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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김일손선생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임금께 청하는 소장

☞나의 포토갤러리/나의족보·삼현파

by 산과벗 2019. 2. 18. 17:16

본문

<차례>
1.청시소(請諡疏); 탁영 김일손선생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임금께 상소하는 글
2.재소(再疏) : 다시 상소를 올림
3.이조 판서 서능보의 의견보고(吏曹回啓 判書徐能輔)
4.의정부 영의정 남공철의 의견보고(議政府領議政獻議 南公轍)
5.좌의정 이상황의 의견보고(左議政獻議 李相璜)
6.우의정 정만석의 의견보고(右議政獻議 鄭輓錫)
7.이조 판서 서능보의 재보고(吏曹覆 啓 判書徐能輔)
8.증직하라는 임금의 교지(贈職  敎旨)
9.증직에 대해 설명한 글(贈貼旁註)
10.탁영 김일손선생에게 시호를 내리는 글(濯纓先生 諡狀)

 

 

請諡疏<狀>

탁영 김일손선생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임금께 청하는 소장



疏首幼學金相閏製疏進士金在田 三南合疏

유학 김상윤이 대표로 상소를 올리고 진사 김재전이 상소를 짓고

3남(경상,전라,충청)에서 합동으로 상소합니다.

純廟庚寅二月日(1830년 2월)

解釋 : 2005. 7. 27. 金順大


伏以崇賢獎節有國之令典勵世之要道慶尙道淸道郡故吏曹正郞臣號濯纓金馹孫及其祖故南臺持平臣號節孝金克一及其姪故正言臣號三足堂金大有三賢道學文章忠孝節義咸萃一室擧世尊仰而

엎드려 성현을 존중하고 절의를 권장함으로서 나라의 명령과 법이 서게 하고, 세인들에게 중요한 도리를 장려하게 됩니다. 경상도 청도군에 고 이조정랑을 지낸 신 탁영 김일손과 그 조부인 고 남대지평을 지낸 신 절효 김극일과 그의 조카인 고 정언을 지낸 삼족당 김대유의 3현[1]은 도학과 문장과 충효와 절의를 모두 갖추어 한 집안이 세상 사람들에게 우러러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1]三賢; 여기서 소위 삼현파의 삼현이 처음나오는 것이 아닌지?


至今熙人耳目允合於節惠之典蓋馹孫以先正臣金宗直之高弟早年登第 賜暇湖堂校讎綱目而爲遼東質正官得小學集說而來我東之有小學集說自此始焉爲 功斯文不亦大乎

지금 사람들의 귀와 눈이 시호(節惠)를 내리는 것은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개 일손은 선대의 현인(先正)인 신 김종직의 수제자로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 휴가를 얻어 독서당에 있으면서 강목의 틀린 곳을 고치고 요동의 질정관이 되어서 소학집설을 구해 와서 우리나라에 있는 소학집설은 이것으로 시작되었으니 그 글이 도움이 된 것이 또 크다고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噫當昏朝戊午以史獄身棄東市時年三十有五至今說之者莫不流涕先正臣文正公宋時烈序遺集曰先生生乎程朱之後與寒暄一蠹諸老先生 磨礱浸灌 則其擇之精而 無駁先賢臣南孝溫曰先生以希世之姿 有廟堂之器論議之正識見之明可 此於靑天白日先賢臣曹植曰濯纓生有凌霜之節死有通天之寃觀 此先正先賢之言而 馹孫之姿稟節行槩可見矣

아! 당시 어두운 조정의 무오년의 사화로서 신체가 동쪽 시장마당에 내버려 졌을 때 나이는 35세였고 지금 이를 말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대의 현인인 문정공 송시열이 서문을 쓴 유집에서 이르기를 “선생이 태어나서 정자와 주자의 뒤를 이었고 한훤당(김굉필) 정일두(정여창) 등 여러 선생과 더불어 서로 강론하고 익히어, 그 도리를 가리는 것이 면밀하여 결함이 없었다.”고 하였고, 선현이신 신 남효온이 말하기를 “선생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자태를 가졌고 조정의 그릇이며 논의하는데 있어서는 바르게 알고 보는 것이 분명하니 가히 이는 하늘에 뜬 해와 같다.”라고 했으며, 선현이신 신 조식이 말하기를 “공은 살아서 서릿발을 능가하는 절개가 있고 죽어서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다.” 하였으니 이러한 선대의 현인들의 말씀을 보아 일손의 자태와 품성과 절의와 행동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亦粤持平臣克一幼有至行事親極孝母疽吮血父病嘗痢前後丁憂廬于墓側晨夕號哭若在始殯誠感殊類至有虎馴之異事聞 光廟特命旌閭事在 三綱行實而一 自親沒之後 絶意世事潛心性理之學行誼日彰鄕鄰宗黨莫不黨化及卒 鄕人私諡曰節孝先生先正臣文忠公金宗直嘗稱曰其純孝實行可與曾黔頡頑 千載就此觀之克一可謂盡人倫之至而 樹風聲於百代者也

또한 옛날 지평을 지낸 신 극일이 어렸을 때 부모를 모시는 일을 행함에 있어 지극한 효도가 있어서 모친이 등창을 앓자 입으로 피를 빨아 내었고 부친이 병이 나자 변의 맛을 보았으며, 전후의 부모의 상사 때에 묘소옆에 상막을 짓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는 것이 마치 처음 염을 할 때와 같이 정성스럽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유별났으며 호랑이도 이에 따랐다는 특이한 일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광해군께서 특별히 명하여 정려를 세우고 삼강행실의 하나로서 기록하였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세상의 일에는 뜻을 끊어버리고 성리학에 마음을 몰두하여 품행과 도의가 날로 빛나 마을과 이웃과 친척들이 같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돌아가시자 마을 사람들이 개인적인 시호를 내리기를 절효선생이라 하였습니다. 선대의 현인인 신 문정공 김종직은 일찍이 칭하여 말하기를 그 순수한 효도를 실행한 것은 더욱 크고 완고하여 영원히 이를 우러러 볼 수 있으니 극일은 인륜을 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백대에 걸쳐서 나무바람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至若正言臣大有孝友出天學問淵博 中廟改玉之初始除蔭職旋擢賢良科召以諫官輒辭不就固窮自守樂以終年曹植又言辯局宏深勿勿乎

정언을 지낸 신 대유에 이르러서는 효도와 우애를 하늘이 내었고, 학문이 깊고 해박하여 중종반정 후 초기에 음직에 제수되어 현량과에 뽑히어 간관[1]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매우 곤궁하였으나 스스로 늙을 때 까지 즐겁게 보내었습니다. 조식이 또 말하기를 세상의 판국을 다스릴 넓고 깊은 생각을 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간관(諫官); 조선 시대에 사간원과 사헌부에 속하여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백관(百官)의 비행을 규탄하던 벼슬


其仁言論激昻僩僩乎其義容容大雅討論經史之弘儒仡仡偉表射御不違之豪士好善而獨善弘濟而自濟至謂之遯世无悶則儒賢贊美之盛於斯至矣 

그 인자함에도 자기생각을 말씀하실 때는 격앙되어 당당하였고 그 도리를 지키는 몸가짐은 단아했으며, 학식있는 유학자들과 경서와 사기를 토론할 때는 꼿꼿한 자세로 권위가 있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射御)에도 날쌘 사람들(豪士)에 뒤지지 않았으며, 선한 것을 좋아하며 처신을 온전히 하여 사람들을 널리 구제하고(弘濟), 스스로를 구제하여 세상에서 물러나 번민이 없게 되었으니, 유학자인 선현들이 그 성대함을 찬미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夫人門三賢在古唯罕眞所謂德不孤而世濟其美者也逮我 顯廟朝正郞臣馹孫 贈應敎並 宣額餟<醊?>享於淸道紫溪書院紫溪則三賢臣桑梓之鄕而從多士之請也

무릇 사람의 가문에 3사람의 현인이 있었다는 것은 옛부터 아주 드물었고, 진실로 소위 덕이 외따로 떨어지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건져내었습니다. 우리 현종임금(1659~1674)에 이르러 정랑이었던 신 일손이 응교에 증직되고 더불어 청도의 자계서원이 선액되어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계는 3현들이 자란 고향으로서 이를 따르는 많은 선비들의 간청이 있었습니다.


