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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가락국사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2. 2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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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알기쉬운 가락국사

이 교재는 종사 교재용으로 나온 책으로 간단 명료하고 알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에서 펴내고 김시우님이 지은 책이다. 우리 젊은 종친들에게 이 책을 소개함으로서 가락역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에 소개하고져 한다. < 김상준 : 진해중소기업협회 / 가락진해청년회>
 
 

 알기쉬운 가락국사

1. 가락국의 건국과 발전

(1) 국가의 기원과 건국 설화

사람은 태어나면서 고유한 성과 이름을 가진다. <조선씨족 통보>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모두 623본이라고 한다. 이 숱한 성씨는 나름대로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 본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중에도 김씨가 대성으로 되어 있는데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 계통과 신라의 김알지 계통이 있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우고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의 시조가 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천지개벽이래 나라가 없던 이땅에 기원전 57년 경주지방에 6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진한 12개 부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세우고, 기원전 37년에는 압록강변 계루부에서 주몽이 출현하여 다섯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세우고 기원전 18년에는 백제(하남 위례성)에서 온조가 나타나 마한 54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백제를 세웠다. 이들 제국들은 각기 세력 확장을 위해 땅이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한 낙동강 하류의 김해를 중심한 변한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이 지방 부족장들인 9간들이 서기 42년 3월 3일 구지봉에서 모여 지도자(왕)를 추대하기 위한 대왕맞이 의식을 행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라고 노래하며 춤추고 있는데 돌연 구지봉 상공에 자색 밧줄에 금합이 달려 내려 왔다. 9간등 무리들이 달려가 금합을 열어 보니 황금빛 반짝이는 6개의 알이 있었다. 이를 9간중에 우두머리인 아도간의 집에 모셔 놓았다가 그 이튿날 가보니 6개의 알이 6동자로 변해 있었다. 이중에서 제일 먼저 나온 동자의 이름을 머리 수(首)자를 써서 수로( 首露), 금합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고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이가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나머지 5동자들에게 차례로 영토를 정하여 분봉하였으니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양)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 이른바 금관가야(김해)를 합하여 6가야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선택하고 왕을 추대할 때 김수로왕처럼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설화나 단군신화의 환웅이나 일본의 니니기 강림신화처럼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천손강림설로 그들의 초인간적인 능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신라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 고구려 시조 주몽,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난생설화는 우리 민족에 전승되어온 건국에 얽힌 사상적 소산이며 강한 자기 긍정과 자존을 심어주는 씨족사적 사실(史實)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2)허왕후의 도래

서기 48년 7월 27일에 아홉명의 중신들이 궁으로 들어가서 수로왕을 뵙고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아직 아름다운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규수 가운데서 걸맞는 낭자를 가려서 궁에 들이고자 하오니 왕후로 삼아 주옵소서." 하니, 왕은 "내가 이땅에 내린 것은 하늘의 뜻이니라. 그대들의 염려할 바가 아니라."하면서 유천간(留天干)에게 영을 내려 망산도(경남 진해시 소재)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족에서 검붉은 깃발을 펄럭이면서 북으로 떠오르는 배가 있었다.

유천간등이 망산도에서 그것을 보고 엉겁결에 횃불을 올리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뭍으로 오르려 하였다. 신귀간이 급히 궁으로 달려가서 이 사연을 수로왕에게 아뢰니 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뒤늦게 왕은 아홉 중신들을 마중 보내며 아름다운 키와 화려한 돛으로 꾸며진 배로 궁에 모셔들이도록 일렀으나 그 배에 타고있던 왕후는 따르지 않았다.

<나와 그대들은 익히 아는 처지가 아니니 어찌 함부로 따를 수 있겠는가>고 하자 다급한 유천간등이 왕에게 이 사연을 아뢰니 왕은 뒤늦게 시종들을 거느리고 궁의 서남쪽 산기슭으로 나가서 휘장을 두르고 그 속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산자락 끝 별포진(別浦津)에 배를 대고 왕후는 뭍으로 올라 높직한 언덕마루에서 한숨 돌리면서 입고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그것을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얼마후 왕후가 왕이 기다리던 자리로 가까이 다가오자 왕은 몸소 왕후를 휘장 속으로 맞아들이고 따르던 일행은 댓돌 아래서 절하고 곧 물러났다.

그런데 왕과 더블어 침전에 든 왕후는 <저는 본디 인도에 있는 아유타국의 왕녀로서 성은 허(許)요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올해 나이 16세 이옵니다. 지난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께서 어머니와 함께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 왕의 자리에 앉게 된 성서러운 인군으로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아직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그리로 가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연으로 저는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와서 아녀자의 몸으로 이렇게 뵙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에 답하기를 <나는 나면서 성서러운 사람으로 미리 왕녀가 먼 곳으로부터 찾아 올 것을 알고 있었으며 신하들의 간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소. 이제 아리따운 그대가 몸소 찾아 들었으니 더 바랄것이 없소.>라고 하면서 2박 3일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윽고 8월1일 본궁으로 돌아갈 때 왕과 왕후는 한 연(가마)을 타고 궁에 당도하게 된 것은 정오였다.


(3)하늘이 내린 배필

왕후를 맞은 수로왕이 그로부터 나라의 옛 제도를 새롭게 고치고 나라 안을 잘 다스릴 뿐만 아니라 백성 사랑하기를 아들처럼 하여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따르고 그 다스림은 너그러우면서도 잘 이루어졌다 한다. 왕과 왕후의 금실은 흡사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그리고 밝음이 어두움을 작짓듯 했다고 전한다. 왕후는 아들 10형제와 공주 자매를 두고 189년 3월1일에 이승을 떠난다. 백성은 땅이 꺼진듯한 크나큰 슬픔속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녀가 백성을 사랑했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자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으로, 비단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비단고개로, 그리고 검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으로 고쳐부르기도 하였다.

홀로된 왕은 밤마다 베개에 몸을 기대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가 10년이 지난 199년 3월 23일에 승하했다. 백성들은 어버이를 여윈 듯 울부짖어 슬픔은 왕후가 돌아갔을때의 유가 아니었다. 마침내 궁궐 동북평지에 능을 마련하니 봉분의 높이는 1장이요 둘레는 3백보에 이르렀다. 후에 이곳에 수로묘(首露廟) 혹은 수릉묘(首陵廟)를 세우고 그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10세손인 구형왕까지의 신위를 여기에 모시고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 15일간에 성대하고도 정갈한 제전을 바치고 그 다음에도 끊이는 법이 없었다.


