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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12세손/김유신 장군이 묘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2. 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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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 12세손 김유신 장군의 묘
김유신장군묘
위    치 :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 7-1번지 
관 리 청 : 경주시 관리부서 : 사적공원관리사무소 (054)771-7102
홈페이지 : 경주관광  culture.gyeongju.go.kr 
개    요 : 경주 고속버스터미널 옆 서천교를 넘어 오른쪽으로 김유신 장군 묘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김유신 묘를 위해 특별히 낸 흥무로로, 봄이면 길가에 노란 개나리와 벚꽃
           이 만발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다. 묘자리는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울창한 소나무숲속이며, 어느 왕릉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화려한 모
           습을 하고 있다. 묘는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인데,  둘레에는 24장의 호석과 돌난
           간을 둘렀고 호석과 돌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호석은 12지 신상이 새
           겨져 있는데,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나, 이 묘의 12지 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매
           우 온화해 보인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사적 제 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관시간 : 하절기(09:00-18:00) 동절기(09:00-17:00) 주차시설 : 버스 15대주차/ 소형 19대 주차 (1060평) 도로안내 : 경부고속도로 경주 IC - 오릉 - 고속터미널 - 서천교를 지나 우측 송화산 쪽으로 1.1Km에 위치.

정보제공자 : 1) 경주시청 문화관광과(054-779-6062,6631,6393,6396,6087) 2) 사적공원관리사무소 이정영 님
 작성기준일   2007년 02월 27일

   *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김유신장군묘로 가는 길가에 벚꽃이 만발하다...

비때문에 꽃잎이 길가에 떨어져 가벼운 바람에도 날리는 모습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나 묘 주변은 썰렁했다.

산불 때문에 울창하던 송림은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등성이에 무덤만이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960년대 그 문제 많고 말도 많던 무덤을 찾은 것이다.

서기 673년 7월 1일 김유신은 사망했다.

이때 문무왕은 친히 문상을 했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무열왕릉비에 이어 신라 역사상 두 번째의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군악대를 100여명을 동원하여 장례를 집행하고 금산원에 장사를 지냈다.

김유신장군묘 전경

 

그의 현손 김장청(金長淸)은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이라는 장군의 일대기 10권을 썼다.

 서기 1145년 약 470여 년 후 고려의 김부식은 이를 원전으로 하여 내용이 너무 번잡하고 윤색이 심하다고 생각하여

근거 있고 믿을만한 내용을 압축하여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3권으로 편찬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장군의 묘가 「금산원에 장사했다(葬于金山原)」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능은 모지사 북쪽의 동향한 봉우리에 있다(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之峯)」

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42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고,

삼국유사에는 54대 경명왕 때 에 추봉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신분상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묘는 신라 멸망이후에 김해 김씨에 의해 관리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왕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문중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또한 고려왕조에서 허락도 하지 않았다.

삼국유사는 1300년대, 즉 신라 멸망 후 400년이 지난 후에 쓰여지면서 왜곡된 기록이며 조선시대의 기록도 이를 근거로 기록되었다.

 

1730년 경주부윤이었던 남지훈에 의해서 비가 세워졌고  지금까지도 삼국유사를 믿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김유신의 묘에 관한 기록이 상반되고 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의 후손이 직접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김유신 장군묘 원경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산원이라고 하는 곳은 금산의 벌판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금산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다.

1967년 9월 24일자 조선일보에 이병도 박사가 "전김유신묘는 김유신 묘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으면서 김해 김씨인 김상기 박사와의 지면을 통한 반론과 재반론의 공방을 끝없이 계속되었다.

일반인들은 여기에 대한 판단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면 계속되는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끝없는 논쟁에 휘말렸으며

무덤 주인의 진위여부를 떠나 제사권에 관한 문제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학자들의 논쟁은 그들에게 맡기고 제사는 우리가 계속 지내겠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1973년 당시 경주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던 강우방선생은 십이지신상의 조각의 양식을 연구한 결과 김유신 당시인 673년경의 조각이 아니라 약 100년 뒤인 35대 경덕왕 때의 조각양식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왕릉의 양식도 김유신당시의 것은 아니고 33대 성덕왕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강우방 선생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흥덕왕 당시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면서 무덤을 고쳤다는 주장도 있으나 십이지조각의 양식으로 볼 때 흥덕왕대의 조각양식도 아니기 때문에 이 주장에도 설득력은 약한다.

통일 이후 경주 김씨는 김해 김씨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김유신 사망 후에는 가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성덕왕의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이 김유신의 후손을 감싼다고 왕에게 진언하기에 이르렀고

혜공왕 때에는 김유신의 직계후손이 역적죄로 처형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을 잠깐 읽어보자.

 

제 37대 혜공왕(惠恭王) 시대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4월에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 웬 사람 하나가 좋은 말을 탔는데 장군의 차림을 하였고

또한 갑옷 차림에 병장기를 가진 자 40여 명이 뒤를 따라오더니 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왕릉 속에서 왁자지껄하고 웃음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데 혹은 하소연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말소리에

"제가 살아서는 정치를 돕고 환란을 구제하고 나라를 통일한 공로를 세웠으며

지금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잠시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경술년에 제 자손이 죄 없이 사형을 당하였고

임금이나 신하들은 나의 공적을 생각하지 않으니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써 근념(勤念)을 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데 왕은 허락하소서" 하였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오직 나와 그대가 이 나라를 수호하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는 이전과 다름없이 힘을 쓰오" 하였다

유신공은 세 번을 청하였으나 미추왕이 모두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그만 돌아갔다.

 

혜공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겁이 나서 즉시 대신 김경신(金敬信·뒤에 원성왕이 된다)을 보내어 김유신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功德寶) 밑천으로 밭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들여놓아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친 후에 복을 닦기 위하여 세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미추왕 죽엽군(味鄒王竹葉軍)조>

 

이 이야기는 신라의 삼국통일 후 점차 김해 김씨가 도태되어가던 중 혜공왕 때 쿠데타를 일으켜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왕권이 넘어간 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에 추봉하고 무덤을 고쳤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기사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가 무덤을 고치는 사회는 아니다.

특히 왕족인 경주 김씨가 신하인 김해 김씨의 무덤을 고쳐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더군다나 일개 신하의 무덤을 왕릉과 동일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강우방선생은 십이지신상의 양식을 분석한 결과 전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은 흥덕왕 때의 조각이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전김유신묘의 형식은 인도의 산치대탑의 양식과 동일하다.

이것은 왕릉을 불교의 형식을 빌려 왕릉의 신성성을 극대화한 것인데 인도의 문화를 흉내내어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을 반영한 것인데

왕릉주변에 설치된 난간은 왕릉에만 있는 것으로써 인도의 산치대탑 같은 불탑에서 배워온 양식으로 이것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사회에서는 인도의 문화가 신라에 직수입되어 왕의 죽음은 부처님의 죽음과 동격화 하였으며 왕릉주변에는 고분이 많이 있으나 신하무덤 주변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엄격한 골품제가 유지되던 신라사회에서 신하의 묘가 왕릉과 같은 규모나 양식을 침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왕족이나 왕의 아버지조차도 사후에 왕 또는 갈문왕으로 추봉되었지만 무덤만은 왕릉의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전김유신묘는 왕릉이지 결코 김유신의 묘는 아닌 것이다.

 

현재 이 무덤에는 능비나 석인상이 없는데 이는 전경덕왕릉도 동일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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