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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업적과 죽음, 음탕한 조태후와 노애

☞역사·족보·전통/건국사·연대표

by 산과벗 2016. 9. 2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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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통일군주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대규모 운하를 건설했으며 그리고 화려한 아방궁 건설 등 초호화 대규모 시설을 많이 만들었으며,

자신이 죽은 후의 안위를 걱정해서, 자신의 분묘 주위를 수비할 6천여점의 병마용까지 만드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거대한 토목사업을 벌였던 매우 특이한 군주였다.

진시황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분열된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한 것으로서, 기원전 3세기때 전국 7웅이 서로 분열해서 대립을 이어오던 전국시대에,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 등 강력한 6개국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함으로서 오늘날 하나의 중국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진시황제는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자신의 탄탄한 권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만한 대신이나 세력들을 거침없이 학살함으로써 포악한 군주라는 이미지도 함께 갖고있는 인물이다.

또한 진시황제는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향락시설 아방궁을 지어놓고는, 중국전역에서 뽑아온 1만명의 미녀들을 데려다가 방탕한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중국천하 통일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그리고 만리장성 축조와 대규모 운하건설 등 나름대로 중국역사상 커다란 업적을 쌓았던 군주로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수많은 무고한 대신들과 학자들을 학살하고, 호사스럽고 화려한 향락생활에 빠져버린 방탕하고도 포악한 군주라는 나쁜 이미지도 함께 갖고 있다.

위대한 통일군주이면서 동시에 포악한 군주라는 두가지 이미지를 함께 갖고있는 진시황제에게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진시황제만이 갖고있는 사사로운 콤플렉스라고 한다.

천하를 통일하고 호화스러운 아방궁에서 수많은 미녀들의 숲에 쌓여서 향락생활을 만끽해나가던 진시황제는 어느날 점점 노쇠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영원히 죽지않고 살 수 있는 불로장생의 꿈을 꾸게 된다.

중국천하를 다 점령했던 진시황제는 전국에 방을 내려서, 불로장생을 가능하게 하는 불로초를 구해올 수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기에 이른다.

진시황제의 허황된 꿈을 간파했던 서복이라는 사람은 진시황제에게 접근해서, 신선들만이 살고있는 상서로운 봉래산이 있는데,

그곳에만 피어나는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진시황제를 미혹했으며, 서복의 감언이설에 홀딱 넘어간 진시황제는 엄청난 금은보화와 3천여명의 어린시녀들을 하사하고, 그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조치했다.

진시황제에게 사기를 쳐서 엄청난 보물들을 뜯어냈던 서복은 바다를 건너가, 동쪽 섬나라로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영원히 죽지않는 영원불사의 삶이라는 허황된 탐욕을 가졌던 천하의 진시황제도 서복이라는 평민출신의 사기꾼에게 완전 사기를 당하고, 국고만 탕진했던 것이다.

아방궁

이때 진시황제에게 사기를 쳤던 서복이 망명했던 지역이 제주도의 서귀포시라는 일설이 있는데, 서귀포라는 말이 원래 서복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그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제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는 감언이설로 엄청난 사례금만을 챙겨고 달아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크게 분노한 진시황제는 사례금을 후불제로 바꾸고, 효험이 없는 약재를 구해온 사람들은 가차없이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시황제의 사사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진시황제도 혼자서 괴로와하는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갖춘 부러울 게 없는 진시황제였지만, 자신의 친어머니 조태후로 인해서, 진시황은 여러가지로 많이 속을 태웠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친어머니인 조태후는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서 항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원래 진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의 이름은 조회인데, 그녀는 원래 승상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며, 여불위의 자택에서 춤을 추는 무희였다고 하며, 매우 뛰어난 미색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불위가 진시황제의 아버지인 광양왕과 결탁하기 위해서, 자신의 애첩 조희(조태후)를 광양왕에게 헌납했다고 한다.

, 여불위는 천하일색의 미모를 갖춘 기생이자 자신의 애첩인 조희를 이용해서, 진나라의 광양왕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승상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고, 엄청난 권력을 휘두룰 수 있게 되었다.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조태후)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임신한 상태에서 광양왕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황후가 된 후에 낳은 아들이 바로 진시황이라고 하며, 진시황제의 친아버지는 광양왕이 아니라, 바로 여불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광양왕이 3년 만에 원인모를 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졸지에 과부가 된 조희(조태후)는 젊은 나이에 독수공방하는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린다.

엄청난 욕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조태후는 음경이 엄청 크다는 가짜환관 노애를 데려다가 자신의 내연남으로 삼고서, 궁궐밖에 사가를 지어놓고 그곳에서 그와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자신의 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한 생활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냥 묵인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엉뚱한 곳으로부터 터져나왔다고 한다.

노애와 끊임없이 정분관계를 이어왔던 조태후는 그와의 사이에 두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 두명의 아들 때문에 그만 조태후와 노애는 엉뚱한 욕심에 사로잡히게된다. 진시황제를 제거해버리고 새로 태어난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조태후와 노애의 반역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버렸고, 분노한 진시황제는 배다른 두동생들은 포대에 담아서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하며, 노애는 사지를 절단하는 능지처참을 했으며, 그의 일가는 삼족을 멸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친어머니 조태후는 테후작위를 빼앗고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포악한 군주 진시황제도 친어머니와의 천륜은 어쩌지못했는가 보다. 얼마 지나지않아 진시황제는 자신의 명을 거두고, 친어머니 조태후를 다시 태후자리에 복위시켰다고 한다.

