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초.한 전쟁(항우와 유방의 숨 막히는 대결)

☞역사·족보·전통/건국사·연대표

by 산과벗 2016. 9. 20. 13:02

본문

초 · 한 전쟁 (항우와 유방의 숨 막히는 대결)

진승 · 오광의 난과 진(秦)의 몰락

기원전 210년에 시황제가 지방 시찰 중에 병이 들어 유서만 남기고 죽자, 옥새와 유서를 모두 가지고 있던 환관 조고가

이사·호해와 공모하여 호해를 진 2세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무능하고 부패한 진 2세의 학정(포악한 정치)과 실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가혹한 정치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전국 각 지역에서 무리지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진(秦)에 의해 멸망한 6국(초, 연, 제, 한, 위, 조) 출신의 귀족들도 진에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불을 붙인 것은 기원전 209년에 일어난 진승과 오광의 반란(중국 역사상 최초의 반란)이었다.

원래 진승과 오광은 변방을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대에 들어가게 된 평범한 농민이었다. 그런데 변방으로 가는 도중에

대택향(양쯔 강 하류에 있는 안후이 성 숙현 동남 부근) 근처에서 폭우를 만나 제 날짜에 부대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진나라 법에 의하면, 예정된 기간 안에 군대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어차피 가 봐야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쯔 강 주변의 드넓은 평야
 
양쯔 강
              

진승과 오광은 아직 죽지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도는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와 초나라 장수 항연(초나라의 명장.

항량의 아버지이자 항우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내세워 봉기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병사들이

그들 세력에 합류했다. 진승은 병사들을 이끌고 진(陳, 옛날 초나라의 도성, 지금의 허난 성 회양현)을 점령하고,

스스로 초왕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 초나라를 장대하게 발전시킨다는 뜻)’라 하였다. 그리고 오광을

가왕(假王, 대리왕)으로 임명하였다.
진승의 군대는 한구 관을 쳐부수고, 진의 수도 셴양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였다. 그렇지만 진(秦)의 황제 호해가 보낸 장한의 군대(여산릉에서 공사 중이던

수십만 명의 죄수와 노역자들로 구성)와 맞서 싸우다 크게 패했다. 그 뒤 오광이 죽고, 합류했던 세력들이 떨어져 나가는 등

내부 분열이 심해졌다. 결국 진승은 장한과 싸우다 패한 뒤,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반란은 끝이 났고, 진승과 오광은 진(秦) 왕조에 저항하여 중국 최초의 농민 투쟁을 이끈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조고와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마음대로 휘두름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진(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인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황제로 삼았다. 

그뒤 조고는 호해를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를 비롯하여 많은 신하를 죽이고 승상이 되었다.
이렇게 권력을 손에 쥔 조고는 신하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말이라면서 바쳤다.

호해가 조고의 말에 따라 사슴이 아니라 말이라고 하자, 호해의 말이 맞다는 신하와 부정하는 신하로 나뉘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항우와 유방의 등장과 대립 

진승·오광의 반란이 실패한 뒤, 힘을 잃어 가던 반란 세력에 투쟁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전 진승과 오광의 난이 있을 때, 이미 조·연이라는 나라가 새로 생겼고, 수많은 반란군이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 반란 세력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두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항우와 유방이었다.

유방은 기원전 209년 9월에 패(중국 장쑤 성 부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밑에는 장량(최고의 참모를 가리키는 말인 장자방의 유래가 된 인물)과 소하(전한 시대 정치가)라는 전략가와 조참, 번쾌 등의 장수가 있었다. 유방은 행정 구역상으로도 가장 작은 곳에서 일어났고, 군사의 수도 자제(나이가 젊을 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자) 3천 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후들과 세력을 다툴 정도로 크게 힘을 키워 나갔다.

그 무렵 저장 성(중국 남동부 동해 연안의 성. 성도는 항저우)의 회계에서는 진나라 장수 왕전에게 아버지(항연)를 잃은 항량이 원한을 갚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 군수에 올라, 조카인 항우를 부장으로 삼고 정병 8천 명을 거느렸다. 항량이 군대를 이끌고 진을 향하자,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그의 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렇게 하여 병력이 6~7만 명으로 늘어나자, 항량은 진나라에 대항하는 무리에서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여기에 기원전 208년 유방이 항량의 군대와 만나 연합 세력을 이루었다.