其 宣額文若曰蔚爲國器夏瑚魯璠正氣不泯撑柱獸且格來衛兵原 此克一之謂也 有若曰賢良策士科善類是援與奪何頓時有亨屯此大有之謂也猗我 祖宗朝襃獎三賢臣之擧非不盛矣

그 선액된 글은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나라의 그릇이 된 것이 아름답고, 하나라의 호(瑚)나 노나라의 번(璠;보석이름)과 같이 바른 기품이 없어지지 않고 떠 받혀져 짐승조차도 와서 묘소(原)를 지켜 주었다고 하니 이는 극일을 말함이고, 또 말하기를 어질고 착한 책사로서 과거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으나 <관직을> 주었다가 빼앗아 가서 부셔져 버려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유를 말합입니다. 아름다운 우리 조정에서 3현을 포창한 일은 성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而馹孫無嗣伯兄直提學臣駿孫第二子縣監臣大壯奉其祀而子姓零替士氣浸降未遑 上徹式至于今矣

일손은 후사가 없어 큰 형님이신 직제학 신 준손의 둘째 아들인 현감 신 대장이 그 제사를 떠받들었으나, 후손이 시들해지고 선비의 기풍이 내려앉아 겨를이 없었으나 임금의 통철하신 예식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噫戊午名賢皆蒙加 贈易名之 恩而獨以馹孫卓異之蹟尙稽節惠之典者豈非 朝家之關典而士林之齎恨乎

아! 무오사화 때 명현들은 모두 이름을 새롭게 하는(복권하여) 은혜를 입었으나, 유독 일손의 탁월하고 뛰어난 업적이 숭고하게 쌓아 시호(節惠)를 내리시는 것이 어찌 조정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으며 사림의 한을 푸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方今 睿聰臨下凡係儒賢之事褒隆備至臣等聞風遐遠欣躍鼓舞裏足千里齋聲號籲於 蹕路之前伏願

방금 전하께서 이를 들으시고 챙기시어 모든 유림의 성현들의 일에 관계된 것을 상 주시고 높이실 것을 준비하시니, 신 등은 멀리서 바람결에 이를 듣고 북을 치고 춤을 출 정도로 기뻐서 천리나 떨어진 곳에서 재계하고 소리쳐 부르며, 전하의 수레앞에 엎드려 원하옵니다.


禽明俯垂鑑諒亟 命攸司上項金馹孫特施加 贈節惠之典金克一金大有一體施以加 贈易名之 恩以彰 國家崇賢獎節之德俾伸多積年抑鬱之忱事伏蒙 睿恩之至

짐승(?)들로 분명히 굽어 살피어 거울처럼 헤아리시고 유사들에게 명하시어 위의 김일손에게 특별히 베풀어 시호(節惠)를 내리시고, 김극일과 김대유도 함께 이름을 새롭게 하여 주시는 은혜로 표창하시어, 나라에서 성현을 숭상하며 절의있는 덕을 권장하고 더욱 넓히시어,  여러 해 동안의 억울한 마음을 정성들여 엎드려 비오니 전하의 은혜가 이르도록 하소서.


再疏

다시 상소를 올림


疏首星州幼學李浚 製疏上同

대표로 상소를 올리는 사람은 성주에 사는 유학 이준이고 상소를 지은 사람은 위와 같음.

○同年八月日

같은 해(1830년) 8월


伏以崇賢獎節有 國之令典貤爵 褒諡勵世之要道 慶尙道淸道郡故吏曹正郞 臣金馹孫號濯纓卽 成廟朝名臣也 其祖故南臺持平 臣金克一 稱節孝其從子故正言臣金大有稱三足堂俱以道學文章忠孝節義爲百世之師表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현을 숭상하고 절의를 장려하는 것이 나라의 명령과 법을 서게 하오니 작위를 내리시고 시호를 내려 포창하시는 것은 권장해야할 세상의 중요한 도리입니다. 경상도 청도군에 예전의 이조정랑 이었던 신 김일손은 호(號)가 탁영으로서 성종임금 때의 명신이었습니다. 그 조부는 옛날 남대지평을 지낸 신 김극일로서 절효라 칭하였습니다. 그의 조카(從子)는 예전에 정언을 지낸 신 김대유로서 삼족당이라 칭하고 있으며 도학과 문장과 충효 및 절의로서 영원히 모범이 될만한 입니다.


享一之堂俎豆今道州紫溪書院是耳若三賢臣卓立之行尙未蒙加 贈易名之 恩者豈不爲 朝家之關典乎 臣請據實而條陳之

이 들은 다 같이 지금 도주(현 청도)의 자계서원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만일 이들 3현의 신 들을 특별히 세워주시고 숭상하여 덮어버리지 말고, 이름을 새롭게 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어찌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실상에 근거하여 그들의 행적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噫馹孫年十七遊文忠公臣金宗直之門餘文敬公臣金宏弼 文獻公臣鄭汝昌爲道義之交伉勵奮發以遠大及夫大闡衆望蔚然 在玉堂六七年史筆直截動法春秋應 旨撰四十八詠跋譪然有納牖之意懇懇乎玩勿喪志衣戒而至鄭汝昌釋褐之日乃曰代我掌史者此人仍薦翰苑代之此可見淵源之正也

아! 일손은 나이 17세에 문충공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문경공 신 김굉필과 문헌공 신 정여창과 같이 도의로서 사귀면서 서로가 격려하고 분발하여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문과에 급제(大闡)하고 여러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홍문관(玉堂)에 있던 6,7년 동안(1487년 1월부터) 역사를 솔직하게 기록하였고, 춘추관에서 지은 48영시의 발문(1493년)은 화기롭고 온화하여(譪然) 그 뜻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워 죽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에 의해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여창은 <공이> 처음 벼슬길(釋褐)에 오르던 날에 말하기를 “나를 대신해서 역사기록을 담당할 사람으로서 이 사람(일손)을 한림원에 추천한다.”고 하였으니 이로서 그 근원이 옳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爲遼東質正官得小學集說而來我東之有集說自此始其於斯文爲功甚大嘗隷綱目校讎之役論議正直出乎等夷紫陽筆意煥然益明是以馹孫又配享於朱文公公忠道木川縣道東書院矣 

요동에 질정관으로 갔을 때에는 소학집설을 구해와 우리나라에 집설이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글은 영향이 아주 커서 일찍이 강목과 비교하여 오류를 수정하게 되어 논의를 바르게 할 수 있게 되었고, 같은 연배(等夷)인 자양(紫陽의미?)글의 뜻이 빛나고 더욱 분명해져, 이로서 일손을 주나라 문공과 같이 배향하게 되었으니 충청도 목천현 도동서원입니다.