(4) 가락국의 영역과 애민정치

구지봉에 탄강한 김수로왕은 키가 9척이며 눈썹은 팔자로 채색이 나고 눈동자는 겹으로 되었다고 한다. 서기 42년 3월 15일 9간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국호를 대가락국, 수도를 김해로 정했다. 수도 김해는 낙동강 하류 삼각주 지역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이집트 나일강 하류와 흡사하다. 낙동강은 태배산 황지에서 시작하여 안동, 상주, 의성, 선산, 고령, 합천, 함안, 밀양의 모든 강물을 합하여 김해 동쪽에 이르러 삼각주를 형성하고 대한해협으로 들어간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

당시 가락국은 1만호에 인구 75,000여명으로 국토의 경계는 동은 황산강(낙동강)이요, 서남은 창해,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은 나라 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등이 모두 이주민들의 정복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 것과는 달리 가락국과 신라는 이미 먼저 거주하고 있던 토착세력 즉 가락국은 9간, 신라는 6촌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는 민주방식으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김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대사회에서는 드물게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치를 표방하여 창업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흙담과 이엉을 사용하여 임시로 대궐을 짓고 질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정사를 폈다고 가락국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하들이 이제 대왕께도 큰 대궐을 지어 왕으로서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간하자 대왕께서는 <백성들의 생활이 아직도 넉넉지 못한테 내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대궐부터 지어서야 되겠느냐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진 연후에 대궐을 지어도 늦지 않다>면서 3년 동안이나 토담과 이엉으로 된 가궁에서 정사를 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는 관청의 청사나 무기고, 창고 등을 지을 때나 성곽을 쌓을 때도 반드시 농번기를 피하여 농한기를 이용하였으며 농한기에 시작하였던 공사라 할지라도 농번기가 되면 중단하였다고 하니 이러한 대왕의 애민사상은 민본적 왕도정치를 실현한 최초의 군주였다


(5) 가락국의 발전과 신라와의 대립

가락국은 국왕 밑에 9간들이 모여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을 토의하는 정치기구와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기구가 있었으며 통치기구에는 관리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건국설화에 나오는 구지봉 모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9명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들이 건국 초기에는 국왕을 선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의회기구였으나 국왕의 세습권이 확립된 뒤부터 그들은 국왕을 직접 선출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김수로왕이 수도를 건설할 때 무기고를 세우고 수백척의 선박과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은 군대와 군사관계를 맡은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가락국이 당시 이미 신라, 백제에 맞서는 강력한 고대국가로서의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가락국이 낙동강 하류에 강성한 세력을 형성하여 변한 지방을 아우르자 박혁거세를 받들고 국가체제를 형성하여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던 신라로서는 건국 100년만에 큰 위기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즉 3대 유리왕 19년(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김해에 가락국을 세움으로서 낙동강 유역을 가락국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유리왕이 죽고 그해(서기 57년) 2대 남해왕의 사위인 석탈해가 4대왕이 되어 석씨 왕권이 서는데 석탈해의 출자와 그의 왕권도모에 관한 상황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모두 짙은 베일에 쌓여있다. 그런데, 석탈해는 신라 왕위에 오르기 전 홀연히 가락국의 수로왕 앞에 나타나 흔연히 웃으면서 <왕위를 빼앗으러 왔노라>고 하였다. 그는 이때 스스로 완하국의 왕자를 자칭하면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수로왕이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도케 하라 하였거늘 어찌 그대에게 그냥 나라를 내줄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이에 명분으로 나라를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탈해는 술수로서 겨루자고 제안하였다. 수로왕이 이에 응하여 기를 겨루었으나 탈해가 패하여 도망하였다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기록하고 있다. 탈해는 김해에서 가까운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를 타고 도망갔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김해는 이미 중국배가 닿을만한 항만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로왕은 물러가는 탈해를 수군 5백척을 동원해서 추격했으니 이는 수로왕이 왕위를 넘보는 자에게 보인 막강한 수군력의 과시라 하겠다.

계림으로 달아난 탈해는 뒤에 유리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올라 신라에서 석씨왕권을 창시하게 된다. 석탈해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즉위 21년째인 서기 77년 대병을 이끌고 또다시 가락구을 침범하였으나 황산진구에서 크게 패하여 정권마저 유지하지 못하고 왕권을 다시 박씨(5대 파사왕)에게 빼앗기게 된다. 석탈해가 2대 남해왕의 사위이고 3대 유리왕과 처남남매간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2번에 걸친 가락국 침범은 결코 우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파사왕이 취임한 이후에도 신라와 가락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삼국사기에 파사왕 15년 가야의 신라 마두성 포위, 파사왕 17년 가야의 신라 남방 습격, 파사왕의 가소성과 마두성 구축이라든가 월성을 쌓고 궁궐을 옮긴 것은 모두 가락국과의 충돌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로왕은 신라 파사왕 23년 음즙벌국(경북 안강)과 실직곡국(강원 삼척)이 분쟁을 일으켰을 때 신라왕의 요청에 의해 이를 중재 해결한 일도 있다. 이때 신라 경주까지 거동한 수로왕은 자신의 환영잔치에 지위가 낮은 자를 보낸 한지부의 추장 보제를 참하라 할 정도로 강세를 부렸다. 이와같이 신라와 가락국과의 충돌과 협력은 결국 신라가 가락국의 철(鐵)을 탐낸 때문이며 전투가 격렬했던 황산진구 등은 모두 철의 산지였다.

이와같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난 신라와 가라국과의 관계를 살펴 볼 때 가락구의 건국 연대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는 것이며 이 건국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백제 건국 또한 재검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6)가락국의 멸망

고대사에 있어서 건국 시초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워도 멸망 과정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다. 그런데 가야는 그 세력의 성장뿐만 아니라 멸망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면이 많다. 가야 멸망에 대한 기존 학설을 보면 2,3세기에 변한 지역은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김해를 중심한 세력은 큰 타격을 받고 낙동강 서안으로 축소되어 탁기탄(밀양), 탁순(창령), 안라(함안), 가락국(남가라-김해)등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 옛가야 지역 내부에서 재통합의 기운이 일어나 고령의 대가야국 중심의 세력이 형성되어 다시 신라, 백제와 대등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는 중에 신라, 백제의 팽창에 따라 524년(신라 법흥왕) 탁기탄(밀양,영산)은 신라에 병합되고 521년 안라(함안)는 백제에 병합되어 탁순(창원), 가락국(남가라-김해)만 남게 됐다. 이와같이 가야지역의 남부제국이 신라와 백제에 의해 분할 점령되자 신라는 백제가 김해 지역까지 힙쓸 것을 우려하여 532년 군사를 들어 가락국을 병합하고 백제는 534년 탁순국(창원)에 압박을 가하며, 함안.창원 사이에 구례모나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가락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법흥왕 19년 532년 금관국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세종, 무력, 무득)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이들을 예로 대접하여 상등의 위를 주고 본국으로 식읍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에 까지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로 보아 신라는 가락국왕이 그 가족들과 함께 평화적으로 항복하였으므로 이를 예우하여 상등의 위를 주어 진골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 무력이 진골의 최고관직인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계체기나흠명기는 신라의 무력 침공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구형왕은 김씨이고.... 신라 제24대 진흥왕(법흥왕의 잘못임)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이 친히 군졸을 부렸으나 수가 적어 대적할 수 없어 왕비, 왕자와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고 되어 있다. 이와같이 가야 남부제국은 신라와 백제에 밀려 쇠퇴기에 들어 갔으며, 가락국은 10대 구형왕 12년 수로왕이 나라를 건국한지 491년만에 세 부족을 느끼고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고자 평화적으로 왕위를 신라에 넘겨 주었다. 구형왕의 양위는 시조대왕의 애민정신과 민본주의를 표방한 왕도정치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2. 가락왕손의 갈래

(1) 성씨의 유래

성과 본관이 보편화 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은 금합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가 됐다. 가락왕손은 김해김씨, 김해허씨, 인천이씨로 나누어 진다.


(2) 허씨와 인천이씨

김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왕후가 늘 자기의 성이 이 땅에 전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자 왕이 이를 가엾게 여겨 둘째, 셋째로 하여금 외가의 성을 잇게 하니 이로부터 허씨가 된 것이다. 대왕의 넷째로부터 열 번째인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 운상원으로 들어가 3년간 수도한 끝에 7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경남 하동의 칠불사 창건의 유래이다. 그후 허씨의 후손중에 신라 35대 경덕왕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허기(許奇)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이 서울 장안에까지 쳐들어오자 허기는 멀리 촉나라까지 현종을 호종하니 현종은 난이 끝난후 허기에게 황성(皇姓)인 이씨를 사성하고 소성백이란 작위와 식읍 1천500호를 내렸다.

