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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라이벌 열전] 선수 역대 최고 라이벌 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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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08. 4. 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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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라이벌 열전] 선수 역대 최고 라이벌 빅5 ☜┛


★...1. 승자없는 황금팔의 대결 최동원-선동열

한국 야구의 투수를 대표하는 최동원(50)과 선동열(45)은 현역 시절 세 번 맞대결을 펼쳤다. '황금 팔의 대결'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최고의 투수전을 팬들에게 선물했고 결과는 1승1무1패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마치 하늘도 어느 누구의 팔을 들어주기 어려웠던 것처럼.

첫 번째 역사적인 선발 대결은 1986년 4월19일 사직구장에서 성사됐다. 두 선수 모두 완투를 했고 최동원은 3회 송일섭에게 솔로 홈런을 한 방 맞았다. 선동열의 1-0 완봉승. 선동열의 데뷔 첫 완봉승이었다.

그해 8월 19일 사직구장에서 재대결이 열렸다. 이번에도 두 선수는 완투했고 이번에는 최동원이 2-0 완봉승을 거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대결은 1987년 5월 16일 사직구장이었다. 무려 15회 연장까지 가는 4시간 56분이 걸린 명승부. 최동원과 선동열은 끝까지 완투했지만 결과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최동원은 불같은 강속구에다 낙차 큰 커브 그리고 연투 능력이 으뜸이었다. 1983년 프로에 입단한 최동원은 84년 정규시즌에서 27승을 기록했고,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두며 '무쇠팔 투수'로 불리웠다. 8년 동안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기록을 남기고 1990년에 은퇴했다.

선동열은 유연한 투구폼에서 최고 스피드 158㎞의 직구와 활처럼 휘어지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다. 0점대 평균자책점과 트리플크라운(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을 각각 세 차례 달성하는 등 '무등산 폭격기'로 위세를 떨쳤다. 1985년 데뷔해 95년까지 11년간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를 기록했다. 96~99년에는 일본 주니치로 진출해 10승 4패 98세이브로 '나고야의 수호신'으로 불리웠다



★...2. 대학·재계 라이벌 대표 쌍포=이충희-김현준

이충희(48)와 고 김현준(1999년 타계)은 1980년대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명품 슈터들이다. 당시 농구 실업팀 현대전자와 삼성전자는 정주영-이병철 두 왕회장들이 대리전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프로축구와 프로야구가 있었지만 현대는 야구팀, 삼성은 축구팀이 없어 라이벌전을 벌일 만 한 접점은 농구가 유일했다.

이들의 자존심 대결은 실업이전 대학에서부터 시작됐다. 고려대의 주포는 이충희, 연세대의 얼굴은 김현준이었다. 이후 이들은 재계라이벌 현대와 삼성에서 농구인생의 2라운드 대결을 다부지게 펼쳤다. 슈팅은 이충희가 개인기는 김현준이 더 좋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충희는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쉴틈 없이 뛰어다녔고 기회만 나오면 트레이드 마크인 페이드 어웨이슛을 작렬시켰다. 김현준은 외곽도 좋았지만 수비수 한명을 재치고 던지는 미들슛이 장기였다. 이들의 자존심 대결은 국가대표팀에서도 있었다.

중앙대 재학중이던 허재 감독이 국가대표 포인트 가드를 보던 시절 이충희와 김현준은 서로에게 패스를 하라고 눈을 부라렸다. 이들은 대표팀에서도 상대보다 더 많은 득점을 올려야만 직성이 풀리던 근성의 승부사들이었다.



★...3. 형님 먼저 아우먼저…14좌 완등 엄홍길-박영석

엄홍길(48)과 박영석(45). 히말라야의 8000m급 자이언트봉 14좌를 완등한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들이다.

이들은 한 때 한국 최초의 14좌 완등을 두고 경쟁적으로 8000m 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2000년 여름 K2를 끝으로 엄홍길이 완등에 성공했고, 이듬해 박영석이 마침표를 찍었다. 매체에서는 이들을 마치 라이벌로 부각시켰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적수는 스스로일 뿐이었다. 엄홍길은 1993년 초오유와 시샤팡마를 연속 등정하기까지 일곱 번이나 고산 등정에 실패했고, 안나푸르나는 4전5기 만에 오르는 등 힘겨운 자기싸움 끝에 위업을 이뤘다.

1989년 첫 히말라야에 도전한 박영석은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추락하는 대형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그해 겨울 도전에 나서는 무서운 투혼을 보여줬다. 특히 세계 최고봉을 무산소로 등정한 국내 산악인은 그가 유일하다. 10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실패의 암벽을 완등의 희망줄로 잡고 오른 이들은 인간 승리의 표본들이다.

한국은 이들 외에도 한완용(42) 등 3명의 14좌 완등자를 보유하고 있다



★...4. 아직 끝나지 않은‘신의 손’ 전쟁 김병지-이운재

이운재(35)와 김병지(38)의 수문장 경쟁은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극한 경쟁이었다.

이운재는 경희대 1학년이던 1992년에 태극마크를 단 뒤 1994년 3월 미국과의 친선경기로 A매치에 데뷔했다. 반면 김병지는 용접공 생활을 하다 테스트를 통해 상무에 들어간 뒤 92년 울산 현대에 입단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김병지는 이운재가 '작은 성공'에 도취돼 페이스를 잃은 틈을 타 대표팀에 입성했다. 1995년 6월 코스타리카와의 코리아컵서 데뷔전을 치른 후 2001년 초까지 6년간 김병지 전성기였다. 98 프랑스월드컵의 골문도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김병지는 히딩크 감독 부임 초인 2001년 1월 파라과이전서 골문을 비우고 무모한 플레이를 펼치다 눈밖에 벗어났고, 이운재가 다시 대표팀의 중심에 섰다. 이어 피말리는 경쟁 끝에 2002년 한·일월드컵의 모든 경기를 이운재가 도맡았다.

김병지는 벤치를 지키면서도 후배의 등을 두드려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K리그에서는 김병지가 165경기 무실점, 153경기 무교체 출장 등 각종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30대 중반을 넘은 이들의 경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5. 팬 몰고 다닌 아마 주먹 맞짱 문성길-허영모

라이벌은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닌 최고의 두 상대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아마복싱을 대표했던 문성길과 허영모의 관계는 라이벌이 아닐 지도 모른다. 문성길이 3번 맞대결에서 모두 이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표선발전이 열린 정동체육관이 꽉 차고, 아마복싱에 생중계 카메라를 끌어들인 이들에게 '라이벌전'이라는 수식어를 다는데 딴죽을 걸 사람은 하나도 없다. 프로복싱의 인기가 살아 있던 80년대 중반, '돌주먹' 문성길과 '테크니션' 허영모는 복싱팬들의 관심을 아마추어 쪽으로 끌어들였다.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플라이급(허영모)과 밴텀급(문성길)은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키가 큰 허영모(173cm)가 체급을 올리면서 운명의 대결이 시작됐다. 복싱의 공식을 접어두고 타고난 펀치력으로 승부한 문성길은 아마추어 복싱에서 볼 수 없는 시원한 경기를 선보였고, 허영모는 복싱의 교과서답게 물 흐르듯 유연한 경기력을 펼쳤다.

'짱구' 장정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4~85년에 86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3차례 대결한 이들의 경기는 세계타이틀 못지 않았다. 복싱팬들은 열광하면서 동시에 아쉬워 했다. 허영모의 기량이 썩혀두기엔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출처]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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