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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

☞墨香·古書畵/古書藝·한국

by 산과벗 2006. 2. 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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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三晩 1770(英祖46)~1847(憲宗l3)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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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貫은 全州, 자는 允遠, 호는蒼巖. 全羅北道井邑 출신으로 당대의 명필이던 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書藝공부에 몰두하여 평생 벼루 열개를 맞창내고 붓 천자루를 닳아 없앴고 병중에도 하루에 千字씩 쓰기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창암은 순조 30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글씨에만 몰두하여 평생을 곤궁하게 지낸 선비였다. 그는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씩 썼다고 하는 이야기와 벼루를 열개 맞창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그라뜨렸다는 일화(磨穿十硯 禿盡千毫)를 볼 때 그가 글씨에 매진하였던 정열은 상상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창암은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하는데 그리하여 거침없는 '창암체(流水體)'를 이루었다. 그것은 글씨이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筆舞)이었다고 한다. 뱀 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神筆이라고 한다. 그래서 立春榜에 '李三晩'이라고 써서 문지방 아래 거꾸로 붙였다고도 한다. 그러면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정읍의 說話가 되었는데 뱀에 대한 이야기와 약방의 物目記로 인해 중국에 까지 알려진 이야기와 부채장수가 잠든 사이 부채에 몇자 적었더니 이상만 글씨라 하여 모두 팔린 이야기와 양반집 墓碑文의 墨痕이 지워지지 않던 이야기 등 많기도 한데 그만큼 그의 글씨는 유명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에서는 이삼만 글씨의 애호가들이 많고 또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는 學童들에게 體本으로 글씨를 써서 나누어 주었을 뿐아니라 원하는 知人들마다 선선히 글씨를 써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돈을 받고 써주진 않았다고 한다.  

 



창암과 시대를 같이한 당시의 대표적인 書家로는 호서의 秋史 金正喜(1772~1840)와 강서의 訥人 曺匡振(1772~1840)이 손꼽혔다. 당시의 명필이요 병조판서였던 추사가 현종 6년 윤상도 사건에 연류되어 제주도로 귀양가는 길에 전주의 창암을 만났다. 그 때 창암의 나이는 71세요 추사는 55세 였으니 평교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창암의 위명을 익히 알고 있던 추사가 눈물로 相照하였다 한다. 두사람은 밤을 새워 서법과 서체를 논하였다 한다. 후에 편지 왕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추사가 제주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전주에 들렀을 때는 창암이 세상을 뜬 이듬해였다. 추사는 슬픈 마음으로 '名筆菖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墓表文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이삼만의 묘소에 가면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의 고향인 전주로 이사하여 옥류동에 터를 잡고 글씨를 쓰며 말년을 지냈다 한다. 창암은 52세에 부인 김해김씨와 사별하고 옛부터 자주 만나던 名唱 심씨 부인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심씨 역시 회갑 전에 사별하고 오로지 글씨에만 전념하다 나이 78세에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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