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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수로왕비릉,구지봉 탐방기(2018-11-04)

☞나의 포토갤러리/나의족보·삼현파

by 산과벗 2019. 8. 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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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수로왕비릉,구지봉 탐방기(2018-11-04)

나의 뿌리를 찿아서~~

나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곤(坤)자 항열이며, 시조(始祖)이신 수로왕(首露王)의 69대(代는70代) 손이다.  

오늘은 그 동안 한번 찿아 봐야지 마음 먹었던 나의 뿌리를 찿아 뜻 깊은 나들이 길에 나섰다.

나들이 코스로는

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구지봉(龜旨峯)

○ 창원 저산서원(楮山書院)-파시조 문정공 관(管), 명회재 문숙(文肅), 둔옹 항(伉), 묘소

청도 모암제-퇴평 서, 절효 극일 묘소-영모제-남계 맹, 탁영 일손 묘소-자계서원-동창 준손 묘소-삼족대-유현재/대유 묘소

차창 밖으로 파나로마 처럼 펼쳐지는 만산홍엽의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상쾌한 기분으로 첫번째 탕방장소인 가야국의 고도

김해 수로왕릉과 왕비릉,구지봉을 찿았다.

수로왕릉(首露王陵)

김수로왕이 잠들어 있는 곳, 수로왕릉 *
수로왕은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로 왕위에 올라 서기 48년 인도의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으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능의 경내에는 수로왕, 수로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등 여러 건물과 신도비, 공적비 등 석조물이 있다.

능 앞의 묘비는 조선 인조25년(1647)에 세운 것이며 숭선전은 고종 21년(1884)에 임금이 내린 이름이다.


왕릉 정문 숭화문


왕릉 정문앞에 세워진 수로왕릉에 대한 설명문이다.


홍살문/정문을 들어서면 홍살문이 버티고 서있다.

  홍살문은 능묘나 궁전,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물감을 칠한 나무문으로 중간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세워두었다. 경의를 표하라는 뜻으로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경모문/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출입금지 표말이 세워져 있다.


발길을 우측으로 돌려 사진의 문을 통해 들어선다.


포덕문/포덕문 뒤편에 숭안전이 있다


숭안전/가락국 2대에서 9대까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곳이다.


숭안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숭안전 앞 역대 와의 이름이 세겨진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숭선전/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숭선전/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숭선전에 대한 설명문으로 숭선전 앞에 세워져 있다.


숭선전 좌측으로 수로왕릉이 보인다.


† 납릉정문/수로왕릉 정문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수로왕릉


† 정문 좌측에서 바라본 수로왕릉


† 중수비/가락국수로왕 숭선전 납릉후릉 중수비라 새겨져 있다.


† 숭신각/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신도비각이다.


† 신도비각 설명문/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숭신각 앞에 세워져 있다.


† 전사청/춘추 제례에 필요한 제기와 제수를 보관하는 곳이다.

 

† 전사청/춘추 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만들거나 보관하는 곳이란 설명문이 세워져 있다.


† 서원청/춘추 제례에 필요한 제기와 제수를 보관하는 곳이다.


† 서원청에 대한 설명문이다


† 비원(祕苑 )으로 나가는 문이


† 비원(祕苑 )안으로 들어선 공원이다



† 쓰려진 고목/억겁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 쓰려진 고목/억겁의 세월에도 죽지않고 버티고있는 고목이다.


† 또 다른 고목/몇 백년은 되었을듯한 고목의 모습이다.


† 공원 내 고인돌/평범한 돌같은데...고인돌이란 설명이 옆에 서 있다.


† 고인돌에 대한 설명문이다.


† 또 다른 고목/몇 백년은 되었을듯한 고목의 모습이다.


† 또 다른 고목


† 또 다른 고목/너무 나이가 많아 누워버림 고목


† 낙엽쌓인 공원


† 또 다른 고목/이 또한 쓰러질듯 위태롭구나.


† 또 다른 고목/이 고목은 자세가 반듯하여 아직 몇백년은 더 버틸듯...


† 또 다른 고목/하나같이 쓰려져 가는 모습이다.


† 또 다른 고목/지 쓰려져 넘어가는 고목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비원을 우측을 시작해서 한바퀴 돌면서 좌측에서 담은 수로왕릉의 모습이다.


† 비원을 우측을 시작해서 한바퀴 돌면서 좌측 멀리서 다시 담은 왕릉의 모습이다


† 왕릉 뜰안에도 가을 색은 곱기만 하도다.




