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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운회(宋運會)

☞墨香·古書畵/古書藝·한국

by 산과벗 2006. 2. 2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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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운회(宋運會) 1874년(고종 11년) 율어면 금천 태생으로 중국, 조선의 서예 명인체를 답습,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했으며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로 별세하였다.

 

설주 송운회의 매봉유장    

-선인묵적에서 발췌-

 

송운회는 고종 11년(1874년) 보성 율어면 금천리에서 출생 한말의 혼돈기, 일제의 강점기와  한국동란을 체험 하면서도 글씨 말고는 잠시도눈을 팔지 않았으며, 1965년 임종때 까지 붓으로 藝道(예도)의 길을 걸은 脫俗雄筆의 대가라 불리운다 어려서부터 영재 이건창의 門下에서 兄 明會(號 小波, 文章家 시인)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이때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명인들의 필법을두루 섭렵하는 한편, 명나라의 문인 동기창의 필법에도 심취했다고...

 

 

전주 박물관에 소장된 설주의 초서

 

설주는 모든 서체에 능통 했으나 특히 해서, 행서, 그 중에서도 그의 초서는 가히 신선의 경지에 이른 신필로 통 한다고 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작품의 성가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모두 물리쳐버리고 강직함과 꼿꼿한 자존심을 지켜내며 끝내 야인으로 머무르는 선비정신을 간직했다고 "설주의 먹물에 보성강물이 검게 물들었다" 라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보성 오봉산 용추폭포
약 10여미터 정도지만 두차례에 걸쳐 바위를 타고 내려와 두갈래로

갈라져 떨어 지는 모습으로, 작지만 폭포의A,B,C를 모두 갖추고 있다

 

위 폭포 우측 절벽에 새겨진 송운회의 서체

 

"글을 쓰지못 하는날이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이 " 라고 했던 그는 세상을 뜨기 하루 전, 가족들 앞에서  一心」이라는 두 글자로 필관을 부수며 낙관을 새기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한다. 아래는 설주에 관한 몇 가지 평이다. 

"백로 한 마리가 강을 건너 하얀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것 같다." 모든 명리에서 초월, 깨끗한 필법으로 고금 서법에 통달한 이다" 설주와 아래 소개할 석전 두 사람 모두의 뿌리는 호남 서예의 거두 창암 이삼만 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 할 필요도 있다.

 

石田 黃旭

 

선비의 한 전범을 보이며 악필이라는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이룩한 석전(石田) 황욱(黃旭)은

1898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났다. 황효익의 5남3녀중 2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15대를 내려온 문한세가(文翰世家)로

영조때 실학의 거장인 황윤석(1729-1791)의 종가(宗家) 7대손이다.


석전은 옛선비들이 그러하듯 5살 때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그러다 1918년 근동에 살던 9살 위의 근촌 백관수의 권유로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

신학문을 익힐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유가적 전통을 고집하던 부친의 엄명으로 자진 중퇴,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1920년 석전은 일제의 암울한 시대상을 눈뜨고 볼수 없는데다 끓어 오르는 열정을 삭이기 위해

처숙(妻叔) 노병권(전 국회의원 노일환씨의 부친)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10년 세월을 돈도암(頓道菴)에 기거하며 오직 서예와 한학탐구에 전념했다.

 이때 탄탄한 기초가 닦이고 훗날 당당한 석전체의 원형이 마련되었다.


당시 그는 송나라의 명필 조맹부(松雪)체를 비롯 왕희지, 구양순 체 등을 두루 섭렵했다.


나중에 석전이 “곱게 뵈려는 글씨 보다는 법필(法筆)을 섭렵하고 정심(正心)으로 써야 하고

욕심없는 정자(正字)를 많이 써야 그 나름대로 자기의 창작서(創作書)가 된다”고 한 말은

자신이 기본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말해준다.


또한 ‘如錐劃沙 如印印泥’ (송곳을 잡아 모래위에 획을 긋듯하고 머무를 때는

진흙위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는 주장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석전은 1930년 고향으로 돌아와 해방이 될때까지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신위(申緯 1769-1845)를 사숙하며

옛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六藝(禮·樂·射·御·書·數)를 더 깊숙히 익혔다.

말하자면 석전은 중원의 무림에서 고수들의 도를 터득한후

한국적인 토양에 맞는 자신만의 필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때 석전은 고창과 정읍 등지에서 시주(詩酒)와 활쏘기, 가야금을 즐겼으며

율계회를 결성하여 정악(正樂)을 합동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필명은 가까이 사귀던 정인보(鄭寅普) 김성수(金性洙) 등으로 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며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가까운 이웃의 비문과 선대의 묘비를 썼을 뿐

한번도 서예가로서 중앙무대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국전(國展)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초연하게 은자(隱者)로서의 품격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 전북일보 조상진기자 글 -

 

석전의 글씨는 살아 움직이는 산맥이다.

그것도 꿈틀꿈틀 생동하는 거대한 산맥이다.