先正臣宋時烈迺於遺集弁卷之文以爲先生生乎程朱之後與寒暄一蠹諸老先生 磨礱浸灌 擇之精而 無駁文正之於濯纓推詡之如彼其懇摯則馹孫之節義道學無復餘蘊而其他先賢臣之語多有 折節相下者號南冥曹植曰先生生有凌霜之節死有通天之寃 號秋江南孝溫曰先生以 希世之姿有廟堂之器 又曰濯纓之節義如靑天白日就此而見之則節義道學之造詣槩可知矣

이전에 신 송시열이 마침 유집의 서문을 쓰면서 “선생이 태어나서 정자와 주자의 뒤를 잇게 되었고, 한훤(김굉필,1454~1504)과 일두(정여창,1450~1504)와 같은 여러 노선생과 같이 서로 강론하고 익히어, 도리를 가리는 것이 면밀하여 결함이 없었다.”고 하였고, 문정공(송시열)이 탁영을 추천하여 자랑한 것은 그의 정성이 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즉 일손의 절의와 도학은 다시는 남겨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외 선현들의 말 중에는 서로 절의를 굽힌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호가 남명인 조식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생은 살아서 서릿발을 능가하는 절개가 있고 죽어서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다.” 하였고, 호가 추강인 남효온은 말하기를“선생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자태를 가졌고 조정의 그릇이다.” 또 “탁영의 절의는 하늘에 뜬 해와 같다.”고 했으니 이로 보건대 절의와 도학의 조예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鳴呼戊午群小黨 惡之禍禍慘東市至今思之莫不氣塞而哽咽尙忍言哉尙忍言哉粤克一生有至行母疽吮血父病嘗痢廬墓號哭誠感殊類至有虎馴之異事聞 光廟特命旌閭昭載干三 綱行實及卒鄕人私諡曰節孝先生先金宗直嘗稱以純孝實行可與曾黔頡頑 千載就

아! 무오년의 군소 악당들이 화를 불러 일으켜 그 화가 동쪽 시장마당을 참혹하게 하였고, 지금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말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말을 참고 있습니다. 옛날 극일 선생은 지극한 행의가 있어서 모친이 등창을 앓자 입으로 피를 빨아 내었고, 부친이 병이 나자 변의 맛을 보았으며, 묘소옆에 상막을 짓고 곡을 하는 정성과 감동이 유별나서 호랑이도 이에 따랐다는 특이한 일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광해군께서 특별히 명하여 정려를 세우고 삼강행실에 소상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돌아가시자 마을 사람들이 개인적인 시호를 내리기를 절효선생이라 하였습니다. 이전에 김종직은 일찍이 칭하여 말하기를 순수한 효도를 실행한 것은 더욱 크고 완고하여 영원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至若大有孝友出天學問淵博 中廟改玉之初 經術才行爲文正公臣趙光祖之所推詡薦拜持平不就旋擢賢良科 召以諫官又辭不就固窮自守樂而終年曹植又辦局宏深勿勿乎 其仁言論激昻僩僩乎其義好善而獨善弘濟而自濟至謂遯世无悶儒賢贊美斯至矣

대유에 이르러서는 효도와 우애를 하늘이 내었고, 학문이 깊고 해박하여, 중종반정 후 초기에 경술과 재주가 뛰어나 문정공 신 조광조가 자랑스럽게 추천하여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현량과에 뽑히어 간관(諫官)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매우 곤궁하였으나 스스로 늙을 때 까지 즐겁게 보내었습니다. 조식이 또 말하기를 세상의 판국을 다스릴 넓고 깊은 생각을 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인자함에도 자기생각을 말씀하실 때는 격앙되어 당당하였고 그 도리로서는 선한 것을 좋아하며 처신을 온전히 하여 사람들을 널리 구제하고(弘濟), 스스로를 구제하여 세상에서 물러나 번민이 없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이니, 유학자인 선현들이 그 성대함을 찬미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噫一門三賢在古唯罕眞所謂德不孤而世濟其美者也逮我 顯廟朝吏曹正郞臣馹孫 贈都承旨兼直提學持平臣克一 贈執義正言臣大有 贈應敎並 賜院額

아! 한 가문에 3사람의 현인이 있었다는 것은 옛 부터 아주 드물었고, 진실로 소위 덕이 외따로 떨어지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건져내었습니다. 우리 현종임금(1659~1674)에 이르러 정랑이었던 신 일손이 도승지겸 직제학에 증직되고, 지평이었던 신 극일은 집의로 증직되었고, 전언이었던 대유는 응교로 증직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서원의 액호가 내려졌습니다.


其 宣額文若曰正氣不泯撑柱乾坤此馹孫之謂也 行感神明化及鷄豚此克一謂也 賢良策士善類是援與奪何預時有亨屯此大有之謂也 猗我 祖宗朝襃獎三賢臣之擧非不盛矣

그 선액의 글귀는 대략 바른 기품이 사라지지 않고 하늘과 땅을 떠  받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일손에게 하는 말이며, 행의가 신과 가축까지도 감동시켰다고 하는 것은 극일을 말하는 것이며, 어질고 착한 책사로서 과거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으나 <관직을> 주었다가 빼앗아 가버리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유를 말합입니다. 아름다운 우리 조정에서 3현을 포창한 일은 성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竊惟戊午諸賢皆蒙節惠之典而獨以馹孫卓卓之節炳炳之蹟尙稽易名之 恩者實爲士林之齎恨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 때의 여러 선현 모두 시호(節惠)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유독 일손의 탁월하고 절의와 빛나는 업적이 숭고하게 쌓였으니 이름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실로 사림의 한을 푸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且馹孫無嗣伯兄直提學臣駿孫第二子縣監臣大壯奉其祀而子姓零替士氣浸降迄未 上徹矣

또 일손은 후사가 없어 큰형인 직제학 신 준손의 둘째아들인 현감 신 대장이 그 제사를 지내었으나, 후손이 시들해지고 선비의 기풍이 내려앉아 이지경이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통철하여 주시옵소서.


今春仰籲於 蹕路之前前特蒙 達下稟處之 令而尙此寥寥遠道輿情不勝紆苑玆 又齋聲號籲於 法駕之前伏願 聖明俯垂鑑諒亟 命攸司金馹孫特施超 贈節惠之典金克一金大有亦施以加 贈易名之 恩俾伸多士積年抑鬱之忱事

금년 봄에 전하의 수레앞에서 우러러 부르짖어 말씀드렸으니 특별히 전하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도록(達下) 명하여 주시면, 오히려 이 쓸쓸하고도 먼 우리 도의 정서(輿情=情緖)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이 동산을 감돌아 갈 것입니다. 이에 또 재계하고 목소리 높여 전하의 수레앞에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의 밝은 지혜(聖明)로 굽어 살피어 거울처럼 헤아리시고 유사들에게 명하시어 김일손에게 특별히 베풀어 시호(節惠)를 내리시고, 김극일과 김대유도 함께 이름을 새롭게 하여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더욱 넓히시옵소서. 많은 선비들이 여러 해 동안 억울했던 마음을 정성들여 비옵니다.




