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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고령 대가야 고분군 답사 여행에서('0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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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09. 9. 1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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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고령 대가야 고분군 답사 여행에서--('09.9.11)

 

해인사/고령답사(최치원 유지,사명대사부도,팔만대장경,정중탑,

고령 지산동 고분 답사 

안내 및 강사 : 박동백 창원문화원장

 

 

오늘은 창원박물대학 첫 나들이 답사 여행이다.

100여명의 일행들과 함께한 문화유적 답사 여행의 하루를 정리한 사진들이다.

 

 ↑ 사진은 해인사 일주문이다.  

 

 ↑ 사진은 호류동계곡 농산정 앞 도로변 암벽에 새겨진 시석(詩石)이다.

시석(詩石)은 신라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친필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임에도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시석(詩石) 내용은

광분첩석(狂噴疊石) 후중만(喉重만)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 성도이(常恐是非聖到耳) 고교유수(故敎流水)진옹산(盡籠山)

포개어 바위에서 미친듯 뿜어내어 겹쳐진 멧뿌리 울리니 사람들의 말소리를 지척에서 분간키도 어렵도다.

아마도 시비소리가 귀에 이를까 저어하여 고의로 유수를 시켜 산을돌게 하였도다.

 

  ↑ 최치원 선생의 지석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는 박동백 원장

   

  ↑ 농산정으로 가는 가교

 

  ↑ 농산정(籠山亭) 전경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며 수도하던 정자의 풍경을 건너편 도로에서 담은풍경이다.

 

 ↑ 농산정(籠山亭) 설명 안내

 

 ↑ 농산정(籠山亭)옆 계곡에서 최치원 선생의 지석을 탁본한 글씨와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 농산정(籠山亭)앞 계곡풍경

이곳 계곡바위 위에서 점심을 먹으며 바라본 풍경으로 홍류동 계곡에도 조금씩 가을의

묻어나고 잇었다.

 

 ↑ 농산정(籠山亭)앞에서

함께 점심을 먹은 일행들...농산정과 아름다운 여인 4인방과 한데 어울린 풍경이

한폭이 그림이다.

 

 ↑ 해인사(海印寺) 삼층석탑(묘길상탑:妙吉祥塔)에 대한 설명

일주문 도착 직전 길가에 위치한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박동백 원장..

신라말 진성여왕 9년(895년) 전후 7년 전란때 생명을 잃은 중생을 공양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탑 안에 법보를 적은 4매의 지석이 발견 되었다 함.

 

 ↑ 해인사(海印寺) 일주문 현판

 

 ↑ 해인사(海印寺) 일주문 현판글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이다.

伽倻山 海印寺란 글씨는 해강(海崗) 백운거사의 글씨로 18세에 청나라에 유학전에 해행초에 묘경을 이루었고 풍경화를 잘 거렸다 한다. 해강(海崗)은 영친왕(英親王)의 스승이다.

 

 ↑ 해인사(海印寺) 대웅전 앞 정중탑(庭中塔)

뜰 중앙에 세웠다 하여 정중탑이라 부르며,1926년 중수시 중기단으로 확장 확장하였고  

법사리 봉안 신라 유품을 안장..

탑은 보통 3,5,7,9 홀수로 탑을 세웠고 삼국시대에는 대웅전앞에 9층탑을 세웠다 한다.

 

 ↑ 박동백 원장으로 부터 해인사(海印寺) 대웅전 앞 정중탑(庭中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이다.

 

 ↑ 해인사(海印寺) 대웅전 앞 정중탑(庭中塔)앞에서

창원의 미녀 아지매 여기 다모였네...3분은 지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초면인데...

삼측석탑 끝부분이 조금 짤려 나갔지만 밝고 멋진 모습들 보기 좋습니다.

 

 ↑ 해인사(海印寺)의 풍경/대웅전 앞에서...

