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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도 자계서원] -대쪽같은 직필의 ‘탁영 김일손’ 조정 피바람에 순절하던 그날 개울은 핏빛으로 물들어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18. 3. 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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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본당인 보인당 마루에서 바라본 서원 전경.

자계서원 본당인 보인당 마루에서 바라본 서원 전경.


자계서원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br> 서원은 5칸 보인당을 중심으로 3칸 동ㆍ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br>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된 후 1960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복원했다.<br> 김정목 기자 tigerjm@idaegu.com
자계서원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서원은 5칸 보인당을 중심으로 3칸 동ㆍ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된 후 1960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복원했다.
김정목 기자 tigerjm@idaegu.com


서원내 존덕사에 마련된 김일손 선생 위패.
서원내 존덕사에 마련된 김일손 선생 위패.



비슬산에서 발원하여 청도읍을 돌아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청도천의 한 중심이 이서 땅이다. 
대구에서 지방국도 30을 따라 팔조령을 넘어 10㎞ 남짓 남쪽으로 달리자동차는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 앞에 멈춰 선다.
자계서원(경북유형문화재 제83호)은 조선 초기, 대쪽 같은 사관으로 살다간 탁영 김일손의 학덕을 기리고 교육한 역사문화적 공간이다.

용이 누운 지세 같다하여 붙여진 와룡산을 기대고 남으로 멀리 청도 남산을 바라보는 자계서원은 찾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 준다.
제법 큼직한 서원의 규모에 비하여 가슴 높이로 안기는 돌담이 서원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게 하는데 5칸짜리 보인당을 중심으로 3칸의 동ㆍ서재사가 본당을 호위하고 있다. 
그것도 부족할세라 누각 영귀루와 출입문 유직문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 서원은 마치 ‘ㅁ’자를 그려 놓은 듯하다. 

탁영이 직접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500년을 훌쩍 넘기고도 가지 끝마다 실한 열매를 자랑한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1498년)로 탁영이 참변을 당한 뒤 중종 때 이르러 그의 신원이 회복되자 비로소 1518년에 자계사를 짓고 탁영을 배향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 두차례 중건을 하지만 임란 등으로 소실되고 이를 다시 지어 1661년에 사액서원으로 품격을 갖추게 된다.
자계서원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871년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60년대 들어 탁영의 후손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재인 운계정사(위)와 훼철 이후 재건된 서재(아래).
동재인 운계정사(위)와 훼철 이후 재건된 서재(아래).


그 당시에 철훼되지 않고 남은 초기의 건물은 유일하게 동재, 운계정사다. 
오래된 듯 둥근 기둥마다 세월의 결이 묻어난다.
나뭇결 따라 세로로 쭉쭉 갈라진 틈새마다 촘촘히 옛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학생들의 숙사로 사용된 3칸짜리 동재는 비록 소략하지만 둥근 기둥과 이중으로 두른 도리에 더하여 동쪽으로 열린 한 칸짜리 누마루는 학생들의 담소와 휴식을 나눈 공간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건물이나 공간은 그 의미를 지닌 이름을 달고 있지만 자계서원에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대문 이름이다.
그리 높지 않은 솟을대문인 유직문. 그 의미 속에는 탁영의 정신이 스며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서원 문을 드나들면서 곧음(直)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가 아닐까. 탁영의 학덕은 곧음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사관을 6년이나 감당했을 만큼 그의 수기치인의 면면은 오로지 곧게 생각하고 의롭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탁영 김일손의 올곧은 기운과 직필 끝의 악연들 

본당 중앙에 걸린 자계서원 현판.
본당 중앙에 걸린 자계서원 현판.

탁영 김일손은 1464년 정월, 자계서원 부근에서 태어났다.
청빈한 선비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위로 두 형들과 함께 실천유학의 교과서인 <소학>을 읽고 행동하면서 학문을 다졌다.
때때로 밭에 나가 계절의 변화와 곡식이 자라는 것을 찬미하고 마을 앞 개울, 운계천에 나가 송사리 떼를 좇기도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1482년, 열여덟의 청년으로 훌쩍 자란 탁영은 집을 떠날 결심을 한다. 
나이에 비하여 훨씬 성숙해 보이던 탁영은 아버지 앞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그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에 오로지 의존하여왔습니다만 이제 집을 떠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 마땅한 스승을 살펴 두었느냐” 
듣고 있던 아버지 김맹은 아들의 말에 온전히 공감하고 그 길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탁영은 고향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밀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친의 삼년상을 지키려 고향에 와 있던 점칠재 김종직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였다. 

