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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작품 <각고>

☞墨香·古書畵/古書藝·한국

by 산과벗 2006. 2. 2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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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기묘록 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2. 송시열,‘각고(刻苦)’, 지본, 164×82cm, 개인 소장. 송시열이 ‘刻苦’를 쓰고 제자인 유명뢰(兪命賚),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가 ‘각고’를 주제로 학문과 공부에 대한 자기 생각으로 발문을 달았다.

 

송나라 주희 선생이 아들을 공부시켜 타관으로 보낼 때에는 ‘근근’(勤謹:부지런하고 삼감) 두 글자로 경계하였고, 선생이 임종시를 당해서는 제생(諸生)들에게 ‘견고각고’(堅固刻苦:뜻을 굳게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네 글자를 당부하였다. 이 전후 여섯 글자야말로 어찌 후학(後學)들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겨둘 것이 아니겠는가.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돈암서원의 유생에게 써서 보이다’(書示遯巖院儒, ‘송자대전’에서)

우암 송시열은 깐깐하다.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외치며 북벌정책을 추진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는 고집불통이다. 자신의 주장은 금과옥조였고,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은 모두 원수였다. 그는 냉혈한이다. 많은 사람들의 손에 피를 묻힌 조선시대 사화·당쟁의 한 가운데에 우암이 있었다. 그에 대한 부정과 폄훼의 극치는 조선이 ‘송시열의 나라’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송시열도 인간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스승이었다. 고희를 막 넘긴 해, 53년을 해로한 부인 이씨가 세상을 뜨자 “당신의 운명이 기구하여 나같이 못난 사람과 짝이 되었다”며 통곡했다. 자식과 제자들에게는 성실과 근면을 학문의 요체로 삼을 것을 강조하곤 했다. 지금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암 탄생 400주년 기념전은 이러한 우암의 삶의 철학과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초서로 쓴 세로 164㎝, 가로 82㎝의 대자서 ‘각고(刻苦)’는 기개와 열정을 느끼게 한다. 우암이 돈암서원 유생에게 당부한 글 가운데에서 취한 ‘각고’ 두 글자는 제자 유명뢰에게 써 주었던 것이다. ‘어려움을 견디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노력하자’는 이 말. 새해 아침, 모두가 되새겨야 할 금언이 아닐까.

〈조운찬기자〉  

 

 

 

전남 완도 보길도에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

 

그림1. 송시열,‘주자명언(朱子名言)’, 십곡병풍 중 부분, 지본, 139×52cm,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주자 주희(朱熹)의 글로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일직’(一直)이란 글자일 뿐이다’(天地生萬物, 聖人應萬事, 惟一直字而已)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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