 

 ↑ 대웅전 건물에서 내려다 본 정중탑 

 

 ↑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 보관돼 있는 건물로 들어서는 일행들

 

  ↑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 보관된 건물

 

  ↑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은

총 81,258매로 세로 24cm,가로 70cm,뚜게2.6-4cm,무게 3~4kg로 되어있다.

만든 시기로는 고려 고종 24(1237) ~ 35(1248)년까지 12년간,고려사에는 16년간이라 했다.  

강화도 서문밖 대장경 판당에 보관 되었다가 선원사(禪源寺)를 거쳐

조선조 태조 7년(1398)5월에 해인사로 옳겼다 함.

 

 ↑ 원당암(願當庵)내부에 있는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을 보고있는 일행들..

 

  ↑ 원당암(願當庵)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

진성여왕과 위홍

유모 부호 숙모뻘의 남편을 궁내로 불러들여 정치자문을 맡기면서 은탕생활을 하였음.

위홍이 죽자 2-3명의 미남 불러들여 음탕생활, 완 11년 6월 현강왕의 아들 정에게 양위,

해인사 원당암에 비로자나불(毘盧舍那雙佛) 2구 조성 11월 경북궁에서 죽음. 

 

  ↑ 원당암(願當庵)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 해인사(海印寺)에서 바라본 멀리 남산제일봉(일명;매화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우뚝 솟아있다. 

 

  ↑ 대웅전(大雄殿) 앞에서 창원 미녀 4인방...

 

  ↑ 해인사(海印寺) 범종(梵鐘)

 

 ↑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庵)

홍제암은 승병의 공으로 선조 41년(1608) 하사로 사명대사가 창건,말년에 이곳에서 입적(광해군 2년) 하였으며, 유형문화제 제156호로 지엉되었음.

 

 ↑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에 대한 설명문

 

  ↑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庵)

청허사명 기허대사 등 큰 스님들의 연전을 모시고 뒷산에는 석종의 모습으로 만든 사명대사의 부도가 있음.  

 

  ↑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

사명대사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비문은 홍길동 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찬이며,

광해군 4년(1612년)에 건립 하였음.

1943년 일제시 합천경찰서장(다케우라)가 4토막으로 파괴하여 자기집 디딤돌로 사용하던

것을 1958년 철봉으로 속을 연결 복원했으나 땜방질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 홍제암(弘濟庵)앞에서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 및 부도(浮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이다.

 

 ↑ 사명대사 부도(四溟大師 浮屠)

사명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형 종형으로 광해군 2년에 세웠음.

 

  ↑ 사명대사 부도(四溟大師 浮屠)앞에서 사명대사 부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이다.

사명대사의 생애

는 1544년 10월 17일 밀양에서 출생하여, 1592년 47세에 난을 당함.

성은 임(任) 이름은 유정(惟政),호는 송운(松雲),15세때 母,16세때 父를 잃고, 18세에 승과급제,

사명대사의 일화

1. 승두단단한마고(僧頭團團汗馬睾)

2. 유수첨첨좌구신(儒首尖尖座狗腎)

유생들이 대사의 머리를 보고 하는 말 : 1. 중 대가리는 단단한 말 불알 같다고 하자

이를 받아친 사명사 왈 : 2. 유생들의 머리는 앉아있는 개 x(고추)같도다 라고 하자

유생들 사명대사에게 한말 했다가 본전도 못뽑고 모두 달아났다고 하는 일화임.

 

 ↑ 사명대사 부도(四溟大師 浮屠)를 만지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에 너도 나도

어루 만지며 소원을 빌어보는 아지매들..

 

 ↑ 사명대사 부도(四溟大師 浮屠) 아래에서...

 

 ↑ 해인사(海印寺) 고려대장경판전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돌탑 앞에서

 

 ↑ 고령 대가야 박물관(大伽耶 博物館)

 

 ↑ 고령 대가야 박물관(大伽耶 博物館) 앞에서 대가야 고분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 대가야 발굴전시관

 

 ↑ 고분군 발굴 전시관 내부

왕릉이라 한더라도 정확한 기록이 없으면 고분 또는 고총 이라 이름한다고 한다.