吏曹回啓 判書徐能輔

이조의 의견보고 (판서 서능보)

金馹孫危行直節備著於前後儒賢之稱述至今炳郎照人耳目褒贈之典極其崇顯夫孰曰不可而旣與死節人稍異則入座正卿加 贈事係特典臣曹有難擅便議于大臣處之何如

김일손은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고상하게 행동하였으며(危行) 곧은 절개가 두드러졌다고 그를 전후한 유학자나 성현들이 말해왔습니다. 지금 이것이 밝게 빛나 사람들의 귀와 눈에 비치고 있습니다. 이를 포창하고 증직하여 그를 높이고 드러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말하기를 이미 같은 일로 순절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 불가하다고 말하나, 정경(正卿)의 반열에 들어갔으니 특별히 은전을 베푸는 것이 신 이조의 개인 생각(擅便)이나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議政府領議政獻議 南公轍

의정부 영의정의 의견보고(남공철)

金馹孫在燕山朝慘被史禍積忤群小後人之尙論有在然而師友淵源百世可徵文章氣義照耀至今眞希世之姿卓異之人也加 贈正卿施以節惠允合 聖朝崇儒獎義之道而愚見未敢自信伏惟  上裁

김일손은 연산군 때 사화의 참혹한 피해를 입은 것은 군소배들이 벌린 농간에 의해서였다고 후인들이 평가에(尙論) 그렇다고 나와 있고, 스승과 친구관계의 연원이 백세의 징표가 될 수 있으며 문장과 기개와 의리가 밝게 비추어 지금 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탁월한 사람입니다. 이러하오니 정경(正卿)을 가하여 증직하고 시호(節惠)를 윤허하여 내려주시는 것이, 우리 조정이 유학을 장려하고 도의를 장려하는 데에 합당하다고 사료되오니 어리석은 생각으로 감히 자신있게 엎드려 전하의 재가를 생각하옵니다(바라옵니다).


左議政獻議 李相璜

좌의정의 의견보고(이상황)

金馹孫其死則人至今悲之其文章氣義道義之盛則人又至今誦慕不已况師友之間淵源有自與文敬文獻兩先生正麗澤相契有功斯文今此士林齋籲知於出公議加 贈許諡之爲 朝家崇獎之政愚見未無異同於領相然事係特典伏惟  上裁

김일손의 그 죽음을 사람들이 지금 슬퍼하고 있으며, 그 문장과 기개와 도리가 성대하여 사람들이 또한 지금 이를 말하며 숭모하고 있는 것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물며 스승과 친구지간의 연원이 그에게 있어서 문경(김굉필)과 문헌(정여창)의 두 선생과 더불어 진실로 서로 도와 학문과 품성을 닦고(麗澤) 서로 어울려서 공을 이룬 유학자(斯文)들입니다. 지금 이 사림에서 삼가 부르짖으며 공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있으니, 품계를 올리고 시호를 내려 주시어 우리 조정이 이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정치가 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저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영의정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하여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전하의 재가를 생각하옵니다(바라옵니다).


右議政獻議 鄭輓錫

우의정의 의견 보고(정만석)

金馹孫道學之醇正文章之灝噩冠冕當世膾炙中州此先賢所稱宇宙間間氣而卓節竟罹奇禍其死也 絶悲士林齎恨至今未已加 贈節惠儘合慰幽獎義之道而事係特例未敢質對伏惟 上裁

김일손의 도학은 변하지 아니하며 바르고, 문장은 아주 넓고 엄숙하며, 벼슬은 당시 세상의 중앙에서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습니다(膾炙). 이 선현을 소위 우주사이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드문 뛰어난 기품(間氣)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고, 탁월한 절의가 다하여 이상한 사화에 결려들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애절하고 비통해하는 사림들은 한이 맺혀 지금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호를 내리시는 것이 그를 위로하고 의를 장려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하여 특례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어떤가 하고 여쭈오며 엎드려 전하의 재가를 생각하옵니다(바라옵니다).



吏曹覆 啓 判書徐能輔

이조에서 다시 보고함(판서서능보)

贈都承旨金馹孫加 贈事議 于大臣處之事 允下敎郎官收議 于諸大臣則議政府領議政南公轍以爲金馹孫在燕山朝慘被史禍專由於積忤群小後人之尙論有在蓋其師友淵源百世可徵文章氣義照耀至今眞希世之姿卓異之人也 加 贈正卿施以節惠允合 聖朝崇儒獎義之道而愚見未敢自信伏惟  上裁云


도승지를 증직받은(1661년) 김일손에게 품계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 대신들이 결정하여 하교한 것을 낭관(이조정랑)이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종합하였습니다. 즉 의정부 영의정 남공철은 ‘김일손이 연산조에 참혹한 사화의 피해를 입은 것은 오로지 군소배들이 벌린 농간에 연유하였고 후인들이 평가에(尙論) 그렇다고 나와 있고, 스승과 친구관계의 연원이 백세의 징표가 될 수 있으며 문장과 기개와 의리가 밝게 비추어, 지금 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탁월한 사람이니 정경(正卿)을 가하여 증직하고 시호(節惠)를 윤허하여 내려주시는 것이, 우리 조정이 유학을 장려하고 도의를 장려하는 데에 합당하다고 사료되오니 어리석은 생각으로 감히 자신있게 엎드려 전하의 재가를 바랍니다.’라고 하였고,


議政府左議政李相璜以爲金馹孫其死則人至今悲之其文章氣節道義之盛則人又至今誦慕不已况師友之間淵源有自與文敬文獻兩先正麗澤相契有功斯文今此士林齋籲知出公議加 贈許諡之爲 朝家崇獎之政愚見未無異同於領相然事係特典伏惟  上裁云

의정부 좌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로는 ‘김일손의 그 죽음을 사람들이 지금 슬퍼하고 있으며, 그 문장과 기개와 도리가 성대하여 사람들이 또한 지금 이를 말하며 숭모하고 있는 것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물며 스승과 친구지간의 연원이 그에게 있어서 문경(김굉필)과 문헌(정여창)의 두 선생과 더불어 진실로 서로 도와 학문과 품성을 닦고(麗澤) 서로 어울려서 공을 이룬 유학자(斯文)들입니다. 지금 이 사림에서 삼가 부르짖으며 공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있으니, 품계를 올리고 시호를 내려 주시어 우리 조정이 이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정치가 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저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영의정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하여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전하의 재가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였고,


議政府右議政 鄭輓錫以爲金馹孫道義之醇正文章之灝噩冠冕當世膾炙中州此先賢所稱宇宙間間氣而卓節竟罹奇禍其死也 絶悲士林齎恨至今未已加 贈節惠儘合慰幽獎義之道而事係特例未敢質對伏惟 上裁云矣 大臣之議如此 上裁何如傳曰允

의정부 우의정 정만석이 말하기를 ‘김일손의 도의는 변하지 아니하며 바르고, 문장은 아주 넓고 엄숙하며, 벼슬은 당시 세상의 중앙에서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습니다(膾炙). 이 선현을 소위 우주사이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드문 뛰어난 기품(間氣)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고, 탁월한 절의가 다하여 이상한 사화에 결려들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애절하고 비통해하는 사림들은 한이 맺혀 지금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호를 내리시는 것이 그를 위로하고 의를 장려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하여 특례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어떤가 하고 여쭈오며 엎드려 전하의 재가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은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 하였습니다.