그러나 신라 조정에서는 허기가 당에 오래 머물러 4년만에 돌아왔으므로 이를 허물하여 당나라 황제가 내린 작위와 식읍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허기의 6세손인 허겸(許謙)까지 <李許>복성을 사용하였다. 그후 허겸의 아들 한(翰)에 이르러 허씨 성을 쓰지 않고 이씨 성으로 쓰게 되었으며 소성(작위)은 오늘날 인천인지라 이들을 인천이씨(경원이씨 혹은 인주이씨라고도 한다)라 하게 됐다.

이와같이 인천이씨는 허씨로부터 갈라져 나갔으므로 역시 김수로왕의 후손이 된다. 이렇게해서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는 김수로왕이 세웠던 나라인 가락국의 왕손으로서 제향 참사와 종사를 같이 하고 있다.


(3)선김(先金)과 후김(後金)

김해김씨 중에는 선김과 후김이라는 것이 있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후손을 선김이라 하고, 경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때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김충선계의 김해김씨를 후김이라 한다. 경순왕계의 후김은 김렴(金렴)을 시조로 하는데 김렴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김해를 관향으로 삼아 김해김씨로 되었다. 그의 후손 김씨흥(金時興)이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과 명종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렴의 작위에 따라 김해김씨로 본관을 써 오다가 조선 헌종 15년(1849년) 김씨흥의 작위를 따라 대부분 금녕김씨로 개칭했으나 아직도 개칭하지 않고 옛 김해김씨 족보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또 임진왜란때 가등청정의 휘하에서 왜병 선봉장으로 조선에 쳐들어 온 사야가(沙也哥)는 상륙한지 1주일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金應瑞:김해김씨 양의공파조)장군에게 <내가 비겁하고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고 몰래 글을 보내 귀순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장수가 된 그는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18개 왜성을 탈환했다. 이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김씨의 성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은 김해김씨와 혼동을 피해 사성 김해김씨로 칭하면서도 호적과 족보에 김해김씨로 올라 있는고로 이들을 후김이라 한다. 왜란이 평정된 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사위가 되어 저 경상북도 우록(友鹿)골에 터를 잡아 세거하게 됐다.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우록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김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후김으로 지칭되고 있다.


(4)김자점(金自點) 사건이란?

조선조 효종2년(1651년)에 일어난 김자점의 역모사건은 오김(吾金)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김자점은 인조때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세종때 문과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이름을 떨친 김질의 후손이다. 그런데 김자점은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손자 세룡(世龍)을 인조의 딸 효명공주와 결혼시킨후 교망방자하여 충민공 임경업 장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농단하다 파면되었다.

양심을 품은 김자점은 조국을 배반하고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등 역모를 꾀했다. 이에 효종은 김자점 일가를 처형하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했다. 그런데 자점은 국문을 받으면서 그의 본관을 김해로 주장하여 당시 오김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지금도 자점의 본관을 김해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 오김을 욕되게 하고 있다.

 

3. 가문의 형성과 가계의 성쇠

(1) 김해김씨 가문 형성의 배경

김해김씨 가문은 원래 가락국의 왕손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신라 법흥왕19년(532년) 가락국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3아들(奴宗, 武德, 武力)과 더불어 나라를 들어 병합하므로 신라조정은 이들을 예로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위(位)를 주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 법흥왕 진흥왕대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 격화된 시기여서 신라로서는 가락국과 같은 배후세력을 정복하여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으며 그 유민들을 전쟁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가락왕실이 비록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고는 하나 폐쇄적인 신라사회에 정치적 기반이 바로 확립될 수 없었다.

이와같은 가락계 왕실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김무력(金武力)인데 그는 진흥왕 14년 신주 군주로 임명되어 그가 무장으로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마침 진흥왕 15년인 서기 554년 김무력은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살해하고 백제 군사 3만중 2만9천5백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 관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세력 판도를 바꾼 결정적 전기가 됐고 가락왕실계인 김해김씨 가문을 신라의 신흥귀족으로 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이후 무력의 지위는 상대등(신라의 최고관직으로 화백회의 의장) 다음의 고관으로 승진되어 진흥왕 30년(569)에는 최고위 관직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아직도 무력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이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과 혼신하려 했을 때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극력 반대했음이 김서현과 만명부인과의 혼인 설화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라 조정에서도 진흥왕이 재위 37년만에 승하하고 당시 실권자였던 거칠부의 힘을 빌려 차남이 즉위했는데 이가 25대 진지왕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거칠부가 사망하자 곧 폐위되고 왕위는 다시 장남인 진흥왕의 장손이 계승하니 이가 26대 진평왕이다.

그런데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 김용춘이요, 김용춘의 아들이 후에 신라 제 29대 태종 무열왕이된 저 유명한 김춘추이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 속에 김해김씨 가문은 꾸준히 중립을 지키며 계속 공을 세워 군사권을 서서히 장악해 가면서 신귀족으로서의 가문을 형성해 갔다.


(2) 김유신가와 김춘추가의 결합

김서현은 이미 선친에 의해 다듬어진 가문을 왕족의 지위까지 올려 놓을 필요에서 끝내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을 하여 당당한 신귀족 또는 왕족으로서의 가문을 격상시키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지위 향상에는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진지왕의 아들)의 협조에 힘입은 바도 컸으니 용춘 또한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정치적 패배속에서 자신의 가문유지에 새로운 협력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즉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된 김용춘과 정통왕족이 아닌 김서현의 결속은 어저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진평왕 51년(629년) 김서현과 김용춘은 낭비성(娘臂城 지금의 청주)에서 고구려 대부대를 섬멸시켜 군사적 위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양가문의 친교와 협력을 더욱 돈독히 했다.

김서현과 김용춘의 결속은 결국 신귀족(구귀족은 진흥왕의 장남계)의 탄생을 뜻하는 것인데 특히 김서현, 김용춘의 결속이 그들의 아들 김유신과 김춘추로 이어지면서 신라는 바야흐로 김유신, 김춘추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두 집안의 혼사(김유신 장군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부인인 문명왕후임)에서 확인 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구귀족들이 선덕왕 16년 반란을 꾀했으니 이것이 비담과 염종의 모반사건이다. 이 반란은 오히려 김유신, 김춘추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구귀족의 거두 알천(閼川)등이 신귀족으로 흡수되어 과도체로서 진덕여왕을 추대하게 됐다. 진덕여왕 재위 8년은 실로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성립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무열왕이 옹립되자 김유신계는 비로소 그 기반이 확고해 졌으며 신라정치는 김유신, 김춘추가 당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진덕여왕이 재위 8년에 돌아갔으니 그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이에 김유신은 재상인 알천과 협의하여 김춘추를 즉위시키니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로보면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정도의 힘을 발휘했으며 무열왕이 왕녀 지소(智沼)를 김유신에 출가시킴으로써 김유신 가문은 가락계인 김해김씨로서 지위가 당당히 격상되었다. 이에 김유신은 무열왕 1년 상대등이 됨으로서 전귀족의 대표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김유신은 이제 정치, 군사권을 장악한 신라 최고사령관으로서 백제정벌을 단행했으며 또 661년(문무왕 원년)에는 고구려 정벌군의 대장군이 됐다. 김유신이 고령으로 활동할 수 없을 때 가락계 김해김씨 가문에서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이 가문을 대표하고 무열왕계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이 대표적인 인물로 활약을 했다. 이렇게 가락계인 김해김씨 가문은 무력(武力)장군의 군사적 활동에서 기반이 형성되었으며 무력의 아들 서현(舒玄)이 만명(萬明)과의 혼인을 함으로서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갖기 시작했다.