항우 VS. 유방
항우 VS. 유방
인물 항우(項羽) 유방(劉邦)
나이 기원전 210년 당시 22세 기원전 210년 당시 37세
또는 46세
생김새 신장이 8척에 이르는 대장부로,
산을 뽑을 만큼 힘이 센 장사였다.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이고,
왼쪽 다리에 72개의 사마귀가 있다.
성격 소년 시절부터 학문이나 검술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그래서 숙부
항량이 병법을 가르쳤다.
사람을 아끼고 무엇이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며, 언제나
활달하였다.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출신 대대로 초나라에서 장군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다.
부모의 이름을 역사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름 없는 서민 출신이다.

항우와 유방의 숨막히는 대결

진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량은 시골에서 양치기를 하던 초나라 왕족 웅심을 찾아내 회왕으로 떠받들고, 스스로를 무신군이라 하였다.

그 뒤 진나라 장수 장한의 기습을 받아 항량이 전사하자, 항우와 유방은 팽성(중국 장쑤 성 쉬저우의 옛 이름)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부장에 임명하고, 진의 공격을 받고 있던 조나라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송의는 허베이 성 자오현 동남쪽 부근에 이르러 46일 동안 나아가지 않고 형세를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한

항우는 송의를 죽여 버렸다. 회왕은 즉시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조나라를 지원하게 했다.

항우는 쥐루(중국 허베이 성에 있는 도시)를 포위한 진의 군대와 아홉 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제후들의 장수는

모두 항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뒤 각 제후의 군대는 모두 항우의 지휘에 따르게 되었다. 항우는 진의 군대를 무찌른 뒤, 진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장수 장한의 항복을 받아 냈다. 진의 항복을 받았지만 진의 병사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을 걱정한 항우는

진의 병사 20만 명을 모두 죽였다.

기원전 206년에 유방은 진나라 왕인 자영의 항복을 받고, 한구 관을 넘어 진의 수도 셴양에 들어섰다. 진왕의 자발적인 항복까지 받아 낸

유방은 진시황 시절에 남겨진 셴양의 재물과 아방궁 등 온갖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들에 빠져 그 자리에 안주하려 했다.

이것을 본 책사 장량이 유방에게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이롭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장량의 뜻을 받아들인 유방은 재물과 유산, 행정 서류들은 손대지 않고 팽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유방은 진의 엄격한 법 제도는 모두 없애고

간략한 법인 약법 3장을 발표하였다.

뒤늦게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 셴양은 이미 유방이 점거하고 있었다. 항우와 유방은 이전에 회왕과 "먼저 관중(중국 북부의 산시 성 웨이수이 강 일대.

셴양은 이 지역에 속해 있음)을 차지한 자가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이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유방의 신하 조무상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자신의 40만 대군을 믿고,

즉시 유방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것을 미리 눈치 챈 유방은 무모하게 항우와 싸울 마음이 없었다.

항우의 전략가 범증은 연회를 명목으로 유방을 초대한 뒤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유방은 자신을 낮추고 항우의 기분을 맞춰 주었고,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셴양을 불바다로 만들고, 항복한 진나라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는 셴양에 남아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책사 범증의 말도 무시하고, 고향인 팽성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그 뒤 항우는 자신을 ‘서초의 패왕(西楚覇王)’이라 부르며, 회왕을

명목상의 황제로 내세웠다. 그리고 진을 무너뜨리는 데 공이 있는 장수들을 각 지역의 제후로 임명했다. 이때 유방 역시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그런데 장수들을 제후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공평하지 못해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금의환향에 얽힌 이야기
‘금의’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왕이나 높은 관직의 사람들이 입던 옷으로 출세의 상징이었다. 금의환향은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을 찾는 것을 가리킨다.

초와 한의 전쟁이 한창일 때, 항우는 스스로 망쳐 놓은 셴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인 팽성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신하들은 항우가 셴양을 버리고

보잘것없는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겠다고 하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한생이 셴양에 머물 것을 계속 주장하자, 항우는 “지금 저잣거리에는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다.”고 말하며 화를 냈다.

그리고 한생을 기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죽이고 말았다.