사기의 기록에 보면 진시황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조태후는 음탕함을 멈추지않았으며, 음경이 큰 노애를 데려다 자신의 정부로 삼고 통정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제는 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함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신의 친모 조태후의 음탕함 때문에,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진시황제는 황후자리에 아무도 앉히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환멸과 컴플렉스가 황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에서 1만명이나 되는 후궁들과 끊임없는 향락생활을 즐겼던 진시황제는 끝끝내 황후자리만큼은 궐석으로 놔뒀다고 한다.

황후자리가 비어있자, 아방궁의 미녀후궁들은 황후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종종 암투를 벌였는데, 진시황제는 황후자리를 탐내는 후궁들은 가차없이 죽어가나 쫒아버렸다고 한다.

어머니 조태후의 음탕함 때문에 받았던 아들 진시황제는 정신적인 상처가 얼마나 컸었는지, 끝끝내 황후는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미녀들과 아방궁의 향락생활을 즐겼던 진시황제가 진실로 존경했던 여인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성정이 불같고 포악했던 진시황제도 이 여인만큼은 매우 존경스럽게 모셨으며, 극진히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천하의 호색한이었던 진시황제를 순정남으로 만들었던 이여인은 바로 과부 청라고 한다. 진시황제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울적해지면 과부 청씨를 궁궐로 불러들였으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울적해진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과부 청씨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이유는 그녀가 평생 절개를 지키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부 청은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지만 곧바로 남편이 병사하는 불행을 겪게된다. 그렇지만 과부 청은 시부모님을 끝까지 봉양했고 자식들을 잘 교육시키면서 자신의 가문을 소중히 지켰다고 한다.

그녀는 절개와 지조를 지킨 당대의 효부였는데, 어머니의 음탕함에 엄청난 환멸을 느꼈던 진시황제는 과부 청씨의 절개를 지키는 모습에 대해 크게 존경심을 품게되었던 것이다.

과부 청은 못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진시황이 그녀를 진정으로 존경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며, 진시황제는 그녀의 행실에 감동을 받아서 그녀에게 집도 하사해주고, 곡식도 하사해주었다고 한다.

천하의 진시황제가 이렇게 일개의 평범한 과부에게 크게 집중했던 이유는, 아마도 과부 청의 절개를 지키는 행실을 보면서. 어머니의 음탕함 때문에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판단된다.

진시황본기의 기록을 보면, 청은 과부의 몸으로 자신의 가업을 성실하게 잘 지켜왔고, 타인의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았다고 시황제가 크게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중국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해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제는 아마도 마음속으로 한없이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보여진다. 자신의 진정한 배우자인 황후를 두지않았으니,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진시황제는 중국통일의 업적을 쌓았지만, 통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또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진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애 대비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축조했는데,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사고로 죽거나 병사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이때 죽은 백성의 수가 5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학자들 460명을 갱도에 빠뜨려서 생매장해버렸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도성내에 수상한 학자들이 모의를 갖는다는 투서를 받았고, 도성에 있는 460명의 학자들을 잡아들여서, 커다란 갱도를 판 후 그곳에 460명의 학자들을 모두 빠뜨려서 생매장시켜 버렸다고 한다.

또한 진시황제는 황하강에서 남쪽 양자강을 이어주는 남북종단 대운하의 건설을 추진하였는데, 이 운하건설 과정에서도 수많은 백성들이 사고와 과로로 숨졌다고 한다.

이와같은 연고로 진시황제는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했던 업적과 만리장성 축조, 운하건설, 중앙집권체제 완성 등 업적들을 많이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폭군이라는 평가를 함께 받고있는 것이다.

병마용갱

진시황제가 섬서성 장안지역의 땅속에 6천만점이 넘는 병마용(수비용 병사인형)을 만들어서 자신의 시신과 보물을 지키도록 했는데, 그가 생전에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자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이같은 대규모 수비시설을 설치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천하를 통일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제였지만, 그가 그토록 고대했던 불로장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진시황제는 기원전 210년경 50세의 나이로 중국땅을 순행하는 도중 마차에서 병사하고 만다.

진시황제가 살아있을 때도 진시황제에 대한 암살시도가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다섯 번에 걸쳐서 중국땅 순행을 하였는데, 자신의 암살기도를 피해하기 위해서, 자신이 탄 마차와 똑같은 마차를 5개를 만들어서, 함께 운행해 다녔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마지막 순행길에 올랐을 때에는 한 마을에서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분열된다는 벽서가 나돌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본 진시황제는 크게 분노하여 그 벽서가 붙어있던 그 마을에 사는 주민들 전체를 모두 몰살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벽서를 본 후부터 진시황제는 시름시름 병으로 앓아눕게 되었고, 그해가 가기전에 길거리의 마차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죽고 난 후, 시황제의 유서를 바뀌치기한 진시황제의 신하들의 농간에 의해서,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는 숙청되어버렸고, 진시황제의 26번째 나이 어린 왕자 호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하는 지름길이 되고 말았다.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왕자 호해(이세황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아방궁에서 주색잡기에 빠져 국고만을 낭비했고, 가혹한 조세수탈에 분개했던 농민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진나라는 기원전 207년에 멸망하고 만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지 15년 만에, 진시황제의 아들 호해가 황제가 된 지 불과 3년 만에 통일왕국 진나라는 멸망한 것이다.

출처 : 어메이징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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