(3) 김유신가의 가풍과 가훈

김유신의 장남 삼광(三光)은 고구려 정벌에 무장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차남인 원술(元述)도 문무왕 17년 당나라 대군을 매초성 전투에서 격파했다. 손자 윤중(允中), 윤문(允文) 형제는 성덕왕 때의 무장으로 발해를 공략한 바 있으며 윤중의 아들은 기록이 없고 손자 장청과 서손, 김암이 기록에 보이는데 김암은 둔갑술의 천재로서 병법에 능했으나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온 이후의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김해김씨 가문은 이렇게 신라 사회에 가락계 신귀족으로 등장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한 명문 거족으로서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번성하였으며 실제로 김유신 가문의 행적과 가풍은 단순히 가계(家系)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신적 지표가 됐으니 김유신가의 가훈이 오늘날 전해진 우리나라 최초의 대표적 유훈으로 남아있다.
즉 김유신은 문무왕때 당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아들 원술에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저버렸으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라고 질책하고 있으니 일종의 가훈을 갖고 있었다 하겠다. 또 김유신은 평소에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이 무성한 수림(樹林)에 손실이 되지 않으며 한 티끌의 모임이 큰 산에 보탬이 될 수 없다.>라고 했으니 대의(大義)속에 나라를 희생속에 민족을 강조하였다.

이로보면 김유신가의 가훈은
첫째, 위국충절(爲國忠節)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이다.
실제로 김유신은 백제정벌에서 전투가 백중지세로 승부가 나지 않을 때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 노릇을 하자면 충(忠)만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자면 효(孝)만헌 것이 없다. 국가의 위기를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효를 함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반굴을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게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여 전쟁을 승리로 끌어 냈다. 물론 반굴은 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또 반굴의 아들 영윤(令胤) 또한 전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위국충절이다.
또 김유신은 전쟁터에서 귀환도중 재출정의 명을 받으면서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을 외면하고 바로 전쟁터로 향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멸사봉공인 것이다.

둘째, 김유신 가풍에서 강조된 가훈은 투철한 주체의식과 신의이다.
즉 백제 정벌을 눈앞에 두고 김유신과 소정방의 대결은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민족 생존과 자주성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 주체의식의 상징이다. 김유신은 항상 <전쟁의 승패는 수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여하에 달려 있는 법이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원술도 <구차하게 살지 않는>대장부로서의 자세를 지키려 했다.

셋째, 김유신가의 가풍은 인간관계와 행동규범으로서 <질서>를 중시하였다.
비담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유신은 <인도(人道)에는 왕이 높고 신하는 낮은 법이다. 이 원리를 바꾼다면 대란이 일어 날 것이다.>라고 하여 상하의 질서를 유지하는 길이 역사의 순리인 까닭에 이에 대한 부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와같은 김유신의 가풍은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고 국민전신 통합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가훈으로서 전승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김유신가의 가훈이 전란기에 신라 국민정신으로 승화되고 민족의식을 이끌어 준 대표적 귀감이 되었다는데 그것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4. 가락국의 왕실세계

(1)가락국의 세계

◇ 1세 김수로왕
시조대왕 휘 수로(首露). 서기 42년 김해에 가락국을 세우고 500년 왕업의 기초를 닦았다.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하여 왕자 10형제와 공주 자매를 두었다.
신라와의 여러번에 걸친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고 선정을 베풀었다. 199년 23일 붕어하여 대궐 동북쪽 평지에 능침을 모시니 현재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납릉이 곧 그것이다.

◇ 2세 도왕(道王)
시조대왕의 맏아들 휘(諱)는 거등(居登)이다. 서기 199년에 즉위하여 253년에 붕어하시니 재위 54년이다. 능침은 김해 장유면 유하리 야산 기슭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미상이다. 재위기간동안 신라와 화친하여 왕 즉위 10년 포상팔국이 침략해 왔을 때 신라에 청병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 3세 성왕(成王)
도왕의 아들이며 휘(諱)는 마품(麻品)이다. 서기 253년에 즉위하여 291년에 붕어하니 재위 38년이다.

◇ 4세 덕왕(德王)
성왕의 아들이며 휘는 거질미(居叱彌). 291년에 즉위하여 346년에 붕어하니 재위 55년이다.

◇ 5세 명왕(明王)
덕왕의 아들. 휘는 이시품(伊尸品). 346년에 즉위하여 407년에 붕어하니 재위 61년이다.

◇ 6세 신왕(神王)
명왕의 아들. 휘는 좌지(坐知). 407년에 즉위하여 421년에 붕어하니 재위 14년이다. 용녀(傭女)를 총애하여 한때 국정을 어지럽혔으나 박원도(朴元道)등의 충간으로 용녀를 귀양보내고 정사를 바로 잡았다. 능침은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사능산에 있다고 전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 7세 혜왕(惠王)
421년 즉위하여 451년에 붕어하니 재위 30년 휘는 취희(吹希). 신왕의 아들이다.

◇ 8세 자왕(莊王)
451년에 즉위하여 492년에 붕어하니 재위 41년이다. 혜왕의 아들이며 휘는 질지( 知). 장왕은 영명한 군주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시조대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짓고 불교를 일으키고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고구려, 말갈이 신라를 쳐들어 왔을 때 신라의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격퇴했다.

◇ 9세 숙왕(肅王)
492년에 즉위하여 521년에 붕어하니 재위 29년이다. 휘는 감지(감知)이며 장왕의 아들이다.

◇ 10세 양왕(讓王)
휘는 구형(仇衡).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니 재위 12년이요 가락국의 역년은 491년 이었다. 양왕은 신라 법흥왕의 침공을 받게 되자 친히 낙동강 연안에 출전하여 전쟁을 지휘했으나 피아간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것을 보고 군왕은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을 전화에서 구출하고 생명을 보전케 하는 것이 군왕의 도리인즉 양민지도(養民之道)를 펼치어 스스로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였다.

이에 신라는 양왕을 상등으로 예우하고 가락국 전토를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나 양왕은 나라를 선양한 후 산청 왕산 태왕궁에 은거하다 붕어하니 능침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방장산 기슭에 모셨는데 국내 유일의 석릉으로 사적 214호로 지정되었다.


(2)양왕 이후의 세계

시조 김수로왕 이후 17세까지 세계가 이어졌으나 그후는 상고할 길이 없다. 이는 신라가 가락계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후 가락계(김해김씨)의 세력확장을 싫어하여 김유신가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가락계 김유신가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김춘추)계는 33대 성덕왕 때 이르러 극성을 이루면서 윤중(김유신의 손자)을 대표로 하는 김유신계를 중앙 정부에서 제거시켰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왕을 섬기어 대아찬이 되었는데 왕의 친족들의 질투가 심했다.

8월 대보름 왕이 월성 산마루에서 주연을 베풀고 윤중을 부르니 이루 만류하는 자가 있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왕은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 무사한 것은 윤중의 조부(김유신)의 덕이다>라고 했는데 많은 군신들이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제왕권을 확립한 성덕왕때부터 결국 유신계는 무열왕계의 심한 견제와 반대속에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된다. 혜공왕대에 이에 대한 또 하나의 주목되는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혜공왕 15년 유신의 혼이 자기의 자손이 경술년에 처형된 것을 노여워하여 무열왕계의 조상인 미추왕릉에 가서 불평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혜공왕이 두려워서 김경신을 김유신릉에 보내어 사과하는 제사를 올리게 하는데 김경신은 반혜공파의 거두였다.

