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강진 월남사지

☞여행·가볼만한 곳/국내·문화.유적

by 산과벗 2007. 3. 9. 16:13

본문

강진 월남사지 [한국일보 2006-02-09]


경주의 감은사지가 그랬고, 양양 미천골의 선림원지가 그랬다. 탑과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에 서면 마음이 편해지고 따뜻해졌다.
황량하게만 보일 법한 그 풍경이 되레 지친 심신에 위로를 전해주는 곳. 묵묵히 지켜온 천년의 세월, 폐사지는 그 시간을 품은 온기로 언제나 따사로웠다.

전남 영암과 강진의 경계에 불쑥 솟은 월출산이 있다. 주봉 천황봉이 809m로 백두대간에 비할 높이는 아니지만 들판에서 갑자기 솟구친 돌산이라 산세가 장쾌하다. 영암에서 보이는 월출산이 마치 불꽃 모양으로 타오르는 듯한 암봉들로 남성적인 모습이라면, 강진의 월출산은 숲을 잔뜩 껴안고 있어 슬쩍 고운 얼굴 뒤돌려 내비치는 여인을 닮았다.
그 강진의 월출산 자락, 월출산을 바라보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월남마을이라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이 있다. 예전 월남사라는 큰 절이 있던 곳이다.

고려때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창건했다는 대찰이다. 월출산 금릉 경포대 계곡을 가득 메웠다는 큰 절이 지금은 월남사3층석탑(보물 제298호)과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만 남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왜 폐찰 됐는지는 임진왜란 때 불이 났을 것이라 추정만 할뿐 정확한 자료가 없다.
동틀 무렵 찾아간 월남마을, 월남사지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명을 받은 월출산의 기암 연봉이 천불천탑(千佛千塔)의 모습으로 하늘선을 가르고 있고, 그 풍경의 정점에 월남사3층석탑이 비죽 솟아 하늘과 땅을 잇고 있다. 탑 주변은 돌담을 두른 민가와 밭들로 이제는 절집보다 더 탑과 어울리는 모습이다.

지난 여름 황소가 몸을 비벼대던, 마른 덩굴 성기게 감긴 돌담에 기대 탑과 월출산이 빚는 그리움의 그림에 빠져든다. 시간과 바람이 채색한 황톳빛의 탑과 돌담들. 귓볼 에는 겨울 바람에도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바로 그 빛이다. 댓잎 서걱이는 바람소리와 동백나무 가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폐사지에서의 한적한 사유를 동무해준다.
월남마을 주민들은 월남사가 해남의 대흥사보다도 컸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탑도 원래 2개였단다. 허물어진 탑에서 나온 돌들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지붕으로 썼던 부재 하나 마을회관에 보관돼 있다. 이마저 누가 몰래 가져가려는 것을 발견해 뺏어놓은 것이라고.
강진군에서는 월남사지를 복원하기 위해 주변의 민가와 밭들을 사들이는 중이다. 복원은 하되 형체를 몰랐는 절집을 애써 번지르르하게 짓지 말고 폐허의 빈터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제되지 않은 폐사지가 때론 더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월남사지를 찾았다면 인근의 무위사를 그냥 지나쳐서야 되겠는가. ‘무위(無爲)’라. 이처럼 멋드러진 이름의 절집이 또 있을까. 천년고찰 무위사에는 국보 제13호로 무위의 이름값을 하는 단아한 건물인 극락보전이 있다. 수월관음도, 아미타삼존불 등 화려한 벽화를 품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월남사지와 무위사를 잇는 도로변은 ㈜태평양에서 운영하는 강진다원으로 차밭이 드넓게 펼쳐졌다. 월출산과 조화를 이룬 차밭 풍경은 자동차를 서너 번 세우지 않고서는 못버티게 한다.
조금만 있으면 강진은 동백으로 붉게 타오른다. 다산 정약용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도암면 만덕산(411m)은 동백산으로도 불린다. 만덕산 품에서 강진만을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백련사가 동백 꽃구경의 포인트다. 절 주변 계곡에 300~500년된 7,000여 그루의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동백 가지마다 터질 듯 부푼 꽃망울로 2월 중순이면 온통 주변을 붉게 물들일 태세다. 백련사에서 다산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어가면 다산이 머물렀던 다산초당이 있다.
[길에서 띄우는 편지] 겨울의 강진만
겨울의 강진만은 고고한 백조떼의 군무로 한껏 달떠있습니다. 청정의 강진만을 찾아든 겨울 진객의 자태에는 분명 여느 철새와는 다른 우아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강진 읍내쪽에 남아있는 갈대밭이 그 풍경을 더욱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진만은 원래 사방으로 갈대가 꽉 들어찼던 곳입니다. 지금 관광명소로 거듭난 순천만의 갈대밭 풍경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드넓던 갈대밭과 갯벌은 일제 때부터 시작한 계속된 간척으로 논으로 변해갔습니다. 배고픈 시절에 갯벌이란 그저 불필요한 노는 땅으로 치부됐었겠죠. 한 톨의 식량이 아쉬울 때였으니까요. 간척은 분명 그 시대의 간절한 요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개간한 논들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습니다. 쌀개방이다 뭐다, 쌀금은 바닥을 기고 있고 쌀농사의 미래도 암울하기만 합니다. 이번 여행길에서 “차라리 갈대밭과 뻘이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내려다보던 강진만의 은은한 풍경이 지금껏 그대로였다면”하는 강진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무의미한 ‘역사의 가정’에 빠져든 이유는 현재 새만금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조제 사업 때문입니다. 강진만처럼 바다를 막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사업입니다. 최근의 상황을 보니 방조제 완공은 곧 현실화할 것 같습니다.

김제 망해사에서 보이던 드넓은 갯벌에 부서지던 붉은 노을과 심포항의 아늑한 포구 풍경이 조만간 사라지겠죠. 그 아쉬움 만으로도 눈물을 떨굴 일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반드시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 시작된 동력에 떠밀려 사업이 계속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원기자]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