† 왕릉 관람안내문


† 가락 유물관 건물


† 가락 유물관 현판문


† 가락 유물관 내 가락사 연표/42년에 나라를 세워 562년에 신라에 합병 통합 되었다는 내용이다.


† 가락 유물관 내 청동기

당시 재료가 희귀하고 제작이 어려운 관계로 무기 등 소수만 제작 사용되었으며 일반생활 기구는 석기로 사용되었고 돌칼,돌도끼 돌 옹기구

등이 많이 출토 되었다.





† 가야의 덧널 무덤

 


† 가야의 덧널 무덤에 대한 설명이다.



† 가야의 갑옷


† 가야의 갑옷과 투구


† 가야 유물관을 관람하고 나오자 연못가 영산홍이 따사로운 햇살에 계절을 잊은듯 꽃을 피웠다.



† 연못풍경1


† 연못풍경12


† 멀리서 바라본 왕릉의 풍경이다.


† 천강육란석조상/이 조형물은 구지봉에 있었으나 일반조형물로써  사적지대 설치는 부적합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수로왕릉 뒷편 연못   뒤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 기념으로 왕릉을 배경으로 사진한장 남겼다.


† 왕릉을 나오면서 바라본 풍경이다.


† 왕릉 담벽

.

† 왕릉을 나와 돌아가면서 정문을 담은 사진이다.

왕릉 탐방시간은 약40여분 서둘러 다음 탐방지인 수로왕비릉을 향해 출발했다.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다.


† 수로왕비릉 홍살문

   홍살문은 능묘나 궁전,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물감을 칠한 나무문으로 중간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세워두었다. 경의를 표하라는 뜻으로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 구남문/수로왕비릉 정문입니다


† 수로왕비릉 정문 모습이다 안내도와 왕비릉의 설명문이 게시되어 있다.


† 수로왕비릉 안내도


† 수로왕비릉 소개문


† 수로왕비릉 정문을 들어서 바라본 모습이다.


† 파사석탑이 있는 파사각/학생들이 체험 탐방중으로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 파사석탑

수로왕비 헝황옥이 바다를 건너올때 싣고왔다는 파사섯탑...파도를 잠제워준다는 신령스려운 탑으로 원래 호계사에 있었으나

사찰이 폐사되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함.


† 파사석탑 설명문

 

† 파사각 현판문

 

† 수로왕비릉/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수로왕비릉/우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수로왕비릉 우측에서 바라본 왕비릉 앞 파사각과 주변 풍경이다.


† 수로왕비릉 우측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수로왕비릉 가까이 당겨 바라본 모습


수로왕비릉을 둘려보고 좌측 구지봉으로 발길을 옮겼다.

구지봉(龜旨峰)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편 기록에 의하면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탄강(誕降)하였고, 아도간, 유천간 등 9간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 수로왕비릉 에서 구지봉으로 가는 길이다.


 † 구지문/현판글이다.


† 구지문을 지나 약 50여m에 있는 구지봉이다.


† 구지봉에 있는 천강육란석조/수로왕릉 연못뒤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 대가야국 태조왕 탄강지지 탑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편 기록에 의하면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탄강(誕降)하였고, 아도간, 유천간 등 9간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지봉에서 구간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춤을 추며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고대 국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B.C 4세기경 남방식 지석묘가 있어 그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구지봉은 이처럼 가야 건국설화와 관련되는 유적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곳이다


† 대가야국 태조왕 탄강지지라 적혀있다.


† 입석의 의미는 모르겠으나 가을 단풍과 어울린 풍경이 멋져 카메라에 담았다.

 


† 구지봉 고인돌 설명문이다



† 고인돌 위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 세겨져 있다.


† 구지봉 고인돌


† 왕비릉 관람안내도


† 왕비릉을 나와 다른각도에서 바라본 정문 모습이다.


† 영 대왕가비/구지봉 오르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거북아..거북아..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어리라, 이 내용이 바로 구지가 이다..


† 구지봉 입구에 세워진 설명문이다.


† 구지봉 오르는 입구이다.


† 구지봉 오르는 입구에서 바라본 왕비릉 전경이다.


† 제15대 대통령 후광 김대중 고문 공적비/왕비릉 앞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 제11대 국무총리 운정 김종필 고문 공적비/왕비릉 앞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 둔포 김영준 명예회장 공적비/왕비릉 앞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수로왕릉에 이어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을 둘려보는 시간은 약 30여분 소요되었다.

한모금에 목을 추기고 다음 탐방장인 창원 대산면 유등리 저산서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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