김경신은 혜공왕 6년(경술년)에 일어난 김융의 난으로 처형된 융을 비롯한 그들 연루자들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유신계의 세력만회 운동이었다. 김유신의 장손 윤중의 아들이 36대 혜공왕때 일어난 김융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됐거나 혹은 김융 자신이 윤중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신라는 혜공왕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권 쟁탈과 극심한 혼란에 빠졌는데 이런 와중에서 42대 흥덕왕은 김유신계를 선무포섭하기 위해 사후 162년만에 김유신을 흥무왕으로 추봉하는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신계를 견제하는 정책은 변함 없어서 김유신계는 장청 이후 거의 쇠퇴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신라가 망하고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차츰 가락계 김씨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여 고려 중엽 이후 비로소 그 후손들은 현달한 인물을 중심으로 본관은 그대로 두고 입중조(立中祖)를 삼아 파를 형성했다. 김해김씨가 단일 본관으로 가장 번성하나 파가 유달리 많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중조들은 대개 고려 충신으로 조선조에 벼슬길을 사양한 관계로 조선조에도 김해김씨가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락후예들은 김유신가에서부터 가문을 형성하고 가훈(가풍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을 전승시켜 국가와 왕조의 큰 변란기에는 항상 충신의 반렬에 섰었다. 고려말엽에 많은 충신들이 가락후예이거나 김해김씨 각파의 입중조들이란 사실(史實)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조선조에도 지조와 충과 신념으로 생애를 마친 탁영 김일손, 양의공 김응서, 학성군 김완, 안경공파의 김대건, 김홍도 등이 다 가락후예들임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3)허씨 가문의 성장

허씨의 창성 유래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와 결혼하여 10형제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이자(二子)에게 허씨를 사성(賜姓)했다. 이는 자기성이 이어지기를 원하는 왕후의 간청 때문이다. 그런데 가락국이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병합되자 가락 왕실의 후예들과 그 유민들은 신라의 사민정책에 의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갔다. 허씨 왕족중에 김해에 계속 머물러 살게 된 후손을 김해허씨, 하양(河陽)에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허씨, 양천(陽川 : 공암(孔巖))에 터를 잡은 자손을 양천허씨, 태인(泰仁)에 이주한 후예들은 태인허씨, 함창(咸昌)에 세거한 이들은 함창허씨 등 5개의 본으로 분류하지만 모두 가락계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김해허씨의 중시조는 허담으로 고려 문종때 출생하여 벼슬이 삼중대광에 오르고 가락군에 봉해졌다. 김해허씨 세보에는 수로왕비인 보주태후 허씨의 35세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본관을 김해로 정한 것은 그때 시조 허담이 김해에 세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천허씨 중시조는 허선문(許宣文)인데 그는 공암촌주((孔巖村主)였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甄萱)과 싸울 때 군량미를 보급하여 큰 공을 세우고 태조 왕건으로부터 공암촌주로 봉해지고 공암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공암으로 하였으나 공암이 양천의 옛 이름이므로 지금은 양천허씨라 한다. 양천허씨 신해보는 허선문을 김수로왕의 30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인허씨 시조는 허사문(許士文)이라고 한다. 고려조에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시산은 태인의 예 이름으로 허사문이 시산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관향을 태인으로 삼았다. 태인은 전북 정읍에 있는 지명으로 태산(泰山) 인의(仁義) 두 현을 합한 이름이다. 중시조 허사문은 양천허씨의 중시조 허선문과 형제라고 하나 문헌이 없어 고증할 길이 없다.

하양허씨 중시조는 허강안(許康安)으로 고려때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어 이곳에 터를 잡음으로서 관향을 하주라 했다. 하주는 경북 경산군에 있는 지명인데 후에 하양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하양허씨로 됐다. 하양허시 정사보에는 중조 허강안은 보주태후의 33세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함창허씨는 중시조 허종항(許從恒)으로 조선초에 목사를 지냈다. 함차은 경북 상주군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고령 가야국인데 허종항의 후손들이 세거하며 함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허씨에서 인천이씨가 갈라졌음은 이미 언급되었다. 허씨 중에는 김해허씨가 전체 허씨의 50%로 가장 많고 다음이 양천, 하양, 태인, 함창의 순이다.

허씨 문중은 많지 않은 인구이지만 조선조에 정승 6명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에 걸쳐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의 지위를 누렸다. 저 유명한 허난설헌, 허균 등은 양천허씨 문중이 낳은 천재들이며 허목, 허적 등은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대정치가 이다.
한국의 히포크라테스로 지칭되는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은 우리 의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으며, 재능 있는 허씨 전통의 한 갈래는 한국 예술사의 자랑스런 한줄기를 이루어 소치(小痴) 허유(許維), 미산(米山) 허형(許灐), 남농(南農) 허건(許楗) 등 3대로 이어지는 화백은 같은 문중인 의제(毅劑) 허백련(許百鍊)과 함께 한국 남화의 거목으로 허씨문중을 빛내고 있다.

 


 가락사에 대한 재발견과 학설

1. 허왕후와 차

이능화(李能和)가 쓴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의하면 김해의 백월산(白月山)에 죽로다(竹露茶)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시(許氏)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가 심겨져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 한다. 지금도 김해 진례면(進禮面)에 찻골이 있고 김해 상동면(上東面)에 차시골(茶蒔谷), 차곡(茶谷)이 있다. 차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다전동(多田洞)이라 했던 지금의 동상동 그리고창원군 동면 봉곡리(鳳谷里) 백월산(白月山)은 죽로차의 산지였다. 창원군 동면(東面)의 다호리(茶呼里), 귀산면 다등(茶登)도 차와 연관이 있는 지명이다.

출처-가락의 역사와 왕손 제1권 173p

 

2. 가락국에 시계?

가락국초기에 시계가 있었다.
김일련(金一然)이 지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徐徐 入闕 銅壺欲午"라는 글은 혼수를 실은 수례들이 서서히 입궐할 때 구리항아리가 정오를 가리키려 하더라"는 뜻이니 구리항아리는 곧 물시계 아니면 해시계이었음을 뜻한다. 서기 48년에 가락국에는 시계가 있었던 것이다.

출처 : 가락의 역사와 왕손 1권p180

 

