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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實相寺)/지리산

☞산사를 찾아서/우리의 사찰

by 산과벗 2007. 2. 2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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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지리산에 있는 절.
[개요]

실상사 전경, 전북 남원시 신내면 입석리 지리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실상사사적기 實相寺事蹟記〉에 의하면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의 선법(禪法)을 받고 귀국하여 홍척은 실상사를 도의는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여 선종을 전국에 전파시켰는데 이를 실상산파(實相山派)라고 한다. 그의 제자 수철(秀澈)대사와 편운(片雲)대사에 의해 절이 크게 중창되고 선풍을 떨쳤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팔전팔방(八殿八房)으로 대웅전·약사전·장육전·명부전·극락전 등 팔전과 만화(萬化)·현묘(玄妙)·적연(寂然)·청심(淸心) 등 팔방이 있고 그외 불이문(不二門)·해탈문·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종각 등의 당우가 대규모로 조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 화재로 대가람의 전각이 모두 전소된 뒤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1681년(숙종 7) 벽암(碧巖)대사가 중수하고 300여 명의 승려들이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1882년(고종 19) 다시 소실되었으나 1884년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인 가람배치는 대웅전인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탑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평지이탑식(平地二塔式)이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약사전·극락전·명부전·칠성각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절에는 많은 중요문화재가 있는데 백장암3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동서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보물 제41호)·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실상사약수암목각불탱(보물 제421호) 등이다.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통일신라), 보물 제33호, 높이 242cm,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실상사석등(통일신라), 보물 제35호, 높이 500cm, 전북 남원시 신내면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통일신라), 보물 제34호, 높이 290cm,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실상사동서삼층석탑]

실상사동서3층석탑(통일신라), 보물 제37호, 높이 각각 840cm, 전북 남원시 ...
실상사3층석탑,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2기. 보물 제37호. 높이 각각 840cm. 보광전 앞에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은 양식과 규모가 동일하며 기단 주위에 장대석으로 설정된 탑구(塔區) 안에 탑이 세워진 것이 독특하다. 탑의 구조는 이중기단 위에 3층탑신이 있는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특히 상륜부(相輪部)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중요하다. 지대석 위의 하대석과 중석은 붙여서 4매의 돌로 짰으며 중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새겨져 있다. 기단 갑석의 윗면 경사가 심하며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3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의 중석은 높직하며 역시 우주와 탱주가 하나씩 모각되어 있다. 상층기단 위의 갑석은 윗면의 경사가 심하며 탑신(塔身)을 받는 2단의 굄이 있다. 각 층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석에는 우주가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감소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水烟)·용차(龍車)·보주가 있으나 서탑은 수연만 결실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탑의 상층기단과 1층 탑신이 높게 구성되어 있고 옥개석도 얇은 편이어서 고준(高峻)한 느낌을 준다. 이 석탑들은 실상사 개창과 관련지어 9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상사동종]

1967년 실상사 경내에서 윗부분이 파손된 채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동종. 남아 있는 동체부(胴體部)의 높이 28~99cm, 입지름 96~99.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부정형의 형태로 불에 타서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 입지름의 크기로 보아 강원도 상원사동종보다 약간 큰 종으로 추정되며 남아 있는 유곽(乳廓) 일부와 비천(飛天)·당좌(撞座)·하대(下帶) 등의 조각은 이 종이 뛰어난 신라종의 하나였음을 알려준다. 하대에는 상하 연주문대(連珠紋帶) 사이에 당초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사이사이에 당좌와 유사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당좌는 지름 22cm로 자방(子房)이 넓으며 단판(單瓣) 연꽃무늬와 인동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비천은 한 곳만 완전하고 다른 한 곳은 밑의 구름무늬만 남아 있다. 비천은 서로 마주보고 앉은 주악상(奏樂像)으로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천의를 위로 날리며 내려오는 듯한 아름다운 자태이다. 비천의 왼쪽 윗부분에 유곽의 일부가 남아 있어 당초무늬가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어 제작시기는 실상사 개창과 관련지어 9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실상사백장암3층석탑(통일신라), 국보 제10호, 높이 500cm,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실상사의 암자인 백장암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국보 제10호. 높이 500cm. 신라석탑은 9세기 이후에 표면장엄(表面莊嚴)이 유행하는데 이 석탑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예이다. 지대석 위의 기단은 이형(異形)으로 하대·중석·갑석을 하나의 돌에 낮게 표현했으며 측면에는 난간을 조각했다. 1층 옥신(屋身)의 남면에는 문비형(門扉形)을, 그 좌우에 보살상·사천왕상을 조각하고, 다른 면에는 보살상·천왕상·동자상 등을 조각했다. 2층 옥신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2구씩, 3층 옥신에는 1구씩을 양각했다. 옥신의 상단부에는 모두 목조건축의 두공을 양각했고 2·3층의 옥신에는 난간을 모각(模刻)했다. 옥개석은 두터운 편으로 1·2층의 밑부분에는 앙련(仰蓮)을, 3층의 밑부분에는 삼존상(三尊像)을 조각했다. 상륜부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복발·앙화·보륜·수연 등이 남아 있다. 전체구조는 4각의 3층석탑인데 기단부가 매우 낮으며 세부적으로는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연꽃장식으로 대치되었다든가 각 층마다 난간이 돌려지고 여러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는 등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이형석탑이다.

[실상사약수암목각불탱]

실상사약수암목각불탱(1782), 보물 제421호, 181×183cm, 〈문화재대관〉에서
실상사 약수암의 보광명전(普光明殿)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목각불탱. 1782년 작. 보물 제421호. 세로 181cm, 가로 183cm. 하단부에 "乾隆四十七 壬寅十一月方丈山實相寺□□□諸佛□□諸 □□□幀"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1782년(정조 6)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목판에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었으며 현존하는 조선 후기 목각탱 중 가장 간단한 구도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2단으로, 하단에는 본존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의 보살상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지장보살을 포함한 보살상 4구와 나한상 2구가 있다. 본존상은 큰 광배를 갖추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데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어깨를 웅크린 듯한 자세에서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머리에는 중앙계주(珠)와 정상계주가 크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의 눈·코·입이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두 손은 따로 조각하여 끼워넣었는데 아미타인(阿彌陀印)을 결하고 있다. 주위에 있는 보살상이나 나한상들은 모두 연화좌 위에 서 있는 입상(立像)으로 손에 연꽃·정병 등을 들고 있거나 합장하고 있다. 얼굴의 표정이나 옷자락의 표현에서 획일화의 경향이 보이며 조선시대 불상의 소박한 표현이 돋보인다.

[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

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통일신라), 보물 제41호, 높이 266cm,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실상사의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철불좌상. 보물 제41호. 높이 266cm. 이 불상의 대좌와 광배는 전하지 않으며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가 낮다. 크고 둥그스름한 얼굴은 살찐 편이며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고 입술이 작고 두툼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불신(佛身)은 건장한 편이며 통견(通肩)의 법의가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드러나 보인다. 굵은 옷주름 사이사이에 작은 옷주름을 넣어 법의를 사실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통일신라 전성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양손은 근래에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며,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유연한 8세기 불상의 기풍을 유지하고 있으나 보다 여성적인 얼굴표현과 다소 위축되어 보이는 자세 등에서 약간의 양식 변화가 보인다. 실상사 개창(828)과 관련하여 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철불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예에 속한다.

金春實 글

 

실상사 사진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종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등 3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실상사의 자료에서)
 

 

 

 대웅전 앞 삼층석탑

 목탑지

 목탑지의 심초석

 약사쳐래불(철불)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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