贈職  敎旨

증직하라는 임금의 교지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行 通訓大夫吏曹正郞金馹孫 贈資憲大夫吏曺判書兼知 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者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행 통훈대부를 증직받은(1661년) 이조정랑 김일손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증직한다.


贈貼旁註

증직에 대해 설명한 글

學義之醇正文章之灝噩冠冕當世膾炙中州卓節竟罹奇禍其死也 絶悲士林齎恨至今未已加 贈正卿事承 傳

학식과 도의가 변하지 아니하며 바르고, 문장이 아주 넓고 엄숙하며, 벼슬은 당시 세상의 중앙에서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으나(膾炙) 탁월한 절의가 다하여 이상한 사화에 결려들어 죽임을 당했다. 애절하고 비통해하는 사림들은 한이 맺혀 지금 그치지 않으니 정경(正卿)에 증직하는 것을 승인하니 이를 전하라.


<濯纓先生(탁영선생)>諡狀(시장)

탁영 김선생에게 시호를 내리는 글(휘 일손)


原文 : 1924(甲子)년 중간 탁영선생 文集卷之七

解釋 : 2005. 7. 20. 金順大


吏曹參判 趙寅永撰


金公馹孫 戊午寃死之首也 尤庵宋先生時烈 序其集 畧曰濯纓先生 以文章節行 冠冕一時 不幸遭逢燕山 身棄東市 禍延士林 實崇於吊義帝一篇 未知畢齋之作 此文何意 先生之錄是文 又何見歟 皆非後學 所敢窺測 豈定哀徵 其辭事者 非聖人達權 大用則終 不可師法 而秉史筆者 惟直是職歟 先生 宇宙間間氣也 其生也 非偶然 其死也豈人所能哉

김공 일손은 무오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 중에 첫째이다. 우암 송선생 시열이 그(일손)의 문집에 서문을 쓰면서 개략적으로 말하기를 ‘탁영선생은 문장과 절개가 뛰어나 한 때에 벼슬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연산군을 만나 몸이 동쪽 장터에서 버리심을 당하였고, 그 화가 사림들에게 미치었으니 실로 조의제문 한편이 원인이 되었다. 잘 모르겠지만 점필재(김종직)가 이 글을 지은 것이 어떤 뜻이며, 선생(일손)이 이 글을 기록한 것은 어떤 의미인지 다 후학이 감히 생각하여 예측할 수 없으나, 옛날 노나라 정공과 애공의 일들을 모아서 공자가 춘추에 논술한 바와 같이, 성인들이 권력에 대한 것을 크게 이해하지 않으면 끝내 본받을(師法) 수 없으나, 오직 역사를 맡은 사관이 오로지 바르게 쓰는 것이 그 직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우주 사이에 뛰어난 기품이었으니, 그 나신 것이 우연하지 않고 그 돌아가신 것도 어찌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이겠는가.’하였다.


噫斯言 其盡之矣 雖然自公昭洗之後旣 貤贈之 又俎豆之 所以爲崇報者靡有憾矣 惟諡典 未及焉此 聖朝之缺事而 學士大夫之恥也

아! 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공의 누명이 분명히 벗겨진 이후로 이미 증직을 하였고 또 제사를 지내니 우러러 받들어 보답하는데 에는 유감이 없다고 하겠으나 오직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우리 조정의 결례요 사대부의 수치이다.


上之三十年庚寅秋 三道儒生李浚等 上言 言之事下攸司 吏曹判書臣徐能輔 請議大臣 欲重其體也 於是 領議政臣南公轍 以爲金馹孫 慘被史禍而師友淵源 百世可 徵 文章氣義 照耀至今加 贈正卿施以 節惠 允合崇儒獎義之道 云而 左議政臣李相璜 右議政臣鄭晩錫 議略同 上允之 蓋公歿之三百三十有餘年矣 公於 中廟改玉之初 首蒙復爵 顯廟朝 以筵臣言特 贈都承旨 至是加 贈吏曹判書兼銜如例

현재 임금(순조) 30년 경인(1830)년 가을에 3도(경상,전라,충청) 유생 이준 등이 상소를 올려, 그 글이 해당관청에 올라가 이조판서인 신 서능보[1]가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한 것은 그 체제가 중요해서이다. 이에 영의정 신 남공철[2]이 말하기를 김일손이 사화에 참혹한 피해를 입었으나 스승과 친구에 대한 근원은 백세에 증거가 될 만 하고, 문장에서의 기개와 도리는 지금까지 밝게 빛나니, 정경으로 증직하고 시호(節惠)를 내리는 것이 유학을 받들고 의로움을 장려하는 도리에 마땅하다 하였다. 좌의정 신 이상황[3]과 우의정 신 정만석[4]의 의견이 대략 같으므로 임금이 허락하셨다. 대략 공이 별세한지 330여년이 되었다. 중종반정의 초기에 맨 먼저 관작을 회복하셨고 현종 때에 연신[5]의 말에 의해 도승지를 특별히 내렸으며 지금에 이르러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겸직도 이전의 예와 같이 하였다.

[1]서능보(徐能輔, 1769~18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치량(穉良). 판서 유경(有慶)의 아들이다. 1828년 이조판서에 승진하였다.

[2]남공철(南公轍, 1760~1840). 조선 후기 문장가·정치가. 본관은 의령.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 서울출신. 아버지는 대제학 유용(有容)이다. 1833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고려명신전 高麗名臣傳》, 자편의 시문집으로 《귀은당집 歸恩堂集》·《금릉집》·《영옹속고 穎翁續藁》·《영옹재속고 穎翁再續藁》·《영은문집 瀛隱文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3]이상황(李相璜, 1763~18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옥(周玉), 호는 동어(桐漁) 또는 현포(玄圃).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성모(柳聖模)의 딸이다. 1824년 좌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동어집》·《해영일기 海營日記》가 있다.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4]정만석(鄭晩錫, 1758~18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 지중추부사 기안(基安)의 아들이다. 1829년 우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관서신미록》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5]경연(經筵); 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 및 왕도(王道)에 관하여 강론하게 하던 일. 연신(筵臣)은 이곳에서 일하던 신하


公 字季雲 系出駕洛國王 在新羅大角干庾信 以功業 大顯而高麗之季 有諱管 仕至版圖判書 於公 爲六世祖也 曾祖諱湑 縣監 是生節孝先生諱克一 薦拜持平 有至孝事載邑誌 考諱孟 文科執義 贈吏曹參判

공의 자는 계운이고 가락국왕의 후손으로서 신라에 대각간 유신이 있어서 공로로서 크게 나타나고 고려말엽에 휘관이 계셨으니 벼슬이 판도판서인데 공에게는 6세조이다. 증조인 휘서는 현감이니 이 분이 절효선생 휘극일을 낳아 지평에 임명되고 지극한 효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읍지에 기재되었으며 아버지 휘맹은 문과에 급제하고 집의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을 증직받았다.