3. 최초의 불교전래는 가락국에

가락국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가락국 수로왕7년(서기48년) 7월 아요디아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석탑을 싣고 가락국해변에 와서 닿았다. 이 석탑은 진풍탑(鎭風塔)이요 일종의 불탑(佛塔)이었다. 이때 따라온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은 수로왕의 칠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수도시킨후 의령 수도산, 사천의 와룡산(臥龍山)등을 거쳐 다시 지리산에 올라가 운상원(雲上院)을 짖고 2년간7왕자를 좌선(坐禪)시켰으며 수로왕 62년 8월 15일 7왕자는 성도(成道)하였다. 그리하여 칠왕자는 칠불암(七佛菴)을 창건하니 경남 하동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7왕자의 성도 소식을 듣고 수로왕과 허태후가 행차하셨으니 부왕(父王)께서 머문 곳에 범왕사(梵王寺), 모후께서 머문곳에 천비사(天妃寺)를 세웠는데 범왕사는 지금 범왕리에 있었고 천비사는 지금의 운수리내의 대비(大妃)부락에 있었다. 김해남쪽 40리 되는 곳에 장유산(長遊山)이 있는데 장유화상이 노닐었음을 기념하여 부친 이름이며 김해에는 장유면 장유리라는 지명도 있다. 또한 김해 대청리에 장유암(長遊庵)이 있는데 장유화상이 창건한 암자라하며 그의 사리탑이 현재 남아 있다. 모은암(母恩庵-김해북족 30리 무척산에 있음), 부암(父庵-밀양군 접경 재악산에 있음)도 수로왕과 거등왕 사이의 시대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파사석탑(婆娑石塔)도 본래는 김해 호계사(虎溪寺)에 두었던 것을 허태후능 경내로 옮겨 놓은 것은 것이라는데 이 탑도 일종의 불탑으로 허태후가 가락국에 오실 때 불교가 들어 왔음을 증명해 준다. 금관지(金官誌)에 의하면 수로왕께서 김해 남족 40리 명월산(明月山)에 흥국사(興國寺=明月寺),진국사(鎭國寺),신국사(新國寺)를 세워 원당(願堂)으로 삼았다고 한다. 내무부발행 토향지(土鄕誌)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금관가락국 시조왕께서는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사대웅전(万魚寺 大雄殿)을 건립하셨다 한다. 또 명월사와 모은암을 세우셨으며 허황후께서는 해은사(海恩寺)를 세웠다 한다. 해은사는 허황후가 바다의 은혜로 가락국에 오신 것을 생각하시며 세운 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해에 있는 초선대(招仙臺)에 거등왕이 새겨놓았다는 왕자 선(仙)의 초상화 이마에 백호(白毫)가 새겨져 있고 연꽃받침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어 불교가 거등왕 이전에 가락국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5년)에 불교가 최초로 들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327년 앞서서 불교가 가락국에 전래된 것이다.

출처 : 가락의 역사와 왕손 제1권 p170~p173

 

4. 국사에서 제외된 가락역사

국사(國史)에서 제외된 가락국사
가야연합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사국(四國)을 형성하였으나 신라 경주김씨인 김부식은 신라의 정통성을 살리기 위해 가야사를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않았다. 즉 김수로왕은 삼한(三韓)의 총왕(總王)이요 제왕(帝王)이었다. 신라도 초기에 김수로왕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기 위해 가야사를 다루지 않았다. 또한 모화사대사상가인 그는 중국의 삼국을 모방하여 사국을 삼국으로 다루었다.

특히 신라의 정통성을 뚜렷이 하기 위해 가야사를 소외시켰다고 볼 수 있다. 가락국왕족이 신라에서 진골(眞骨)대우를 받은 것이라든가 최근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 가야유물들은 가락국의 국위(國威)를 증명해주고 있다.

출처 : 가락의 역사와 왕손 제1권 P180

 

5. 칠왕자의 일본건국설?

경남 하동 칠불암 전설은 가락국 태조대왕의 일곱 아드님이 성불(成佛)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거니와 성불하신 7왕자는 그 뒤에 일본땅으로 건너가서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문정창박사는 주장하였다. 문정창박사는 가락국 시조대왕의 7왕자가 일본 건설에 참여하여 귀환하지 못했으므로 그 고혼을 위안하기 위하여 모국의 허황후께서 칠불사를 건립하였다고 주장한다. 칠왕자의 일본거눅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구주(九州)의 고옥산(高屋山) 중턱 200미터 지점에 가락국 시조대왕의 왕자능으로 아려진 상능(上陵)이 있고 이외에 6개의 왕릉이 있다. 고천수봉(高千穗峰)은 천손강림성지(天孫降臨聖地)라고 한다. 천손강림 입구에는 신대(神代)의 성적(聖蹟)인 고천수긍지(高千穗宮址)가 있다. 일설에 따르면 고천수봉은 7왕자가 강림한 곳이라는 것이다.

 

6. 김수로왕은 황제(皇帝)

삼국유사에 김수로왕 천강(天降)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이 천신족(天神族) 천손족(天孫族)의 제왕으로서 천자(天子)요 신인(神人)이요 위대한 황제임을 나타내는 설화이다. 또 가락국이 중국천자의 속국이 아님을 나타내는 설화이다. 단군, 해부루, 박혁거세, 김알지 등의 설화도 이같은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다.  김수로왕은 신라의 초청을 받아서 신라 주변 부족국가들의 분쟁을 잘 해결해 주었으며 그를 접대하는 향연에 한지부에서는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냈으므로 한지부 대인(大人)을 살해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김수로왕이 진왕(辰王)이요 가락국이 신라를 지배하는 막강한 강대국임을 뜻한다.

동국총목(東國總目)의 별고(別考)에는 『변진(弁辰=卞辰) 12국이 모두 금관국에 예속되었다. 금관국은 변진의 총주(總主)이다』라고 하였고, 양서(梁書)에 『신라와 백제가 가라(加羅)에 부용(附庸)한다』고 하였다. 수서(隨書)에 신라가 처음에 백제에 붙어 있더니 고구려가 백제를 습격하므로 신라는 가락국에 붙고 말았다고 하였다. 중국의 북사(北史)에 "신라는 본래 백제에 붙어 있다가 가라국에 붙어 살면서 30대를 내려와 진평왕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가락가 위주(爲主)하고 신라가 부용(附庸)한다고 하였다. 개황록(開皇錄)이 있고 역대의 왕의 훙(薨)을 붕(崩)이라 한 것은 금관가락국이 황제의 나라임을 의미한다.

 

7. 김수로왕은 진왕(辰王)

"김수로왕은 황제(皇帝)"에서 살펴본 것으로도 김수로왕이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을 총지배하던 진왕(辰王)임을 알 수 있으며 마한은 진왕을 추대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진조선 멸망후 진조선의 단군은 진왕이 되었으며 최초의 진왕은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으로 목지국은 마한에 있었으며 부족국가의 최고 맹주였다. 김해김씨 갑자왕세가석장보, 허전(許傳)이 지은 숭선전신도비문(崇善殿神道碑文), 김해김씨 선원 대동보(갑오년 가락기원 1913년 刊) 등에 다음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동한(東漢) 환제(桓帝) 연희(延喜) 5년(서기 162)에 김수로왕이 태자(太子) 거등(居登)에게 섭정하게 하고(또는 전위하고) 태왕궁(太王宮)을 건립하니 마한 54개국이 모두 내하(來賀)하고 수로왕을 태왕원군(太王元君)으로 받들었으며 호(號)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이라하고 허왕후(許王后)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라 하였다.』 허씨 대종보(許氏 大宗譜, 1977)에는 개국(開國) 1백21년(서기 162) 임인년에 마한 54국의 국왕이 모두 조정에 와서 하례(賀禮)드리고 왕을 존칭하여 황태왕(皇太王)이라 하고 후(后)를 황태후(皇太后)라 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때 멸망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탈해왕5년(61)조(條)에는 마한의 장군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岩城)을 들어 항복했다는 내용이 보이고 또 중국측 기록에는 3세기 후반까지 마한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계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한 54국중에 백제국(百濟國)이 있었으며 백제국이 천안에서 처음 십제국(十濟國)으로 건립되었으나 마한에게 쫓겨 지금의 서울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마한 54개국은 비록 영토는 백제에게 많이 점령되었으나 여전히 마한은 그 명맥을 이때까지 잇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제후국으로서 54개국이 존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수로왕께서는 지품천(知品川 - 지금의 산청)의 방장산(方丈山)에 태왕궁(太王宮 - 水晶宮)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移居)하니 산을 태왕산(太王山)이라 하였다. 이 사실은 김수로왕의 황제적(皇帝的)인 권위(權威)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 진서사이전(晉書四夷傳) 마한(馬韓)조(條)에 마한왕이 진무제(晉武帝) 원년(元年 - 280년), 2년(281년), 태희원년(290년), 함령 3년(277년)에 사신을 보내와서 공물을 바쳤다고 되어 있다. 마한왕은 서기8년(온조왕26)에 백제에 항복하였고 서기18년 마한의 예장군 주근(周勤)이 모반하였으나 패사(敗死)하였다. 그 뒤 마한 54개국은 독립성을 잃었고 김수로왕이 상징적인 진왕(辰王)으로서 마한 54개국을 대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8. 김수로왕은 6가야의 총왕(總王)

