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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도.. 자계서원..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18. 3. 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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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1을 누르고 보시면 편리합니다.

 

 

 

 

출장차 들른 청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탁영선생을 모신 자계서원을 들러본다..

청도에도 몇군데 서원이 있는걸로 알고 있으나,

그중 탁영 김일손 선생을 모신 자계서원이 으뜸인듯 하여 향한다.

 

청도에서 대구로 들어오려면 팔조령을 넘어야 하므로 서원이 위치한 이서면을 거칠 수 밖에 없다.

 

 

 

 

 

 

 

한무리의 관람객들이 빠져 나가자 서둘러 문을 걸어 잠그려시던 촌로께 부탁하여 한적한 서원을 혼자 돌아본다..

 

 

 

 

자계서원은 탁영 김일손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탁영선생이 누구이신가?

 

환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선생과 함께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3 제자 중 한분이시고,

조선 초 성리학의 계보를 이어가신 분으로...

성종 사후 사관으로 실록 편찬 작업때

스승인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며 쓴 "조의제문"과,

훈구파인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중에 기생들과 놀아난 내용을 비판하는 "화술주시" 두 글을 사초에 기록했다 하여,

유자광등의 훈구파가 일으킨 조선4대 사화 중 하나인 무오사화때 스승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본인은 능지처참에 당하신분 아닌가...

 

(참고로 부관참시는..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주검을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던 형벌이며,

 능지처참은..

 일단 죄인을 죽인 뒤 그 시체를 머리·왼팔·오른팔·왼다리·오른다리·몸통의 순서로 6개 부분으로 찢어 각지에 보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무시무시한 형벌이다..)

 

탁영선생은 매우 진취적이고 과감하게 조정을 향해 직언과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언관이 아니셨나 생각된다..

 

(참고로 언관은 조선 시대에 언론을 주도한 관직으로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의 언관은 벼슬의 품계는 높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망이 높고 청빈함이 중요시하게 요구되었다..

 3사의 언관의 입은 고관들은 물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언관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직무는 재상과 대등하다.”라고 까지 하였다.)

 

 

 

 

 

 

 

예전에 정리했던 고려말 ~ 조선초기 성리학의 계보이다..

 

포은 정몽주

      │

야은 길재

      ↓

강호 김숙자

      ↓

점필재 김종직

      ↓

환훤당 김굉필 (달성 도동서원), 일두 정여창 (함양 남계서원), 탁영 김일손 (청도 자계서원)

      ↓

정암 조광조 (용인 심곡서원), 회재 이언적 (안강 옥산서원)

                                              ↓

남명 조식 (산청 덕천서원),    퇴계 이황 (안동 도산서원)

                                              ↓

                                       서애 류성용 (안동 병산서원)

 

노란색 글자색은 조선 5賢을 이른다.

 

 

 

 

 

 

 

 

청도하면 역시나 감이다..

서원 앞 담장에는 벌써 감이 붉게 익어간다..

 

 

 

 

 

 

 

 

외삼문인 유직문..

 

 

 

 

 

 

 

영귀루..

 

 

 

 

 

 

 

 

영귀루..

 

 

 

 

 

 

 

 

 

 

 

 

 

 

 

 

 

영귀루에서 바라 본 자계서원의 강당인 보인당..

 

여기서 잠깐!!!

보인당을 바라보다 보니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위의 사진은 정확히 영귀루 중앙에서 보인당을 찍은 사진이지만,

자계서원 현판과 기둥을 자세히 보면 중앙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고 보인당의 전면 중앙방향이 좌측으로 틀어져 있다. 

 

 

 

 

 

 

 

 

세로로 보인당의 전면 정 중앙을 찍었을때 위와 같이 중앙을 향하는 방향이 틀어져 있음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보인당의 전면 중앙은 영귀루의 4개의 기둥의 중앙인 2, 3번째 기둥의 중앙과 일치하지 않고 3번째 기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보인당의 전면 중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길래 그렇게 틀어졌을까 하고 뒤를 돌아보니..

바로 청도 남산의 산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18mm..

 

 

 

 

 

 

 

60mm정도로 약간 당겨보았다..

 

 

 

 

 

 

 

지도에서 확인하면 이렇게 정확히 남산 정상을 향해 있다..

남산의 기운를 받기 위함이었을까?

풍수상 무슨 형국인지... 아시는 분은......

