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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산 남사의 흔적

☞산사를 찾아서/우리의 사찰

by 산과벗 2006. 2. 2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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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보(天寶) 14년 을미(755)에 신라 경덕왕이 왕위에 올라27-[고기 (古記)]는 천감 24년 을미(14년)에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했으니, 어찌 선후가 뒤바낌이 이와 같이 심했을까- 이 사실을 듣고 정유년(757)에 사자를 보내어 큰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南寺)라 했다. 광덕(廣德) 2년- [고기]에는 대력 원년이라 했는데 또한 잘못이다-갑진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었다.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액호(額號)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는데 남 은 금물이 모자라서 몸에 두루 바르지 못했으므로 아미타불상에는 또한 얼룩진 흔적이 있었 다. 그 액호는 현신성도 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낭자는 부처의 몸으로 중생을 자비로 교화했다고 할 수 있다. [화엄경]에 보면, 마야부 인(摩耶夫人)은 선 지식(善知識)이었으므로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 (解脫門)을 보임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그 미묘한 뜻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녀가 준 글은 애절 완곡하여 사랑스러우며 순탄 원활하여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 다. 아! 낭자가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로써 말할 줄 몰랐더라면, 이같이 할 수 있었 겠느냐? 그 박박에게 준 끝 구절에 마땅히 '맑은 산방에서 노하지 마오' 할 것인데 그렇게 말하지 않음은 대개 세속의 말처럼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린다.

푸른빛 바위 앞에 문을 두드려
날 저문데, 찾아온 이 누구인고?
가까운 남암(南庵)으로 찾아가지지
이곳의 푸른 이낀 밟지 마시라

이것은 북암을 기린 것이다.

산골에 날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소, 머물고
늦은 밤에 백팔염주(百八念珠) 부지런히 세니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잘까 두렵소

이것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솔그늘 십 리에 길을 헤매어
시험하려 밤중에 승방으로 오셔서
세 통에 목욕 끝나 날 새려 할 때
두 아일 낳고서 서쪽으로 갔구나

이것은 관음보살 낭자를 기린 것이다.

 
 
[창건 조감도]
   
 
   
 
[ 기와 조각 ]
 
[ 향로로 추정되는 남사의 흔적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옛날 신라의 진산으로 알려진 백원산(지금의 경남 창원 소재)아래 자리한 어느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란 두 청년 선비가 살고 있었다.
풍채가 좋고 골격이 범상치 않은 두 청년은 속세를 초월한 높은 이상을 지닌 좋은 친구였다.
이들이 20세가 되던 어느 가을날.

두 사람은 백월산에 올라 먼 산에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이때 부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게, 우리가 이렇게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여 지낼 수가 없지 않은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나도 동감일세.』
두 청년은 그날 함께 출가할 것을 결심, 그 길로 마을 밖 법적방(창원에 있던 절)에 가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부득은 회진암에, 박박은 유리광사에 각각 터를 잡은 뒤 처자를 데리고 와서 밭을 일구며 정신수양을 했다.
양쪽 집이 서로 왕래하며 오손도손 재미있게 지냈으나 두 사람은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지내며 의식이 풍족하니 좋기는 하지만, 연화장 세계에서 여러 부처가 즐기는 것만 못하네. 더구나 불도를 닦아 참된 것을 얻기 위해 머리를 깎았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인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것일세.』
추수를 끝낸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장차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꿈을 꾸었다.
백호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그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상서로운 꿈이었다.
이튿날 아침,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똑같은 꿈을 꾸었음에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쪽에 판잣집을 만들어 살면서 미타불을 염송했고, 부득은 남쪽 고개에 돌무더기를 쌓아 집을 만들어 살면서 아미타불을 성심껏 구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경덕왕 8년(709) 4월 8일.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릴 무렵, 20세 안팎의 아름다운 한 낭자가 난초 향기를 풍기면서 박박이 살고 있는 판잣집으로 찾아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글을 지어 박박 스님에게 올렸다.

갈 길 더딘데 해는 져서 먼 산에 어둠이 내리니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런 스님은 노하지 마소서

글을 읽은 박박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므로 그대가 머물 곳이 아니오. 지체하지 마시고 어서 다른 곳으로 가 보시오.』
낭자는 다시 부득이 살고 있는 남암으로 찾아갔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맑고 고요하기가 우주의 근본 뜻과 같거늘 어찌 오고감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스님의 뜻이 깊고 덕행이 높다는 풍문을 듣고 보리를 이루는 데 도움을 드릴까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답한 낭자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고
존사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을 들어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은 이 게송을 듣고 내심 몹시 놀랐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은 아니나,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밤이 깊자 부득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을 마주한 채 고요히 염불삼매에 들었다.
새벽녘이 되자 낭자는 부득을 불렀다.
『스님, 제가 산고가 있으니 스님께서 짚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자리를 마련해 준 뒤 등불을 비추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다시 목욕하기를 청했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일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물을 덥히고 낭자를 통 안에 앉혀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부득이 놀라 크게 소리치니 낭자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을 하시지요.』
마지못해 낭자의 말에 따라 목욕을 한 부득은 또다시 크게 놀랐다.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더니 자신의 살결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옆에는 연화좌대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했다.
『나는 관음보살이오.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말을 마친 낭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한편 북암의 박박은 날이 밝자
『부득이 지난밤 필시 계를 범했겠지. 가서 비웃어 줘야지.』
하면서 남암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부득은 미륵존상이 되어 연화좌 위에 앉아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서 이리 되셨습니까?』
부득이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박박은 자신의 미혹함을 탄식했다.
『나는 마음에 가린 것이 있어 부처님을 뵙고도 만나지를 못했구료. 먼저 이룬 그대는 부디 옛 정을 잊지 말아 주시오.』
『통 속에 아직 금물이 남았으니 목욕을 하시지요.』
박박도 목욕을 하고 무량수를 이루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 법을 청하자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한 뒤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
훗날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말을 듣고는 백월산에 큰절 남사를 세워 금당에 미륵불상을 모시고 아미타불상을 강당에 모셨는데 아미타불상에는 박박이 목욕시 금물이 모자라 얼룩진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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