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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구형왕릉(仇衡王陵)과 덕양전(德讓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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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19. 11. 2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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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구형왕릉(衡王陵) 덕양전(德讓殿)


구형왕릉(仇衡王陵)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

시대

고대/삼국/가야

문화재 지정

사적 제214호

건립시기

6세기 중반

성격

왕릉, 가야왕릉

유형

유적

면적

45,000㎡

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분야

역사/선사문화 


1971년 2월 9일에 사적 제214호로 지정된 이 무덤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0.4m, 높이 0.4m, 깊이 0.68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수(石獸)가 각각 1쌍씩 있으나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많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德讓殿)'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경남 산청 - 덕양전(德讓殿)


<명칭>    산청 덕양전

<소재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1번지

<문화재분류번호> 경남문화재자료 제50호


덕양전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덕양전은 조선시대 사당으로 전구형왕릉의 재실이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되었다.

금관가야 제10대 왕 양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막향화를 드리고 있는 곳입니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양왕은 금관가야를 신라에 양위하고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옮겨와 5년 뒤 죽었고,그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는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으며, 1898년 승선전(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

하여 1930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1991년 중건 하였습니다.

<산청군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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