하나의 무덤안에 여러개의 사람이 묻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절에도 순장 제도 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고분군 에서 발굴한 토기

 

 ↑ 고령 대가야 고분군 전경(사진은 전시관 입구에 있는 사진을 담아온 것임)

 

  ↑ 고령 대가야 고분군 전경(사진은 전시관 입구에 있는 사진을 담아온 것임)

 

 ↑ 전시관 입구에서 바라본 대가야 고분군의 일부분을 카메라에 담음.

 

  ↑ 대 가야의 불교 문화재들이 공원입구에 전시돼 있는 풍경이 가을 단풍과 어울러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 고령 대 가야의 불교 문화재들...

 

  ↑ 고령 대가야 박물관을 뒤로하고...

시간에 쫓겨 40기가 넘는 고분군을 둘려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창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해인사/고분군 문화재 답사를 통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고,우리 문화재에 해 다시한번 되돌아 볼수있는 계기를 갖게된 값진 여행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상세한 설명으로 문화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신 박동백 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답사에서 얻은 내용을 정리한 사진 입니다.

 

○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시석(詩石)

 

 ↑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시석(詩石)

 

↑ 시석(詩石)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 농산정(籠山亭) 앞에서 강의하는 박동백 원장

 

  ↑ 농산정(籠山亭)

 

 

 

↑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시석(詩石)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농산정 건너 도로변 암벽)

 

시석(詩石)은 신라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친필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임에도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 시석(詩石) 내용은

광분첩석(狂噴疊石) 후중만(喉重만)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 성도이(常恐是非聖到耳) 고교유수(故敎流水)진옹산(盡籠山)

포개어 바위에서 미친듯 뿜어내어 겹쳐진 멧뿌리 울리니 사람들의 말소리를 지척에서

분간키도 어렵도다.

아마도 시비소리가 귀에 이를까 저어하여 고의로 유수를 시켜 산을돌게 하였도다.

 

 

해인사(海印寺) 삼층석탑(묘길상탑:妙吉祥塔)

 

 ↑ 삼층석탑(묘길상탑:妙吉祥塔)

 

←해인사(海印寺) 삼층석탑(묘길상탑:妙吉祥塔)에 대한 설명

일주문 도착 직전 길가에 위치한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박동백 원장님..

신라말 진성여왕 9년(895년) 전후 7년 전란때 생명을 잃은 중생을 공양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탑 안에 법보를 적은 4매의 지석이 발견 되었다 함.

 

 

 

  ○ 해인사(海印寺) 일주문 현판글씨 

  

伽倻山 海印寺 현판글씨 

 

伽倻山 海印寺 현판글씨에 대한 설명 

 

 

↑ 해인사(海印寺) 일주문 현판글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이다.

 

伽倻山 海印寺란 글씨는 해강(海崗) 백운거사의 글씨로 18세에 청나라에 유학전에

해행초에 묘경을 이루었고 풍경화를 잘 거렸다 한다.

해강(海崗)은 영친왕(英親王)의 스승이다. 

 

 

 ○ 해인사(海印寺) 정중탑(庭中塔)

  

↑ 해인사(海印寺) 정중탑(庭中塔)  

 

↑ 해인사(海印寺) 정중탑(庭中塔)에 대한 설명 

 

 

↑ 해인사(海印寺) 대웅전 앞 정중탑(庭中塔)

 

뜰 중앙에 세웠다 하여 정중탑이라 부르며,1926년 중수시 중기단으로 확장 확장하였고

법사리 봉안 신라 유품을 안장..탑은 보통 3,5,7,9 홀수로 탑을 세웠고

삼국시대에는 대웅전앞에 9층탑을 세웠다 한다. 

 

 

 ○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

  

↑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판 입구 

 

↑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판에 설명 

 

 

↑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은 총 81,258매로 세로 24cm,가로 70cm,뚜게2.6-4cm,

무게 3~4kg로 되어있다.

