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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일명 부처바위)
스님 한 분이 부처바위를 찾은 다른 스님에게 이 같은 설명을 곁들이며 안내를 해줬다. 처음 온 듯한 스님은 이내 두 손을 모으고 부처바위 앞에서 목례를 반복했다. 지난 19일 오후, 경주 남산의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일명 '부처바위')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띈 모습. 두 달 전에 비해 부처바위 주위환경은 한 결 깔끔해졌고 바위의 돋을새김 조각들도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경주시는 지난 8월부터 바위청소와 철책 교체 등 대대적인 보존정비에 들어간 끝에 이 달 안에 마무리를 할 예정이다. 높이 10m, 너비 6m인 부처바위 북쪽 암벽에는 웅장하게 솟은 2기의 탑 사이 암벽 중앙에 여래불상이 앉아있다. 불상 머리위에는 화려한 천개가 떠 있으며 동탑 위에는 비천상이 날고 있다. 그리고 쌍탑 아래는 암수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데, 참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탑의 암사자는 입을 벌렸고 서탑 수사자는 입을 다물었다. 음양의 조화일까? 아니면 열린 세계(극락)와 닫힌 세계(지옥)를 뜻하는 걸까? 부처바위에 대해 문화해설사는 “금강역사가 불국정토를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하듯 사자도 성스런 짐승이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암사자는 왼발을 들고 수사자는 오른발을 든 채, 싸우려는 자세를 하고 있으나 왠지 무서운 모습은 아니다. 사자꼬리가 세 갈래로 휘날리는 것도 퍽 특이하다.
천연바위에 얇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했지만 마치 실물사진을 보는 듯 생생한 탑 모양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석탑은 신라시대 만들어진 수많은 목탑의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9층 목탑 모형도 이 부처바위 쌍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물론 돋을새김 기법 때문에 입체성을 증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을 밝히는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라인들은 왜 이 바위에 불상과 9층탑을 새겼을까?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 시대부터 우리민족은 큰 바위에 영험한 존재가 있다고 믿어 왔다. 상사바위, 칠성바위 등으로 불리는 바위신앙이 그것이다. 부처바위 인근에는 성기바위, 옥룡암으로 불리는 토속신앙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부처바위는 동서남북 4면에 30여개의 불교조각을 새겨져 있다.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를 나타낸다고 한다. 부처님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각기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부처바위 남쪽 면, 채색된 부처님과 입상 여래불의 조형미
두광과 얼굴은 없어졌지만 이 부처님의 얼굴은 틀림없이 보름 달덩이 같을 것이다. 왼쪽 손이 배를 잡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래서 예로부터 안산불(安産佛)로 불리어 후손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토속신앙과 불교의 조화로운 흔적이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가장 넓은 바위에는 인공으로 채색된 흔적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 협시보살이 몸을 본존으로 기대려는 모습의 천진함 모습도 있다. 동쪽 면, 장엄하고도 화려한 극락세계 모습
서쪽 면, 능수버들 아래 여래부처가 연꽃 위에 앉아
부처바위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문화재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한 오오사까란 일본인이 부처바위 터에서 '신인사(神印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부처바위는 신인종에 속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신인종을 창시한 신라 선덕여왕 시절의 명랑법사와 연관시켜 부처바위 연대를 7세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황룡사 9층 탑과 부처바위는 제작연도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높이 80m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2년에 세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문화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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