또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에 변한(卞韓)의 구간(九干)이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했다고 했으니 변한의 여러나라가 김수로왕을 총왕으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해김씨왕산세가석장보(甲子譜)에 국호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김수로왕의 가락국을 다른 가야와 특별히 구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세보(世譜)에 도금관성(都金官城) 봉왕제오인(封王弟五人) 위오가야왕(爲五伽倻王) 이변진12국(以弁辰十二國) 위번국(爲蕃國)이라 하였다. 즉 다섯 아우를 왕으로 봉했으니 김수로왕은 황제(皇帝)요  다섯 왕제(王弟)는 제후군주(諸侯君主_임을 알 수 있다. 또 나머지 변진국의 부족국가들은 가야국들의 번국(蕃國)들이 된 것이다.

 

9. 구간회의(九干會議)

변한의 구간회의는 부족국가 군주들의 회의였으며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건립한 뒤에도 구간회의는 계속되었다. 변한에는 12개국의 부족국가가 있었으나 12국중에서 선출되는 9명의 간(干)은 막강한 힘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12국이 6가야로 통합된 뒤에도 6가야에는 각기 소부족 국가가 있었고 구간은 총왕국인 가락국의 대신으로서 6가야의 정치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간(干)은 한(汗, 韓, 칸, 加)과 같은 뜻이다.

신라의 마립간(麻立干), 거서간(居西干), 소뿔한(舒發翰, 牛角干, 大角干)과 같은 뜻이며 군장(軍長), 제사장, 군왕(君王), 제왕(帝王), 위대한 사람의 뜻이다. 변한은 옛날 북경, 요서, 요동지역에 있었던 번조선(番朝鮮. 發朝鮮)의 유민들이 한(漢)민족에게 밀려 막조선(莫朝鮮=末朝鮮=馬朝鮮=馬韓)이 있는 한반도로 피난와서 경남에 정착하여 12개국의 부족국가를 형성한 부족국가연합인데 이들은 번조선(番朝鮮)때의 구부족(九部族=九夷)의 장(長)을 간(干)이라 하다가 한반도로 와서 그 유습을 답습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변한(弁韓=卞韓)의 구간은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신귀간(神鬼干), 오천간(五天干)인데 수대왕이 구간은 백료(百僚)의 장(長)이므로 명칭이 속(俗)되다면서 아도(我刀)를 아궁(我窮)으로, 여도(汝刀)를 여해(汝該),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 유수(留水)를 유공(留功), 유천(留天)을 유덕(留德), 신천(神天)을 신도(神道), 신귀(神鬼)를 신귀(神貴), 오천(五天)을 오능(五能)으로 고치셨다.

 

10. 허왕후의 출생지는?

허목(許穆)의 허태후비음기(許太后碑陰記)에 "허태후가 남천축국군(南天竺國君)의 딸, 또는 서역(西域) 허국군(許國君)의 딸, 혹은 허황국군(許黃國君)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고 하였다. 또 김일연(金一然)은 그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허황후가 아유타국 공주라 하였다. 인도의 아유타국(아요디아國)은 서기 20년에 멸망되어서 아유타왕족은 태국으로 이주하여 후세에 아유디아 왕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서기 48년 허태후가 동래(東來)하실 때 16세였으므로 허태후는 서기 32년에 출생하였다. 그러므로 허황후의 출생지는 인도가 아니며 허황후의 출생지는 태국이 아니면 중국 보주(普州)라고 볼 수 있다. 허황후의 호는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이고 김수로왕의 호는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이다. 그렇다면 두분이 보주(普州)라는 지명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관해 김병모(金秉模) 한양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안악(安岳)은 주나라 때부터 송나라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보주(普州)로 호칭되었다. 보주는 지금의 가능도(嘉陵道) 파중현(巴中縣)에 있으며 장강(長江) 상류 사천(四川)의 한 지류인 가능강(嘉陵江) 유역이다. 사천지방은 서기 1세기 때는 촉(蜀)이라는 지방이었다. 촉지역은 동이족의 한 갈래인 서이(徐夷)가 서국(徐國)이 망한후 몰려들어 살아온 곳이다. 신국(新國)이 망하고 후한(後漢)이 건국했을 때 한(漢)에 반대하는 반란이 촉지역에서 두 번 있었다. 서기 47년 파군(巴郡)의 남쪽에 살던 뇌천(雷天)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조정에서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上)을 보내어 평정하고 반란을 일으킨 만족(蠻族) 7천여명을 호북성 양자강 중류인 무한(武漢)지방에 있는 강하(江夏)에로 이주시켰다. 허황후는 그 다음해인 서기 48년에 김해에 동래하였다. 촉지역, 즉 사천성에서는 서기 1세기때 쌍어(雙魚)를 모시는 신앙집단이 살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서기 101년에 보주에서 허성(許聖)이라는 사람이 불균등한 세금에 불만을 품고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형주(荊州)의 여러 군에서 온 병력 1만여명과 대결하다가 그 다음해 여름에 항복하고 그 종족이 다시 강하(江夏)로 강제 이주되었다. 허황후의 조상은 아요디아 왕족이다.(※인도 아요디아왕국의 왕족이던 아요디아 왕족은 태국에 이주하였고 다시 한 왕자가 이끄는 일부 아요디아 왕족이 배로 양자강을 따라 올라가 거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촉지역은 예부터 우리 겨레의 한 갈래인 서이가 이주해서 살고 있었던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김해부근 다호리(茶戶里)에서 발굴된 가야고분에서 한나라 시대의 구리거울과 함께 중국 사천(四川)의 대표적 산물인 칠기(漆器)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가락국과 촉(蜀)과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거니와 허성(許聖)은 허황후와의 관계를 이어줄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성(聖)은 이름이지만 허(許)는 무사(巫師), 즉 신앙지도자를 뜻한다. 아요디아 왕족은 사천지방에다 인도의 아요디아에서처럼 신전을 짓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는 무력으로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요디아 왕족과 사제들을 강제 이주시키니 추방당한 이들은 무창(武昌)지방에서 다시 신전을 짓고 살았다. 아요디아 왕족은 중동지역에서 인도로 왔다는 설도 있고 태국으로, 태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왕족으로서 향해에 능했고 조선술(造船術)이 뛰어 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11. 가야는 철기문화의 선진국

김정학(金廷鶴)박사등 많은 사학자들은 가야가 우리나라 철기문화(鐵器文化)의 중심국이었다고 주장한다. 가야에서 철이 생산되므로 김수로왕시대에는 가락이 한반도 내에서의 최선진국이요 최강국이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 가야에서 철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중국과 일본에 무역되었으며 낙랑, 대방에도 공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화폐인 철정과 철제투구, 갑옷, 마구(馬具)등이 옛 가야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는 것은 가야의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해 준다. 또한 가라구니(가락국)는 일본어로 외국을 뜻하고 가나모노는 철물(鐵物)을 뜻하는데, 일본이 맨 먼저 가라(가락국)와 대외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외국을 가라구니라 하였고, 가라에서 철이 생산되므로 철물을 가나모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2. 구주(九州)는 가야의 식민지라는 설(說)

재일본(在日本) 사학자 김달수는 구주에 가야산(可也山)이 있고 북구주 후꾸오까시 고분 등에서 김해식 유물, 구리거울, 곡옥, 칼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지적하고 구주, 특히 북구주는 가야제국의 이모저모를 송두리째 옮겨 놓은 듯 하다고 말한다.
박영만은 그의 저서 <동방의 태양 한민족>에서 구주는 한민족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한다. 일본인들이 맨먼저 가야와 대외관계를 가졌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을 가라구니(加羅國)이라 부를 정도이니 가야가 일본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고 박영만은 강조한다.