1482년 겨울이 가신 이른 봄, 어머니 상을 마친 점필재가 우울한 마음을 달래던 중 의관을 단정히 여민 청년 손님이 찾아왔다.
“점필재 선생을 뵈려 왔소이다” 탁영의 당당한 풍모와 목소리에 문지기도 숙연해했다. 
근 30여년의 나이차를 둔 탁영과 점필재는 이렇게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마주 앉아있었다.
쉰을 갓 넘어선 당대의 최고 선비이자 두루 행정경험을 한 김종직은 김굉필과 정여창을 비롯한 많은 문도를 두고 있는 터였다.
이윽고 탁영은 점필재 앞에서 작은 보따리를 열고는 수신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던 탁영금을 꺼내 현을 뜯기 시작했다.
사랑채 밖으로 심금을 울리는 잔잔한 율려가 깊어져 갔다.
자당의 탈상을 위로하고 나아가 전도를 축원하는 노래였으리라.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헤어졌다. 
탁영은 현을 빌려 한 치의 부조화조차 용납하지 않는 음률로 자신의 뜻을 전하였고 점필재는 말없이 탁영을 문하로 받아들였다.
문 밖을 나서는 탁영의 뒷 보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점필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충직한 기개가 장차 조정과 도학정치를 위하여 크게 쓰일 인물’이라고 중얼거렸다.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숙자를 스승이자 아버지로 둔 김종직은 가학을 다지고 조정으로 진출한 이후 신숙주를 비롯한 훈구 지식인들과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후학들과 신유학을 논변하면서 영남유학의 거봉으로 자리 매김한 인물이다.

탁영이 점필재를 만나기 10여 년 전, 점필재가 함양부사로 나갔을 때의 일이다. 
동헌 앞의 학사루는 점필재의 맘의 여유를 채워주던 더없이 아름다운 공간이었데 어느 날 누마루에 오른 점필재가 함양에 처가를 둔 유자광이 써놓은 시판을 보게 된다. 
그 순간 간악한 유자광의 행장이 눈앞을 스치면서 ‘감히 유자광 따위의 소인배가 학사루에 현판을 걸다니…’ 하면서 유자광의 그 현액을 떼어내 불태워 버렸다. 
이 일은 입소문을 타고 함양을 넘어 유자광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유자광은 속으로 노기를 참으며 ‘그래 어디 두고 보자’ 하고 김종직에게 질투의 시위를 겨누기 시작하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가. 의로운 탁영에게도 질투의 화신이 다가왔다. 
성종은 긴 제위 기간 동안 점필재를 남달리 총애하였다.
59세에 이른 점필재가 조정을 떠날 무렵, 능문능이한 애제자 김일손도 최고 학당인 호당을 거쳐 춘추관 사관이 되었다.
탁영은 그야말로 곧은 붓끝으로 사초를 기록하였다.
임금마저도 꺼내 볼 수가 없는 사초다.
그즈음 그는 당대의 세도가인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에 실었다. 
그것을 알게 된 이극돈이가 탁영을 찾아왔다.

“여보게, 탁영 내가 재임 중에 실수를 했네. 그 기록만은 좀 지워주게” “사관으로서 사초는 곧 생명이외다.
빼 줄 수가 없소이다” 탁영의 단호한 거절에 이극돈의 자존심은 말이 아니었다. 
품계가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탁영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더욱 괘씸했다. 

그 후 연산군 초기(1498년)에 들어,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탁영은 자신의 스승 점필재가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다.
고대 중국의 초나라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고 의제를 슬퍼한다는 조문의 글인데 이는 곧 세조의 반정을 부정하고 단종을 애도한 글이 아니었던가.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하였다.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실록청 당상관이 되어 그 사초를 꺼내 본 것이다. 
물론 자신의 비행기록과 함께 조의제문을 말이다.
호시탐탐 벼르고 있던 그는 유자광 등 훈구세력들과 짜고 선비들의 직언을 외면하던 연산군을 부추겼다.

“선조를 비난하고 나아가 종묘사직을 흔드는 대역죄인 김일손을 능지처참하고 그 스승 김종직을 부관참시함이 마땅합니다”
김종직과 유자광 그리고 김일손과 이극돈, 그들의 해묵은 악감정이 불을 뿜었다. 
죽순처럼 뻗어나는 사림파와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훈구파와의 일대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핏빛 물 되어 흐른 자계천 

서원 어귀에 세워져 있는 하마비.
서원 어귀에 세워져 있는 하마비.

결국 조정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른바 1498년의 무오사화다. 
김종직의 문도와 유능한 신진 사류 40여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지로 떠났다. 
그때 탁영은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정치적 도학사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조각난 시신마저 고향 마을로 들어서지를 못하고 외가인 용인에서 근 100여년을 머물다 그가 복권된 뒤에야 비로소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로 이장할 수 있었다 하니 참으로 비통하기 그지 없다.

1498년 칠월, 탁영 김일손이 참형으로 순절하던 그날, 하늘도 몸부림친 것일까. 여느 때와 달리 개울은 아침 안개로 자욱하게 짓눌렸다.
늘상 안개가 많이 내려 운계라 불려지던 곳이라 마을 사람들조차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 나절이 되자 하늘은 마치 노하기라도 한 듯 세찬 비바람이 불면서 천둥과 번개를 몰아치다 못해 기왓장이 날고 나무들이 넘어졌다. 
마을을 지키던 개울은 한순간 맑디 맑은 물빛에서 붉은 핏빛으로 돌변하고는 사흘간을 역류하며 흘러흘러 내렸다.
비명에 간 탁영을 애도라도 하려는 듯….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그날 이후 사람들은 운계를 자계(紫溪)라 불렀다고 한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뒤로 하고 지금도 유유히 흐르는 청도천에는 자신의 아호처럼 청정수같이 맑고 꼿꼿하게 살다 간 조선 초기의 선비, 탁영 김일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만 같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출처 :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글쓴이 : 이장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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