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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구 서예

☞墨香·古書畵/古書藝·한국

by 산과벗 2006. 2. 2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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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 는 문신·서화가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며, 두수(斗壽)의 10 대손이다.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인(獐位山人)이다. 그는 15세에 돈령부(敦寧府) 직장을 지내고,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는 후에 규장각에 들어가 상대(常帶), 한림(翰林), 대교(待敎), 직각(直閣), 사인부제학(舍人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 도승지,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에 수차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고 은거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誤)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수경(瘦勁:가늘면서 힘찬)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 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 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위의 대련 풀이: [석창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이 이정규(중국 당나라때 먹을 만들던 유명한 장인)가 만들었던 먹과 같이 좋은 먹을 모았는데 사람들에게 그것을 갈아서 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석창이 또 말하기를 언덕에 나있는 나무들이 이미 한 아름씩이나 되도록 굵게 자랐지만 먹은 아무탈 없이 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말을 들은 나는 일찍이 시를 써서 희롱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묵을 가는 것이 아니라 묵이 사람을 갈아서 노쇠하게 만들었군 했다. 그리고 나도 역시 아름다운 먹 70여 매를 모아 두었는데 그래도 오히려 더 모으려는 마음을 가졌으니 역시 어리석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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