 


 일본 건국의 뿌리는 가야

1. 칠왕자의 궁지(宮趾) 일본 발상의 땅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현의 서쪽 자락인 사쯔마 반도 남쪽에 가세다시가 있다. 이곳은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니니기노미코토)가 일본에 도래하여 다카치 호미네에 강림한 후 이곳에 와 궁궐을 지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전설과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이곳을 <일본 발상의 땅>이라 하여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역사 유적지다. 가세다시에서 바닷가 쪽인 서쪽으로 약 6키로미터쯤 가다보면 길가에 <일본 발상의 땅>이라고 쓴 높이 약 1미터정도의 돌에 그 유래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산 언저리에는 궁궐터인 가사사 궁지가 있으며 가사사에는 칠왕자를 제신으로 모시는 가사사 신사도 있다. 7왕자의 화신인 니니기노미코트가 가사사 해안에 닿은 후 이곳에 와 궁궐을 짓고 고대 일본의 신대를 열었다고 하여 일본 발상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2. 7왕자의 산성과 칠사신사

가고시마현 고쿠부 지방에는 7자가 들어가는 유적과 지명이 밀집되어 있어 그야말로 가야유적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사학자들은 이것이 7왕자의 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하고 고쿠부 평야를 끼고 흐르는 아모리가와(天降川)와 겐코가와(檢校川) 주변 산릉에 시치구마(七熊)라는 일곱 개의 토성(土城)이 7왕자의 산성(山城)이라는 것이다. 시치구마노사토(七熊里)는 7왕자가 이곳에 도래하여 원주민 세력을 장악한 후 외침을 막기 위해 쌓은 토성이 있는 마을이며 산성은 오래전에 허물어져 버렸고 지금은 축대만 남아 있다. 원래는 시치구마(七熊)였지만 熊(곰웅)자와 굽이 외字가 다같이 구마(くま)로 발음되어 시치구마로 표기함으로서 이깉은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바꾸어 버린 것이다. 시치구마노사토는 고쿠부평야(國分平野) 북쪽 외곽에 부채꼴로 펼쳐져 배치되어 있다.일곱개의 성은 예구마(笑熊), 시시구마(獅子熊), 도미구마(富熊), 호시구마(星熊), 고이구마(變熊), 구마자키(熊岐), 히라구마(平熊)이며 그 중심지의 조그마한 봉우리 정상에는 총사령부 격인 구마소성(熊襲城)이 있었지만 지금은 축대가 허물어져 버렸고 무성한 나무와 수풀이 가려 길조차 없어져 버렸다.

현재 구마소성 뒷산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고쿠부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그 공원이 성(城)이 있었던 산의 공원이라는 뜻의 성산공원(城山公園)이다. 7왕자는 이 곳에 산성을 구축한 이후부터 급속도로 세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남규슈9南九州) 사쯔마반도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가사시에 정작하여 궁궐을 짓고 세력을 펴 나갔던 것이다. 아라타 에이세이씨도 <시치구마사토의 토성은 가야에서 김수로왕 7왕자가 고쿠부지방에 도래한 후 산성을 축조했는데 원주민들은 바다 건너 가야르 알 까닭이 없어 새문물을 가져오는 신비의 나라인 하늘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왔다고 여겼을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주장했다. 또 가고시마 북쪽 아이라군 일대에는 나나야시로(七社)라는 7왕자의 칠사신사(七社神社)가 산재해 있는데 이곳이 7왕자의 거주지였는지 아니면 그들의 묘소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7왕자는 김수로왕의 7왕자 이외에는 지칭할 만한 대상이 없으므로 이는 7왕자와 깊은 인연으로 칠사신사를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3. 한국우두봉신사

구마소성(熊襲城)이 있었던 산자락의 북쪽에 있는 우두봉자락에 가야신을 제신으로 모시는 한국우두봉신사(韓國宇豆峯神社), 즉 가라쿠니우도우미네신사가 있다. 우두봉(宇豆峯)이라는 산은 경북 고령에 있는 가야산의 옛 이름인 소머리봉의 우두봉(牛豆峯)에서 따온 한국우두봉신사(韓國牛豆峯神社)였지만 명치유신 때 가라쿠니우두우미네신사(韓國宇豆峯神社)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경내에 들어가면 제신이 50맹명(五十猛命)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50명의 사나운 신(사람)이라는 뜻이다. 7왕자의 일족(一族)이 50명이었다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일그러진 안내판에도 자세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4. 칠왕자의 삼대산릉

(1) 에노산릉(可愛山陵)
7왕자의 화신(化身)인 니니기노미코토의 에노산릉은 가고시마 서북쪽에 위치한 센다이시(川內市) 평양지대에 우뚝 솟은 카미카메이야(紳龜山) 산정에 니니기노미코토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니이다신사(新田神社)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센다이천(川內川)이 옆으로 흐르는 평야 한 가운데 카미카메이야(紳龜山)가 홀로 우뚝 서 있는데 그 크기나 모양이 흡사 김해 구지봉(龜旨峯)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거북의 모양을 꼭 닮았다. 특이한 것은 멀리서 바라보면 조그만 야산에 불과하지만 막상 오라가면 은근히 큰 규모에 놀라게 된다. 370개 계단을 오르고 나면 수백년 묵은 이팝나무 신목(神木)이 서 있고 아름드리 삼나무 숲에 쌓인 장엄한 에노산릉이 나타나는데 궁내청(宮內廳)의 엄중한 보호하에 신성불가침지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 에노산릉의 에노(可愛)는 형(兄)을 뜻하므로 니니기노미코토가 7왕자의 맏형이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2)다카야산상릉(高屋山上陵)
니니기노미코트의 아들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의 다카야산상릉은 가고시마현 아이라군 미조베정 다카야산 줄기에 자리잡고 있다. 웅장한 산자락의 풍광은 가히 천하제일이라고 할 만큼 장중하고 신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에노산릉과 마찬가지로 울창한 숲에 가려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몇해 전 이 산릉을 발굴 조사하던 일본 사학계는 출토된 유물을 보고 놀라 갑자기 발굴을 중단해 버렸는데 그때 당국의 공식발표는 <천황의 존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야의 유물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아이라산상릉(吾平山上陵)
또 니니기노미코토의 손자인 우가야후키아 에즈노미코토의 아이라산상릉은 가고시마현 동북자락인 오스미(大隅)반도의 중남부 아이라정(吾平町) 우도야마 계곡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산 이름이 우도야마인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의 가야산이 옛날에는 우두봉(牛豆峯)이라고 불렀으므로 여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추측되며, 또 이름에 우가야가 있는 것은 6가야 연맹의 상가야(上伽倻)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대가락국(大駕洛國)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 아남그룹 김향숙 회장이 지은 "일본은 한국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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