂)하시다 돌아가셨나니라.
조 남명(조식) 선생은 선생의 도의로 사귀는 중요한 교우인지라 묘문을 짓고 가로대공(公)같은이개세(盖世세상을 뒤덮는 일)의 영웅이며 천하의 고사(高士)이다.
첫째로 보면 용용대아(容容大雅)에 토론경사(討論經史)의 홍유(弘儒:큰 유학자)요 두 번째로 말하면 흘흘장신에 사어불위(射御不違 :활쏘기와 말타기가 어긋나지않음)의 호사라 서실에 독처하여 장가만무(長歌慢舞)하는데 집안 사람이 그 뜻을 엿보지 못한것은 소성(所性)이 유락(有樂)하여 영가도무(詠歌蹈舞) 시(時)이며 수풀과 냇가에 위질(委質)하여 고기 낙시 사냥하기를 하데 시인(時人)이 방달(放達)로서 인식함은 둔세무민(遯世無民)하여 침명도회( 冥韜晦)한 일이라 하였더라.

출전: 김해김씨삼현세가 행적 27~28페이 참조.회상사 1995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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