만든 시기로는 고려 고종 24(1237) ~ 35(1248)년까지 12년간,고려사에는 16년간이라 했다. 강화도 서문밖 대장경 판당에 보관 되었다가 선원사(禪源寺) 거쳐

조선조 태조 7년(1398)5월에 해인사로 옳겼다 함. 

 

 

 ○ 해인사(海印寺)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

  

↑ 해인사(海印寺)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

 

↑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에 대한 설명

 

 

↑ 원당암(願當庵) 비로사나쌍불(毘盧舍那雙佛)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진성여왕과 위홍 유모 부호 숙모뻘의 남편을 궁내로 불러들여 정치자문을 맡기면서

음탕생활을 하였음.

위홍이 죽자 2-3명의 미남 불러들여 음탕생활,

완 11년 6월 현강왕의 아들 정에게 양위, 해인사 원당암에 비로자나불(毘盧舍那雙佛)

2구 조성 11월 경북궁에서 죽음.

 

 

홍제암(弘濟庵)과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부도(浮屠)

  

↑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庵)

  

↑ 홍제암(弘濟庵) 앞 비문

 

 

↑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庵)

 

홍제암은 승병의 공으로 선조 41년(1608) 하사로 사명대사가 창건,말년에 이곳에서 입적(광해군 2년) 하였으며, 유형문화제 제156호로 지정되었음.

청허사명 기허대사 등 큰 스님들의 연전을 모시고 뒷산에는 석종의 모습으로 만든 사명대사의 부도가 있음.

 

  

↑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

 

↑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에 대한 설명

 

  

↑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에 대한 설명을 듣있는 일행들

 

사명대사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비문은 홍길동 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찬이며,

광해군 4년(1612년)에 건립 하였음.

1943년 일제시 합천경찰서장(다케우라)가 4토막으로 파괴하여 자기집 디딤돌로 사용하던 것을 1958년 철봉으로 속을 연결 복원했으나 땜방질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 사명대사(四溟大師) 부도(浮屠)

 

↑ 사명대사(四溟大師) 부도(浮屠)에 대한 설명

 

 

↑ 사명대사 부도(四溟大師 浮屠)에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

 

사명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형 종형으로 광해군 2년에 세웠음.

 

▶ 사명대사의 생애

는 1544년 10월 17일 밀양에서 출생하여, 1592년 47세에 난을 당함.

성은 임(任) 이름은 유정(惟政),호는 송운(松雲),15세때 母,16세때 父를 잃고, 18세에 승과급제,

 

▶ 사명대사의 일화

1. 승두단단한마고(僧頭團團汗馬睾) 2. 유수첨첨좌구신(儒首尖尖座狗腎)

유생들이 대사의 머리를 보고 하는 말 :

1. 중 대가리는 단단한 말 불알 같다고 하자

이를 받아친 사명사 왈 :

2. 유생들의 머리는 앉아있는 개X (고추)같도다 라고 말함.

유생들 사명대사에게 한말 했다가 본전도 못뽑고 모두 달아났다고 하는 일화임.

 

 

 ○ 고령 가야고분군 답사

  

↑ 대가야 고분군 내부

 

↑ 대가야 고분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원장

 

 

↑ 고분군 발굴 전시관 내부

  

왕릉이라 한더라도 정확한 기록이 없으면 고분 또는 고총 이라 이름한다고 한다.

하나의 무덤안에 여러개의 사람이 묻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절에도

순장 제도 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40기가 넘는 고분군을 다 둘려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창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 해인사/고분군 문화재 답사를 통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고,우리 문화재에 해 다시한번 되돌아 볼수있는

계기를 갖게된 잊지못할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울러 박동백 창원문회원장님깨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답사에서 담아온 인물 사진입니다.

 

 

 

 

 

 

 

 

 

 

 

 

 


 

 

다음은 해인사 문화재 답사여행에서 담은 일행들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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