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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聞慶)새제 역사,문화 탐방--(0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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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09. 9. 2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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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聞慶)새재 답사

 

('09년9월25일)

 

강사 : 박동백 창원문화원장

 

 

★ 문경새재(聞慶鳥嶺)의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조령관(鳥嶺關)

  

남쪽 정면에서 바라본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앞에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남쪽 옆에서 바라본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북쪽 정면에서 바라본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의 모습

 

문경새재는 옛날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3개의

고개중 으뜸으로 칠만큼 중요한 교통로였다.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조곡관(鳥谷關)

  

정면에서 바라본 조곡관(영남제2관)

 

북쪽에서 바라본 조곡관(영남제2관)

 

  

북쪽 옆에서 바라본 조곡관(영남제2관)

 

정면 멀리서 바라본 조곡관(영남제2관)

  

↑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嶺南第2關)의 모습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 교귀정(交龜亭)

  

교귀정(交龜亭)내에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교귀정(交龜亭)에 대한 설명

 

↑ 교귀정(交龜亭)

 

조곡관(鳥谷關)과 주흘관(主屹關)의 중간지점인 용추연 위에 있다.

체임하는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의 교인처(交印處)로 성종조 신승명이 건립했다.

유지(遺址)와 김종직(金宗直)의 시(詩)가 전해 왔으며 1999년 10월 문경시가 중창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교귀정이라고 불렀을까? 가만히 보면 의아해 진다. 그래도 신구관찰사가

이곳에서 서로 소임을 넘기는 교인처로 사용했다는 곳인데,

일개 정자에서 그런 의식을 거행했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다. 교귀정의 곁에는

교귀원이라는 시비가 서 있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자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1478~1534)의 문집인 『용재집(容齋集)』에 실린 <교귀원>이라는 시가 있다. 용재집은 11권 7책으로, 1589년(선조 22) 손자 광(洸)이 초간본을 냈고, 1634년(인조 12) 이안눌이 충청도순찰사로 있으면서 별집을 덧붙여 다시 펴냈다. 책머리에 주세붕이 쓴 행장과 목록이 있고, 책 끝에 중간의 경위를 밝힌 이안눌의 발문이 있다. 권1~8에는 시 1,675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표현이 참신하고 표현의 격조가 높은 작품들이다.

 

교귀란 이름은 그 유래 있어도

지난 자취는 전해짐이 없어라.

어여쁜 새는 진정 마음 쏠리지만

시든 꽃은 가련할 뿐이네.

예와 이제가 한가지 모습인데

지혜와 어리석음 무슨 차이 있으랴.

아직은 견마 잡힐 신세 아니어서

산과 계곡이 반겨주는 것이리라.

 

이 시제가 ‘교귀원’이라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교귀정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원은 여행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묵을 숙소를 말한다. 1392년(태조 1) 9월에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의 상소로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이 수리·건설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원우는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교귀정은 아마 교귀원이었을 것이고, 이 정자 말고도 주변에 묵을 수 있는 공간도 함께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신구관찰사가 교인처로 사용을 했고, 새재의 지리적 특성상 묵을만한 곳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단청도 하지 않은 채 새재를 넘는 길가에 서 있는 교귀정. 오랜 세월을 이곳을 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온갖 희로애락을 다 보듬어 안고, 그 자리에 서 있은 시간이 얼마이던가? 예전 한양으로 과거 길에 오르는 선비들은 일부러 힘든 이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 미끄러진다. 혹은 ’죽 쑨다‘고 해서 가장 힘들다는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에 급제를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주막(酒幕) 

  

주막(酒幕)

 

숙조령(宿鳥嶺) 새재에서 묵다

 

↑ 주막(酒幕)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1983년 11월 조국순례자연보도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 주흘관(主屹關)

  

북쪽에서 바라본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북쪽에서 바라본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

 

 

남쪽 입구 멀리서 바라본 주흘관(主屹關)

-영남제1관(嶺南第1關)

 

↑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 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다음은 문경새재 담사에서 담은 인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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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답사에서 담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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