 

그의 글씨를 보노라면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한폭의 백두대간 앞에 서있음을 느낀다.

골짜구니와 등성이가 조화를 이루며 가파랗게 또는 완만하게 끊어질듯 이어지는 백두대간.

뼈만 추려 놓은 것 같은 그 산맥 사이로 금강산 구룡폭포의 굉음이 들려온다.

또 수만년을 숨쉬어온 모악산 기암괴석 사이에 뿌리를 박은 노송(老松)을 스치는 솔바람 소리도 들린다.


이종석(전 동아일보 논설실장)은 석전의 경지를 ‘풍상의 인고를 견디며

오히려 더욱 푸르르고 싱싱한 노송의 강기(强氣)’에 비유하고 있다.

수백년의 풍상을 견디며 오히려 붉은 줄기와 푸른 솔잎을 빚어내는 신비한 힘,

구천(九泉)에 까지 뻗어 내렸다는 뿌리로 하여 감로(甘露)의 자양을 빨아 올리는

노송의 힘이 석전 글씨의 소산이라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곤(전북예총 회장)도 그의 망백전(望百展·91살)에 붙인 글에서

“그 웅필(雄筆)의 힘이 어디로 부터 분출되는지 그것은 신(神)만이 안다”고 극찬했다.

 

- 전북일보 조상진기자 글 -

 

만사가 봄처럼 성취됨을 뜻 함인데,

 이 봄과 너무 잘 어울리는 글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회갑(1960년) 이후 석전에게는 서서히 크나큰 시련이 닥쳐왔다.

붓을 잡던 오른손에 수전증이 온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수전증이 오면 붓잡는 일을 포기하는게 상례다.


석전은 궁리 끝에 자신에게 맞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했다. 붓

을 손바닥으로 거머쥐고 꼭지부분을 엄지로 꽉 눌러 붓을 고정시키는 방법이었다.


그 전까지 석전도 일반적인 운필법에 따라 엄지와 식지,

가운뎃 손가락으로 붓대를 잡고 쓰는 쌍구법(雙鉤法)으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을 즐겨 썼다.


이 무렵 석전은 첫 서예전을 가짐으로써 세상에 얼굴을 정식으로 드러냈다.

1973년 75살에 전주에서 유지들의 강권에 못이겨 결혼 60주년 기념 서예전을 연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희수(喜壽)기념 전시회를 가져

중앙무대의 서예가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명을 남겼다.


이후 광주와 부산, 서울 현대화랑, 롯데미술관, 전북일보, 호암갤러리(중앙일보),

 예술의 전당(동아일보) 등에서 초대전과 회고전 등을 거의 매년 가졌다.


1988년에는 구례 화엄사의 일주문 현판, 1991년에는 금산사 대적광전 현판휘호를 각각 남겼다.

 

-전북일보 조상진기자 글-

 

 

- 팽다지연 -

 

차를 달이자 학이 그 차 달이는 연기를 피하여 난다,

즉 신선세계의 정취를 묘사한 글귀

 

석전 서예는 악필로 상징된다.

 

평자들은 80살부터 사망하기 까지 15년간을 석전예술의 황금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악필법은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마음과 손이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쓸수 없는 ‘심법(心法)’의 글씨다.

가야금 줄을 퉁기듯 기백 넘치는 석전체가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가야금과 소리와 활쏘기에 전념하면서 홀로 정진했던 청장년기 각고의 세월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석전의 악필은 이전의 맑고 담담한 분위기와는 달리 삽필(澁筆)의 구사가 두드러지고

약간의 과도기를 거쳐 83- 84살에 오른손 악필의 절정을 이루었다.


85살부터는 오른손 악필도 곤란을 느끼면서 87살에 왼손 악필을 시도했다.

왼손악필을 구사했던 10년 동안 그의 서풍은 93살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곧 90살 까지는 자형(字形)이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는 일반적인 행서의 흐름을 유지하다가

 93살 부터는 반대로 오른쪽 어깨가 내려 가면서 자간(字間)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묘한 것은 전체적으로 통일감과 안정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다른 서예가들과 달리 석전은 90살 이후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것은 자신의 글씨에 대해 완전히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며

곧 그의 예술이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人書俱老(사람과 글씨는 더불어 늙는다)마저 뛰어 넘었다고나 할까.


석전은 밖으로 굴곡 많은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헤치며,

안으로는 자신의 신체적 불운을 딛고 일어선 뜨거운 예술혼의 화신이었다.


원로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은

“석전의 글씨는 그 경직장엄함이 노송에 영풍이생동(迎風而生動) 하는 것 같고

전아온윤(典雅溫潤)함은 장강(長江)의 임파이유동(任波而流動) 하는 것 같은 서체로써

특히 리듬이 풍요한 여운(餘韻) 여정(餘情)의 글씨 한 자(字) 한 획(劃)에서

백아(伯牙)의 탄금성(彈琴聲)을 듣는듯 하다”고 표현했다.


- 전북일보 조상진 기자 글 -  

 

 

송운회 병풍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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