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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유적지 정보/김유신장군 묘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2. 2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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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 김유신장군묘
지정종목 : 사적 21호
있는 곳람트 : 경주시 충효동 산 7-1
관람 포인트 : 무덤 호석의 12지신상 시대 파악
충효동에 소재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무덤은 사적21호이다.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다. 묘의 지름은 30m정도이며, 주위에 호석과 난간을 두른 원형분으로 호석에는 12지신상을 두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능전에는 70년대에 설치한 혼유석과 조선시대 숙종36년(AD1710)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운 비가 있다.

괘릉에서 보이는 석사자상과 석인상이 이곳에는 없다. 1960년대 이전에는 일제시대에 배치한 조각수법이 졸렬한 석인상이 놓여져 있었으나, 70년 전후하여 철거되었다.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의 특징은 모두 평복에 무기를 잡고 있으며, 헌덕왕릉과 황복사지 계단지 경우와 같이 모두 오른쪽 방향을 보고 있다.

김유신묘에 대한 긍정론자들은 원래의 모습은 지금과 같지 않았으나 제42대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됨과 동시에 개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곳 묘역에서 납석제 십이지신상인 토끼상과 말상이 발견된 바 있다. 높이가 30cm의 작은 상들이고 무복을 입은 무장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묘의 동쪽 산 아래에는 수묘하는 금산재가 있다. 또 태대각간이라는 신라비편이 1974년 3월 교동 천관사지 동편에서 출토된 것을 1974년 10월8일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이 고물상으로부터 구입하였다. 당시 김유신의 공적을 기록한 비편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김유신장군 묘의 진위 문제

이 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김유신장군 묘에 대한 위치를 서로 상반되게 기록한 이래 일제시대 일인 학자들, 해방 후에는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연스님 이후 이 능에 대한 논쟁의 첫 제기자는 경주고적에 대한 현대적인 첫 조사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인 학자 관야정 박사였는데, 여기에 반대하여 김유신의 무덤이 틀림없다고 역설한 이는 신라사 개척에 공이 많았던 금서룡박사였다.

그 이후 1968년 가을 우리나라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박사가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장군의 묘가 잘못 전해져 왔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박사의 주장에 즉각 반론을 펴고 나선 김상기박사 역시 사학계의 대학자여서 이 학술논전은 일반국민들로부터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논전은 사학계로서의 학문적인 쟁점의 제기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지만, 논쟁의 귀결에 따라서는 일반 국민들로서도 문화재위원회가 지정유적을 잘못 고증하는 바람에 엉뚱한 사적을 관람하는 셈이 되고, 특히 김해김씨 문중으로서는 조상묘를 잘못 모셔온 셈이 될런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주목되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조선일보 1968. 9. 24 에 이박사가 인터뷰 형식을 빌어 '사적21호는 김유신 묘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면서 비롯되었다. 1천3백년의 풍상을 침묵 속에 지켜온 한 고분이 엄청난 논쟁의 회오리를 몰고 온 셈이었다.

다년간 고증과 실측의 학적 고심끝에 얻은 이박사의 결론은 한마디로 지금까지 김유신묘로 전해진 묘는 신무왕릉이며, 무열왕릉 동편에 있는 김인문묘가 김유신의 묘이며 김인문묘는 이미 봉토가 허물어져 평지화 되어 그곳에 서악서원이 세워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김씨의 반론은 이틀 후 같은 지상에 앙케이트 형식으로 소개되고 뒤이어 중앙일보 1968. 9. 28 자에 이박사의 주장은 50여년 전 일본인 관야정씨가 들추어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새삼 논의할 것이 없는 사실이라는 기자의 해설기사 형식으로 나타났다.

같은 무렵 김해김씨 종친회는 앞으로도 사적21호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하여 화제을 더 하였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국제과학연맹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박사는 김박사의 반론에 대한 몇가지 반증을 제시하면서 조선일보 1968. 9. 28 에서 다시 거듭 주장했다.

이어 조선일보에서는 국립박물관장 김재원박사 회갑기념 논문집에 싣기로 되어 있던 이박사의 논문을 편집위원장이었던 이숭녕박사의 양해를 얻어 1968. 11. 9 ~ 12.5 까지 7회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논쟁은 더욱더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김박사 역시 한국일보 지상을 통해 반론을 거듭 제기하였고, 1969년초에 '김유신묘의 이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고고미술에 장편의 논문을 실었다. 양씨의 주장은 이 두 논문으로 일단 정리된 셈이지만 아직도 학계의 정설로서 정립되지 못한 채 사학계의 묵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경주지역에서는 1979년에 권오찬선생이 긍정론을 피력한바 있다.

답사포인트

죽어서 흥무대왕으로 불려진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망국의 아픔을 통일전쟁으로 승화시켰다. 장군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백제, 고구려 국경에서 목숨을 걸었다.
12지신상은 왕릉에만 있답니다. 김유신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12지신상을 만들었을까요?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김유신의 무덤과 무열왕릉의 모양새는 하늘과 땅 차이, 이상하다.
김유신은 태종무열왕의 사위,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의 처남. 이상해요!
무덤 관찰 방법. 난간의 형태, 12지신상의 옷, 머리의 방향, 무기의 종류 등을 살핀다. 12지신상을 보면 방향을 알 수 있다. 말-남쪽, 쥐-북쪽, 닭-서쪽, 토끼-동쪽.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은 사실일까. 그리고 천관은 정말 기녀였을까?

찾아가는 길

자가운전시 톨게이트에서 10분정도 소요. 톨게이트에서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첫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하여 가면 시외, 고속버스터미널이 나온다. 다시 좌회전하여 서천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강변로를 따라 800m정도 가면 낮은 언덕에 위치한 김유신장군묘이다.
고속,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택시(3분정도 소요)를 이용하거나 고속터미널 정문 맞은편에 있는 자전거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10분정도 서천다리를 지나 바로 우회전하여 경사진 아스팔트길을 달리면 된다. 도보로 20정도 걸린다.

주변 유적지

태종무열왕릉, 서악서원, 서악동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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