 

 

 

 

 

 

 

사당인 존덕사는 강당인 보인당의 좌측에 위치한다..

도산서원과 같이 좌상우하의 공간배치 구조..

 

 

 

 

 

 

 

 

 

 

 

 

 

 

 

 

 

 

후배들의 기숙공간인 서재..

 

 

 

 

 

 

 

 

선배들의 기숙공간인 동재 운계정사..

함양 남계서원의 동재인 양정재의 애련헌과 같이 남쪽으로도 틔여져 있다..

세칸 맞배지붕에 별 다를것 없어 보이는데..

무엇이 특색있는 기법이라는지???

 

 

 

 

 

 

 

동재와 학자수인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탁영선생께서 직접 심으셨단다..

대부분의 서원은 모시는 선현의 사후에 조성되었지만,

도산서원의 도산서당과 이곳의 운계정사처럼 선현이 살아계실때 직접 택지하고 조성한 공간이므로

탁영선생께서 직접 심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이 은행나무를 관하기 위해 운계정사의 남쪽면을 틔웠나?? 궁금.....

 

 

 

 

 

 

 

 

은행열매가 탐스럽게 열려 있네..

 

 

 

 

 

 

 

 

익은 은행열매는 벌써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은행량도 상당하겠다..

 

 

 

 

 

 

 

 

자계서원 보인당..

 

 

 

 

 

 

 

 

 

사액인 현판..

 

 

 

 

 

 

 

 

자계(紫溪)의 紫字를 자세히 보면 비대칭적으로 쓰여진 걸 알 수 있다..

흔히들 임금의 명을 받고 현판의 글을 쓰다 보면 긴장하고 떨려서 한자 한자 각각 다른이들이 쓴 걸 합쳐서 현판을 만들었기에 이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현대인들의 무지의 발상이라고 본다..

임금의 명을 받고 사액의 글을 쓰는 사람은 분명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고 최고의 문장가였을 것이다..

때문에 힘주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분명히 강조했을 것이기에 이런 조합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지(止)字와 비(匕)字가 합쳐져 차(此)字를 이루고,

차(此)字와 사(?)字가 합쳐져 자(紫)字를 이루었다..

유독 此字의 匕를 강조한 것은 선생이 무오사화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때 서원앞의 냇가가 사흘이나 붉게 변했다는 전설로 봤을때,

비수, 화살촉, 날카로움의 의미인 匕字를 더욱 크게 나타내어 붉은빛을 더 강조하여 선생의 충절과 한을 표현하려 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혼자만의 생각!!!)

 

 

참고로 아래와 같이 남명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의 외삼문인 시정문 현판에서도 비슷한 부분을 볼 수 있다..

 

가운데 정(靜)자의 크기를 시(時)자나 문(門)자보다 더 크게 써서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남명의 동중정(動中靜)사상의 세계로 들어선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중동이 아닌 동중정이다..

 

 

 

 

 

 

 

보인당 현판..

 

 

 

 

 

 

 

 

보인당 뒤편..

 

 

 

 

 

 

 

 

보인당 마루에 올라 정 중앙을 향하면 역시나 영귀루 중앙이 아니라 남산 정상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상우하이므로 당연히 고직사는 우측에 놓일것이고..

 

 

 

 

 

 

 

 

전사청..

음택의 공간이므로 역시나 두칸 건물이다..

 

 

 

 

 

 

 

 

사당인 존덕사..

 

 

 

 

 

 

 

 

이곳 자계서원에 정료대는 강당, 사당 어디에도 없다..

장판각.. 아니 장서각도 없다..

역시나 이곳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훼철되어지고 최근에 복원되다 보니 서원의 구성요소 중 몇가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내삼문인 유현문은 역시나 굳게 닫혀 있고...

 

 

 

 

 

 

 

 

사당의 좌측에는 담이 보이지 않는다..

좌상우하의 서원의 공간배치에서 극상의 공간으로 지기를 받는곳 임을 알 수 있다..

 

 

 

 

 

 

 

 

자계서원..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 곧은 선비이자, 제대로 된 언관이기를 원했던 탁영선생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남명선생과 같이 탁영선생 역시 문묘에 배향도 못되시고, 하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훼철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계서원을 나서며..

 

 

 

 

출처 : 수빈사랑
글쓴이 : 수빈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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