사실 이 노래는 항우가 천하의 요새인 셴양에 있는 한, 유방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장량이 항우를 셴양에서 내쫓기 위해 퍼뜨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셴양을 싫어했던 항우는 그 노래가 하늘의 뜻이라고 여겨, 끝내 팽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뒷날 항우는 셴양을 차지한 유방과의 대결에서 크게 패해 천하를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항우는 ‘금의환향’으로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는 하였지만, 천하를 잃고 만 셈이다.

본격적인 초 · 한의 전쟁

얼마 지나지 않아 전영·진여·팽월 등이 잇달아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에 대항하였고, 유방도 서초(西楚)를 공격함으로써 4년여에 걸친

초·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 유방은 항우가 잠시 제나라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서, 기원전 204년 4월에 팽성을 공격하였다. 항우는 즉시 군대를 돌려 팽성을 지원하여

유방의 군대를 무찌르자, 유방은 헝양(중국 후난 성 지역)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초한은 각각 헝양과 성고를 경계로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였다.
항우의 부대는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계속되는 싸움에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물자 보급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유방에게 가면서 정치적으로도 어려워졌다. 인재 관리에서도 실패하여 원래 항우의 밑에 있던 한신·진평 등이

모두 유방에게 가 핵심 참모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항우는 자신의 핵심 참모였던 범증까지 믿지 못하여 많은 실책을 거듭하게 되었다.

거기에 비해 유방은 병사 수는 더 적었지만, 그동안 군사들이 쉴 수 있었고 군량도 넉넉하였다. 결국 장기적인 소모전 끝에 항우의 군대는

점점 지쳐 갔고, 전쟁의 주도권은 차츰 유방에게 넘어왔다. 전세가 유리해진 유방은 항우에게, 인질로 붙잡고 있는 아버지 태공을 비롯한 가족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항우는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03년 9월, 양쪽 군대는 홍구 강(전국

시대 만들어진 인공 운하로 황하와 의하를 연결한 강)을 경계로 천하를 나누고 인질을 서로 돌려보냈다.

황하 강. 길이는 5,464km로, 중국 서부에서 북부로 흐르는 강.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강으로 황토와 뒤섞인 누런 강물로 이루어져 있다. 중·하류는 중국 문명의 요람지로서 유명하다.

강화의 조건에 따라 항우가 무장을 풀고 동쪽으로 향하자, 유방도 무장을 풀고 서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자 한나라 유방은 ‘지금이 하늘이 내린

때’라며 초나라를 공격하자는 장량과 진평의 말을 받아들여 항우 군을 추격하였다.
결국 기원전 202년 12월에 항우는 군사 10만을 이끌고 가이샤(垓下. 안후이 성 화이쓰다오에 있는 지방)에 진을 치고, 한의 군사와

또다시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한의 장군 한신(‘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은 30만에 이르는 군사를 이용하여

여러 겹으로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항우의 군대에서는 군량이 거의 바닥이 나고, 사기마저 떨어져 달아나는 병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신은 가이샤에 모여든 여러 군사 가운데 초나라 출신들을 골라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한밤중에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놀란 항우는 애첩 우희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시로 표현했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力拔山兮氣蓋世)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 항우의 애마도 나아가지 않네(時不利兮騅不逝)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까!(騅不逝兮可奈何)
우희여! 우희여!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虞兮虞兮奈若何)

그날 밤 항우는 부하 8백여 명과 함께 한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그러나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자, 농부에게 길을 물었지만 그가 일부러 잘못

가르쳐 주어 유방이 보낸 5천의 기병에게 추격을 당했다. 결국 살아남은 항우의 군사는 기마병 28명뿐이었다. 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달려가 우장(烏江. 지금의 안후이 성 화현 경내)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우가 죽음으로써 4년여에 걸친 초(楚)와 한(漢)의 전쟁은 그 막을 내렸다. 진승·오광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진(秦)을 무너뜨린 장본인은 항우였지만,

 마지막 승리의 깃발을 올린 것은 유방이었다. 기원전 202년 2월,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한(漢)제국의 고조(高祖)이다.

한(漢) 제국의 탄생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미선 | 직업역사 논술 강사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역사 논술 강사. 목포대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 국제문화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역사 논술 강의를

시작해 현재 경기대학교, 조선대학교, 서울사이버대....펼쳐보기

출처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 저자정미선 | cp명은행나무 전체항목 도서 소개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