公以天順甲申生 未弱冠聞佔畢齋金先生宗直 居憂密陽 與仲氏翰林公驥孫 往從之 得聞學之方 而所磨礱而浸灌者 卽惟寒暄金先生宏弼 一蠹鄭先生汝昌也 方是時我 成宗大王 尊尙儒術 作興人材 上自朝廷 至于鄕黨 韋布彬彬 多宏博雅飭之士 號稱 國朝盛際而 裒然爲衆論所推

공은 천순 갑신(1464)년에 태어나시고 약관(20세)이 못되어 점필재 김선생 종직이 밀양에 살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둘째 형님인 한림공 기손과 같이 함께 가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는데, 서로 갈고 닦아 친해진 분은 즉 한훤 김선생 굉필과 일두 정선생 여창이다. 이 때에 우리 성종대왕이 유교를 숭상하고 인재를 많이 키워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향당에 까지 이르러, 누추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韋布) 빛나게 되고 성품이 단아하고 조심스러운 선비가 많아져서 나라와 조정이 성대한 때라 일컬었으며, 이러한 사람이 모여드니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甫二十三 中生員第一 進士第二 其冬 擢文科第二 公之夙就 由此可知 明年 出補晋州學官時 仲氏 乞養監昌寧縣 公爲便省母計也

겨우 23세 때에 생원시에 1등하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그 해 겨울에 문과시험에 2등으로 뽑혔으니 공의 숙성함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이듬해에 진주학관에 보선되었고, 그때 작은 형님(기손)은 창녕현감으로 나가니 공은 어머니 봉양하기에 편리해서 이다.


戊申病辭 己酉以非罪幽金寧旋赦 召爲遼東質正官 赴京師 辛亥 又朝元正 由龍驤司正 選隷綱目校讎 癸丑春奉 旨頒論嶺南又 賜暇湖堂 而前後踐履 今雖未得 其月日之詳 大槩在翰林 最久歷遍三司而末職天官郎也

무신(1488)년에 病으로 사직하였고 기유(1489)년에 죄를 뒤집어쓰고 김해에 유폐되었다가 사면되자 부름을 받고 요동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 서울(남경)에 다녀왔다. 신해(1491)년에 또 명나라에 새해 축하사절로 갔다가 용양사정을 거쳐 강목 교정관에 선임되고, 계축(1493)년 봄에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영남의 민심을 알아보고 휴가를 얻어 독서당(湖堂)에 있었다. 전후에 지나온 이력은 지금 비록 그 날짜를 상세하게 알 수 없으나 대개는 한림에 오래 머물렀고 삼사를 두루 거쳤으나 이조랑에 오르지 못하였다.


歲戊午 公新除內艱 養疾於咸陽之鄕廬而 史獄起 始爲公獻納 疏論李克墩成俊 互相傾軋 將成牛李之黨 曁修 成宗實錄 克墩 管史事 見公史草 書其穢行甚悉 且載 世祖朝秘事 欲因此爲修隙地 議于摠裁官魚公世謙魚公 愕然不應之 乃與柳子光 謀子光 陰險樂禍者也 視以奇貨 相與慫慂 於尹弼商等 告公 以誣 先王 激主怒

무오(1498)년에 公이 모친상(1496년)을 마치고 함양의 고향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는데 사화가 일어났다. 처음 공이 헌납이 되자 이극돈[1]과 성준[2]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우이(牛李)[3]와 같은 당을 만들겠다고 상소를 올려 논쟁하고, 이어 성종실록을 편수하였다. 극돈이 사사(史事)를 주관하게 되자 공이 사초에 <극돈의> 더럽고 부도덕한 행실을 전부 쓰고 세조때의 비밀을 쓴 것을 보고, 이것을 기화로 하여 결점을 메워보려고 총재관 어공세겸[4]에게 의논했다. 어공이 놀래기만 하고 응해주지 않으므로 이에 유자광과 같이 모의했다. 자광은 음험하고 화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이라. 이것을 기화로 보고 서로 윤필상[5] 등을 달래어 공이 선왕(성종)을 무고하였다고 고하여 임금의 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1]이극돈(李克墩, 1435~150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2]성준(成俊, 1436~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시좌(時佐). 참판 순조(順祖)의 아들이다.

[3]우이(牛李)의 당;  당(唐)나라의 헌종(憲宗)에서 선종(宣宗) 초에 이르기까지 과거 출신의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이 당을 지어 귀족출신의 이덕유(李德裕) 등과 싸운 것을 말한다.

[4]어세겸(魚世謙, 1430~150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 판중추부사 효첨(孝瞻)의 아들이며, 우참찬 세공(世恭)의 형, 좌의정 박은(朴訔)의 외손이다.

[5]윤필상(尹弼商, 1427~150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탕좌(湯佐).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후예로 아버지는 경(坰)이며, 어머니는 이목(李霂)의 딸이다.


時 燕山 政荒 性猜暴 尤惡文士 恩因事一逞 遂令金吾郞 馳傳往拿 公鞫之而 別遣掖隷 察道中遲速云

이때에 연산이 정치에는 거칠고 성격이 의심하고 횡포하였고 더욱 선비를 미워하여, 이 일로서 한번 보복을 하겠다고 하고 드디어 금오랑에게 명령을 내려 공을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고, 한편 궁중의 하인(掖隷)을 보내어 오는 길 중에 빨리 오는지 늦게 오는지를 살피라고 하였다.


今以野乘之雜出者 考之公 爰辭 有曰貴人權氏事聞於貴人之姪許磐云有曰請復 昭陵事欲 聖朝行仁政云公 嘗爲忠淸都事 上疏請復 昭陵故也 有曰後殿曲事 昔在西湖也 茂豊副正摠 攜琴相訪 彈後殿曲 其曲哀 非治世之音故 並及之云

이제 야사에 나오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살펴보면, 公이 한 말 중에 귀인 권씨[1]에 대한 일은 귀인의 조카 허반[2]에게 들었고, 소릉(문종의 비인 顯德王后의 묘)을 복권하라고 청한 일은 조정에서 인정(仁政)을 행하기를 바랬는데, 공이 일찍이 충청도도사로  있으면서 소릉을 복권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후전(후궁 또는 궁녀의 거처)의 노래에 대한 일은 옛날 <공이> 서호에 있을 때 이며, 무풍의 부정총이 거문고를 가지고 방문하여 후전곡(후전의 노래)을 타는데 그 노래가 슬프고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노래이므로 이를 같이 쓴 것이라 하였다.

[1]왕의 후궁을 귀인이라 하니 아마 권치명의 따님 중에 한분이 왕의 후궁이었던 것 같다. EK님중에 또다른 한 분은 허반의 모친이다.

[2]허반(許磐, ?∼149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병(文炳). 아버지는 사지(司紙) 인이며, 어머니는 권치명(權致明)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이목(李穆)·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과 함께 참형되었다. 평소에 글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단정하여 세칭 무오사화의 오현(五賢)이라 일컬어졌다. 뒤에 신원되었다.


