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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삼현파의 유래와 선조계보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18. 1. 1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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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삼현파의 유래와 선조계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신화에 의하면 42년에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반나절 만에 이 알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금관 가야국의 왕이 되어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고 하며, 199년까지 158세를 사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다고 한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능은 경남 김해에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 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7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 종친회'로 하였다. 김해 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김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무열왕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계파 ]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경파(京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牧卿)을 파조로 한다.

§ 사군파(四君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이 파조다.

§ 삼현파(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管)을 파조로 한다.

  

三賢派의 내력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당시 왕(정종으로 알고 있음 )이 선생의 칭송을 듣고 충절과 효성의 상징으로 절효(節孝)란 호를 하사하였음.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일손은 후사가 없었고, 일손의 장조카(준손의 장남)이 삼족당 대유(大有) 선생으로서 조선시대 중기 문인으로서 널이 이름을 떨쳤고, 삼족당 문집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

삼족당 선생은 동시대 巨儒인 남명 조식선생과 동문 수학을 했고, 선생의 글을 제가 몇 편 읽어 보았는데 자연을 통찰하는 웅지와 그러면서도 여성적인 섬세함, 구절구절 물흐르는 듯한 유려한 문체는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듯 하였습니다.

참고 : 우리 삼현파 중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탁영선생께서 무오사화로 극형에 처해 지면서 후손들에게 “李家에 협조하지 마라( 벼슬에 나가지 말라 ) ”는 유훈을 남기셨고, 후손들이 그 유훈을 받들어 촌야에서 농사를 짓는 閒遊한 생활을 즐긴 때문인듯합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역자의 후손이라..등용을 막은 탓이 있긴 합니다

  

 김해김씨 [삼현파 의 유래]

조선 20대 정종(正宗)대왕(서기 1777~1800)께서 金海金씨를 가리켜 삼한갑족( 三韓甲族)이라 칭하시며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세 현인(賢人)을 가리켜 삼현(三賢)이라 하였다. 한 집안에서 사대간(四代間)에 삼현(三賢)이 났다는 일은 과거나 앞으로(古來)도 드문일인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三賢派)로 定한 것이다.

현종(顯宗) 원년(1660년)에 송준길(宋浚吉)선생 등 유림의 상소(上疎)에 의해 나라로부터 자계서원(紫溪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고,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의 위폐를 서원존덕사(書院尊德祠)에 봉안(奉安)하고 유림(儒林)에서 누세춘추(累世春秋) 매년 2월 8일中 정일(丁日)로 봉향하고 있고 이 자계서원 건물이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①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②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가 되어 이른바 무오사화의 수괴로,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③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출처 : 김해김씨 금녕군파(경파)

출처 : 김해김씨 가락정곡종친회 홈페이지 이곳을 참고 하셔요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란

  김해김씨 판도판서공 휘관파(版圖判書公 諱管派)의 별칭이며, 판도판서공파란 중조(中祖) 관(管)할아버지께서 조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라는 벼슬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이하 자손들을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또는 판도판서공 휘관파(版圖判書公 諱管派)라고함.

 

조선 정종조에 김해김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하였고 절효공 휘극일(節孝公 諱克一), 탁영공 휘일손(濯纓公 諱馹孫), 삼족당 휘대유(三足堂 諱大有) 등 三人을 가리켜 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하였으며 한집안에서 4대(四代)에 걸쳐 3賢人이 났다는 것은 고래(古來)로 매우 드문 일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후손(後孫)들을 삼현파(三賢派)라 불렀음.

 

판도판서공 휘관파(삼현파)는 5세(世;차례) 절효공(節孝공 휘극일(諱克一)의 6형제로부터 군수공휘건파(諱 建), 집의공휘맹파(諱 孟), 한림공휘용파(諱 勇), 진사공휘순파(諱 順), 녹사공휘인파(諱 靭), 진의공휘현파(諱 鉉)등 6개 지파(支派)로 크게 나뉘어져 있으며, 그 외 군수공 휘익파(郡守公諱益派), 통덕랑공 휘무파(通德郞公諱武派) 가 있음.

  

조선 20대 정종(正宗)대왕(서기 1777~1800)께서 金海金씨를 가리켜 삼한갑족( 三韓甲族)이라 칭하시며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세 현인(賢人)을 가리켜 삼현(三賢)이라 하였다.

한 집안에서 사대간(四代間)에 삼현(三賢)이 났다는 일은 과거나 앞으로(古來)도 드문일인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三賢派)로 定한 것임.

  현종(顯宗) 원년(1660년)에 송준길(宋浚吉)선생 등 유림의 상소(上疎)에 의해 나라로부터 자계서원(紫溪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고,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의 위폐를 서원존덕사(書院尊德祠)에 봉안(奉安)하고 유림(儒林)에서 누세춘추(累世春秋) 매년 2월 8일中 정일(丁日)로 봉향하고 있고 이 자계서원 건물이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음. 

  (자계서원 :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번지)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①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②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가 되어 이른바 무오사화의 수괴로,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③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 같은 성씨, 같은 본관, 같은 파내에서도 지역이나 小문중에 따라 다른 항렬자(돌림자)를 쓸 수도 있으므로 그 점도 참고하시기바랍니다.

66세(18세) ○圭(규)
67세(19세) 昌(창)○
68세(20세) ○斗(두)
69세(21세) 容(용)○
70세(22세) ○坤(곤) 
71세(23세) 鍾(종)○ 
72세(24세) ○洙(수)泰(태) 
73세(25세) 相(상)東(동)○ 
74세(26세) ○煥(환)熙(희) 
75세(27세) 廷(정)在(재)○ 
76세(28세) ○鎬(호)鎭(진) 
77세(29세) 永(영)汶(문)○ 
78세(30세) ○根(근)杓(표)

그리고 金水木火土, 甲乙丙丁..., 子丑寅卯..., 一二三四..., 天地玄黃...등등의

문중에서 정한 기본 순서(항렬)를 지키면서 다른 글자를 쓸 수도 있습니다.

또 좋은 이름으로 짓기 위하여 항렬자를 넣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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