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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효(節孝)선생행장(극일)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2. 2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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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절효(節孝)선생행장(극일)

절효(節孝)선생행장

선생의 휘(諱)는 극일(克一)이요. 자(字)는 용협(用協)이며 호는 모암( 慕庵)이며 아버지(考)는 의흥현감서(義興縣監 )이시다. 비( )는 숙부인 밀양 박씨다.
고의흥공(考義興公)의 야몽에 주자께서 소학(小學)의 일부를 가져다 주시며 장차 이 글을 실행할 효자를 둘것이라 하더니 연 그날부터 잉태한지 14개월만에 탄생하시니 고려 우왕 8년 임술 2월 8일 (서기 1382년)이다. 관(官-벼슬)은 통덕랑(通德郞)과 증중훈대부사헌부지 평(贈中訓大夫司憲府持平)이시며 이조 세조 2년 병자 10월 2일(서기 1456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은 75세다.
사후에 문인들이 사시 (私諡)하여 절효(節孝)선생이라 칭하였다.
공은 총명이 범인을 뛰어넘어 5세에 숙사(塾師)에게 학문을 배울 때 배우면 문득 외우시며 통달하니 문예가 일취하였으며 마침내 길야은(吉冶隱)선생에게 수학하여 학문이 풍부하 심으로 선비들이 문하에 배우기를 청하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의흥공이 출입하시면 반드시 지팡이와 신을 받들어 따르고 일보(一步)의 사이라도 떠나지 아니하시더라.
의흥공이 만년에 두첩을 두니 어머니께서 혹시불협(或時不協)하여 때에 잡수시지 않으시면 공도 또한 들지 않으시며 그 잡수심을 기다려 들으시고 두 서모에게 항상 은혜로서 행동 하여 지성이 언제나 한결같으니 가정에 이간질하는 말들이 없더라.
어머니께서 등창을 앓으시니 손으로 누르시면 아프실까 하여 항상 입으로 그 농혈을 빨아 내시니 어머니께서 그 통증을 잊으시고 바로 나으셨다.(이상은 공의 10세전의 일임)
의흥공이 설사와 이질로 앓으시거늘 공이 걱정하여 술을 즐겨한 소치인 증상을 알고자 혈분(血糞)을 그릇에 담아 하루 밤을 지난후에 맛보시고 크게 위태롭게 생각하여 백방으로 약 을 구하여 완치케 하셨느니라.
모부인(母夫人)의 상에 슬픔이 넘쳐 조금의 물도 드시지 않고 장례 한 후에 여막(廬幕)을 무덤가에 짖고 조석으로 제사를 지내고 곡을 올리니 본가의 거리가 20여리라.
극한혹서와 우중을 가리지 아니하고 날마다 대인공(공의 어버지)의 처소에 문안하고 돌아오시더라.
의흥공이 돌아가신 후에 그 애통해 하심이 모친상보다 더하여 여막에서 묘소를 모시고 곡을 할 때 산군(호랑이)이 항상 곁에 쭈그리고 앉아 마치 호위함과 같이 하니 공이 제물 남은 것으로 먹이기를 가축같이 기르셨다.
(전설에 의하면 시묘를 마치고 범과 작별할 때 그 범이 공의 옷자락을 물고 당기거늘 한 곳에 이르니 발로 헤치며 가르치는 것 같아 공이 짐작하시고 묘소를 그곳에 정하였는데 지금 나복산(蘿 山)에 호점혈(虎占穴)이 명묘라 칭한다.)
삼년상을 마치고 집에 계실 제 사당 받들기를 더욱 정성껏 하여 조석으로 아뢰고 무릇 맛있는 음식이나 철 따라 나는 새로운 것을 얻으시면 사당에 천신을 드리기 전에는 감히 맛보지 않으시며 손님을 맞이하고 응대함에 아무리 갑작스럽고 바쁘더라도 부모가 평일에 앉았던 자리에 감히 앉지 아니하셨다.
두 서모를 섬기되 아버지 계실 때 보다 정성을 더하여 편안케 하며 음식 의복과 생활에필요한 것을 언제나 한결같이 나누어 드렸으며 사후에 장송을 예로서 후하게 하고 심상기년(상복을 입지 않고 근신하며 기간을 채움)하셨다. 공의 빙장 한성판윤 이공(李公)이 조정에 있을 시에 출사(벼슬을 맡음)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이 노친이 계심으로 하루라도 떠날 수 없다 하시고 벼슬에 유의치 않으사 날로 집안을 정결하게 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소학의 글을 읽어 실행하시며 지역의 중인(中人)으로 친목 계를 만들어 애경범사(哀慶凡事)에 상조상휼(相助相恤)케 하며 무릇 향리와 인근 마을의 장로와 친구의 조상에 술과 고기를 잡수시지 않으시며 비록 비복이나 미천한 사람에게도 다 그러하셨다.
공의 특이한 효행을 삼강록(三綱錄)에 편재하고 그 사실들을 조정에 전하니 남대(南臺:학문과 덕이 뛰어나 이조(吏曹)에서 사헌부 대관(臺官)으로 천거된 사람.)로서 지평(持平:사헌 부의 청환직(淸宦職)으로 문과 급제자 중 강직한 선비들이 임명되었으며, 이조(吏曹)의 전랑 (銓郞)과 함께 전 조선시대의 사족사회(士族社會)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을 천거 하였으며 사후에 유림이 모여 나복산에 예장하였으며 10년 후에 국명으로 정려(旌閭:충신? 효자?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표하며 집의(執義)의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케 하였다.
공의 차남 맹(孟: 南溪公)이 효행실록을 편수하여 손자인 일손(馹孫: 탁영선생)을 점필제(이름은 종직이니 이조의 명현)선생에게 보내어 효문비명을 찬술(撰述)케 하였으며 묘갈( 墓碣: 뫼 앞에 세우는 작은 돌비.)은 다른 돌을 세우지 말고 묘지 밑에 있는 적은 돌을 다듬어 쓰 라는 유언에 의할 뿐이었다.
그 간단한 석면에 여섯 자가 새겨졌으며 이는 건(健) 맹(孟) 용(勇) 순(順) 인( ) 그리고 현(鉉)이었으며 김해 김씨의 삼현파 자손은 모두 이 육 형제의 자손이다.
용주조경(龍洲趙絅: 벼슬은 대제학이요 용주는 호이며 이름은 경이다)의 효문발(孝文跋)에 말하기를 절효 선생의 효성이 이르기를 만물중의 호걸인 호랑이도 감동하였거늘 하물며 밝 고 밝은 천리(天理)가 어찌 그 효성에 강림하여 백록(百祿)을 주지 않을소냐. 육장부(六丈 夫)의 많은 아들들을 두셨으며 육장부가 현명한즉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응함을 결과로 보여주는지라 더욱이 손자 탁영선생과 증손 삼족당선생이 특히 뛰어났으니 천지정영(天地精 英)이 김씨일문에 발육(發毓)되었다 하니라.

( 이상은 김해김씨삼현세가 행적 5P~7P에서 발췌후 재편집함. 회상사 1995년 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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