又問同議史草之人 公曰旣輸情矣 請獨死 凡此事 實皆得之斷爛之餘 無以究其顚末 而 畢齋所著吊義帝文 亦在史草 子光 摘其語 自爲註釋 遂句解之曰某之惡 皆宗直 誨而成之也 其禍遂至滔天

또 사초에 동의한 사람을 묻자 공이 말씀하시기를 이미 사실은 다 말했고 나홀로 죽겠다 하였다. 무릇 이런 일은 실제로 모두 불에 탄 나머지에서 찾는 것이라 전말을 구명할 수 없으나, 필재가 지은 조의제문이 역시 사초에 있었다.  자광이 그 글을 지적하여 스스로 주석하고 구절에 따라 해석하기를 누구의 죄악은 다 종직이가 가르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그 화가 하늘에 까지 넘치게 되었다.


公 先以大逆 論處極律 畢齋 戮及泉壤 而一代搢紳 以名流爲號者 誅竄殆盡 卽是年七月十七日也 是日 晝晦 雨下如注 大風起 拔木飛瓦 都市人 無不顚仆股慄 儒林喪氣 重足屛息 學舍蕭然 數月無誦讀聲 而公所居前川 血流三日云

공이 먼저 대역으로 논의된 끝에 극형에 처하고 필재는 형벌이 저승(泉壤)에까지 미처 일대 점잖은 선비(搢紳) 중에 이름난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은 거의 다 죽이고 귀양보내니 즉 이해(1498년) 7월17일이다. 이날 대낮이 어둡고 비가 들어 붇듯이 내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도 날아갔다. 도시 사람은 자빠지고(顚仆) 무서워 떨지(股慄) 않은 사람이 없고, 유림은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 나 다니지 않고 숨을 죽였으며, 공부하는 곳(學舍)은 소연하여 여러 달 동안 글 읽는 소리가 없었으며, 공이 사는 마을 앞에 시냇물은 3일간 피가 흘렀다고 하였다.


公 嘗與鄭文翼公 光弼 受兩南御史之 命同日辭朝 同宿於龍仁之館 公 慷慨論時事 語多激 文翼屢止之曰言不可若是 公 奮曰士勛 亦爲卑下之論耶 達一宵竟不相契 士勛鄭公字也

공은 일찍이 정문익공 광필[1]이 양남(영호남)어사의 명을 받들고 나가자 公이 같은 날 조정에 사의를 표하고 떠나면서 용인여관에 같이 묶게 되었다. 공이 사회적일 일들을 강개하여 논하니 충격적인 말이 많았다. 문익공이 여러 번 저지하며 말하기를 말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고 하자 공이  엄숙하고 강하게 말하기를 사훈이도 역시 이런 속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하고 밤을 새워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사훈은 정공의 자(字)이다. 

[1]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南秋江孝溫之言曰 公眞希世之才 廟堂之器 論議國事 是非人物 如靑天白日 曺南冥植之言曰公 生有凌霜之節 死有通天之寃 野乘又云公 倜儻有大節 魁偉有器局 文章 汪汪若河海 在書堂 著秋懷賦 氣像於此可見 其立朝 好盡言 不避權貴云 公 所以爲公者 正在此而 亦所以取禍也 歟

남추강효온[1]이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주요 조정의 그릇이다. 나랏일을 논의하면 이 같은 인물이 없고 맑은 하늘에 뜬 해(靑天白日)와 같다고 했다. 조남명식[2]이 말하기를 공은 살아서 서릿발을 능가하는 절개가 있고 죽어서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다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공은 큰 뜻과 기개와 절개가 있고 생김새가 우람한 기량이 있었고,  문장이 강과 바다같이 넓고 깊어 서당에 있을 때 추회부(秋懷賦;가을을 생각하는 시?)에 기상이 표현되었다고 하니 이로서 알 수 있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권세와 지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할말을 다 했다고 한다. 공처럼 된 이유도 참으로 이에 있고 또한 화를 입은 원인도 이에 있다 하겠다.

[1]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이고, 생원 전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2]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公於著述 立草千言 沛乎無礙滯 見者望洋 中華人 至以東國之昌黎 稱之 每腹藁成 磨墨滿硯 一筆揮之 不復視 投之篋中 經累月 始出而點化之或 問之 曰始起草 猶有私意 不自見其當改 久然後 私意除 公心生 乃明知其醇疵也 其用工公精 如此

공이 책을 쓰면 잠깐 천 가지 말을 초안으로 써도 기운이 세차고 거리낌이나 막힘이 없어 보는 사람들은 바다를 보는 것 같고, 중국인도 동국(조선)의 한창려[1]라 일컬었다. 매번 벼루의 물기가 마르면 묵을 갈아 벼루를 채우고 일필휘지하여 다시 보지도 않고 상자 속에 던져두었다가 수개월 후에 끄집어내어 고쳐 썼다(點化). 혹시 묻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기를 처음 초안을 쓸 때는 오히려 개인적인 생각에 가리어서 스스로는 당연히 고쳐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주관적인 생각이 가시고 나면 객관적인 생각이 생겨 그 결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일에 대한 공의 세세함이 이러하였다.

[1]韓愈(768~824)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자·사상가이며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嘗與兩兄 赴別擧 欲以壯頭 讓之 公則不製焉 伯氏遂魁 仲氏聯之而 後圍初場 公醉眠 曳白而歸 中場 亦如之 至終場 盡粘三場試券 連數十幅而入

일찍 두 형과 더불어 과거를 보면서 장원을 하고 싶은 욕심은 있으나 양보하여 공은 글을 짓지 않으니 큰형(준손)은 장원을 하고 작은형(기손)은 차석을 하였다. 공은 후위(뒷줄?, 또는 그 후의 시험?)에 들어가서 첫 시험(初場)에서 공은 취하여 조는 체하며 흰 백지를 내고 돌아왔고 두 번째 시험(中場)에서도 그러하였다. 마지막 시험(終場)에 이르자 3개 시험의 답안지를 모두 붙여서 수십 폭으로 연결하여 제출하였다.


考官問策 以中興爲目而宋高宗 齒焉 公卷其題 詣前曰宋高宗 偸安一隅 忘親釋怨 乞和於犬羊 豈與殷宗周宣 並列於中 興之主哉 考官 大慙改之 公 乘半酣揮灑 日未斜矣 榜將揭 使人覘之曰第一名 非我 勿復觀 果然

감독관(考官)이 중흥(中興)을 제목으로 그 답을 쓰라고 하면서(策問) 송나라 고종을 예로 들자, 공이 제목을 <뜯어서> 말아 쥐고 감독관(考官)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송의 고종은 한편으로는 할 일을 미루어 두고 눈앞의 안일만 탐하여(偸安), 부모를 잊어버리고 한을 풀기 위해 짐승의 무리(犬羊)에게 화친하기를 빌었으니 어찌 은나라의 종(宗?)과 주나라의 선(宣?)과 같은 중흥의 임금과 같은 반열에 들 수 있습니까 하였다. 감독관(考官)이 크게 부끄러워하고 고치었으므로 공이 반쯤 즐기면서 <답안지>를 새로 고쳐 썼으나 그날이 저물지 않았다(빨리 썼다는 뜻). 방이 장차 걸리자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하면서 1등의 이름이 내가 아니면 보지도 않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其後 靜菴趙先生光祖 掌試 得宋公純 對策曰季雲 後無此作 公之爲世企慕 又如此 及殿試 考官 忌而置第二 公恥之常以 坡公之居第二 自擬焉 足見公 平日氣槩也

그 뒤 정암 조선생 광조(1482~1519)가 시험을 관장하면서 송공순[1]에게 대책[2]을 얻어 보고는 계운(일손)이후에는 이런 글이 없었다 하였으니 공이 세상 사람들의 바램과 그리워함이 것이 이와 같았으나, 전시[3]에 이르러 감독관(考官)이 꺼려하여 2등으로 되자 공이 부끄러워하여 항상 파공[4]도 2등으로 된 것을 이에 비기면서 만족해했다. 공이 평소에 기개가 그렇다는 것으로 보겠다.

[1]송순(宋純, 1493~1582). 조선 중기의 문신.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출신. 증이조판서 태(泰)의 아들이다.

[2]對策; 시험의 답안 즉 中興對策

[3]전시(殿試); 조선 시대에,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사람에게 임금이 친히 보이던 과거. 문과 33명, 무과 28명의 합격자를 재시험하여 등급을 결정하였음

[4]坡公; 중국 북송 때의 소동파인 소식


配禮安金氏 參奉尾孫女 無育 伯氏直提學公駿孫 次子縣監大壯 主其祀 其兄三足堂 大有命之也 公葬 始在木川 與夫人墓 同岡而公墓 後返淸道之上北 以從先兆

부인은 예안김씨로서 참봉 미손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어 큰형 직제학공 준손의 둘째 아들인 현감 대장이 그 제사를 받드니, 그의 형 삼족당 대유가 명한 것이다. 공은 처음에 목천에 장사지내어 부인의 묘와 같은 곳에 있었으나 공의 묘는 그 뒤 청도의 위 북쪽으로 옮겨 선영에 모시었다.


尹公鳳朝 銘其碑而學者 卽其舊居 又建祠享之 禮堂之請 宣額者 尹公絳 宋先生浚吉趙公復陽而 郎官 金公壽興也 李公殷相 撰侑文 至以趨義之勇 有過黝賁 正氣不泯撑柱乾坤 贊之 世以爲確論

윤공봉조[1]가 묘명을 짓고 학자들이 그 옛날 집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었다. 예당(예조)에 간판을 명명(宣額)해 주기를 청한 분은 윤공강[2] 송선생준길[3] 조공복양[4] 낭관 김공수흥[5]이다. 이공은상[6]이 유문(보답하는 글?)을 지으면서 뜻을 나타내는 용기는 검푸르고 컸었고 정의로운 기개가 없어지지 않아 천지(乾坤)를 떠받히는 기둥이라 극찬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의 확고한 생각이라 하였다.

[1]윤봉조(尹鳳朝, 1680~176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직장 명원(明遠)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

[2]윤강(尹絳, 1597~166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준(子駿), 호는 무곡(無谷). 공조참의 민헌(民獻)의 아들이다.

[3]송준길(宋浚吉, 1606~167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영천군수(榮川郡守) 이창(爾昌)의 아들이다.

[4]조복양(趙復陽, 1609~167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좌의정 익(翼)의 아들이다.

[5]김수흥(金壽興, 1626~169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 양부는 동부승지(同副承旨) 광혁(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로 동지중추부사 존경(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이다.

[6]이은상(李殷相, 1617~167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조선 중기 한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정구(廷龜)의 손자로, 소한(昭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좌찬성 상의(尙毅)의 딸이다. 할아버지 정구와 큰아버지 명한(明漢)은 모두 제학 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와 사촌형제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일가가 사림을 이루었다.


公稟絶異之姿 抱有爲之志 蚤得賢師 學有指授 所與交 皆當世之選 而竗歲蜚英 翶翔乎珥筆 橫經之列 淸裁峻議 傾動朝野 不啻若珪璉之登廟 鸞鳳之儀庭 淸粹之蘊於中 足以格君 彪炳之著於外 足以華國

공이 품성은 뛰어나게 다른 자태이었고, 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일찍이 현명한 스승(김종직)을 얻어 배워서 받은바가 있었고, 더불어 교유한 분이 모두 당세의 뛰어난 사람들이며, 젊어서 높이 귀하게 되어 날아올라 경서(역사)를 쓰는 반열에 올랐으며, 맑은 재량과 고상한 의견은 조야를 움직였으니 뛰어난 학식(珪璉)으로 사당에 모셔지고(登廟) 봉황의 조정이 된 것 뿐만 아니라, 맑고 순수함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충분히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는 깨우쳐 주고 빛나고 드러나게 하여 충분히 나라를 빛낼 것이다.


進足以謀謨巖廊 退足以領袖士林 斯 可謂河嶽英靈之所鍾聚而 反以厄運乘之 淫刑酷罰 中途摧折 千載之下 聞公事者 莫不掩抑鳴咽而不忍言 不能不致疑於天道人事之際

나아가면 조정의 모범이요 물러나면 사림의 영수이니, 이는 강과 산의 영험한 정기를 받아 모았다고 할 수 있으나, 액운을 만나 악독하고 가혹한 형벌로 중도에 꺾여 부러짐을 당하니 오랜 세월동안 공이 일을 듣는 사람은 억울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목이 메여 차마 말하지 못하니 하늘의 도리나 사람의 일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鳴呼 殆非公一人所關也 然而當時群奸如 墩光之類 構誣煽禍 詡詡然自爲得計者 或於其身 或於其子孫 皆不免刀鉅之典 情狀畢露 昭在史牒 雖婦孺下賤 皆爲唾罵而 公之一節 秉直不回 彌久而彌彰 磨滅不得則天人之理 信不舛矣

아! 피해를 입은 사람이 공 한 사람뿐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 극돈과 자광과 같은 무리들이 거짓을 꾸며서 일으킨 화가 크게 미치어 자업자득하였으니, 당사자들이나 자손에게 모두 칼과 톱으로 잘려지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황들이 다 들어나고, 역사책에도 소상히 기재되어 비록 여자들이나 젖먹이나 천민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침을 뱉고 꾸짖지만, 공의 절의는 곧게 잡은 것이 없어지지 않고 오래되어도 오랫동안 빛나고 마멸하지 않았으니 즉 하늘의 도리가 어김이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寅永 先祖恭肅公 亦以畢齋門人 罹史案 今於公請諡之狀 義不容辭 略掇前輩記述之可據者 以備太常氏採擇焉

인영(글쓴이)의 선조인 공숙공[1]도 역시 필재의 문인이라 사화와 관계되었는데, 이제 공의 시호를 청하는 글을 도리상 사양할 수 없다. 대강 앞의 선배들이 기록해 놓은 것 중에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추려서 써 보니 태상씨[2]가 채택하기를 바란다.

[1]조익정(趙益貞, 1436~149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이원(而元). 공조좌랑 안평(安平)의 손자로, 한산군(漢山君) 온지(溫之)의 아들이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2]태상시(太常寺);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제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原任奎章閣直提學 趙寅永 撰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원임규장각직제학 조인영[1]찬

[1]조인영(趙寅永, 1782~185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이조판서 진관(鎭寬)의 아들이며, 국구(國舅) 만영(萬永)의 동생이다.


贈諡

시호를 내림


博聞多見曰文 ; 학문과 사물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아는 것이 많고 본 것도 많아 문(文)자를 쓰고,

使民悲傷曰愍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이 슬프고 아프다는 뜻에서 민(愍)자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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