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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

☞국보·보물·유물/도자기·청자

by 산과벗 2006. 4. 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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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을 꼭!!! 읽어보십시오...^^
 
 
백자철화 포도무늬 큰항아리


 
     --여백의 아름다움이 이룬 최고의 걸작
 

  당당한 그릇 모양에, 대담하게 여백을 남기며 그려진 격조 높은 문인화풍의 포도그림이 완벽하
 
게 어울린 백자항아리.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자철화 포도무늬 큰항아리'에는 근접하
 
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었다. 독립된 진열실에 국보 83호인 '금동 연화관 사유상' 단 하나만을 전
 
시하더라도 넓은 공간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이요 작품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처럼, 높이가 54센티나
 
되는 이 백자항아리도 그만한 독립된 공간을 당당하게 점유하고 압도하리라. 이렇게 한 전시실에
 
단 하나만 전시해도 좋을 명품은 그리 흔치 않다.

 그동안 백자 항아리를 세밀히 관찰하여 직접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왠일인지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드
 
디어 기회를 만들었다.

 작품을 조금씩 돌리면서 뷰파인더로 살피며 셔터를 눌렀다. 어느 방향에서나 구도는 아름다웠다.
 
 항아리의 유약색은 고르게 희지 않았고  형태 또한 좌우대칭이 아니었다. 만일 유약과 형태가 중국
 
이나 일본 것처럼 완벽했다면, 이 항아리의 색채와 형태는 우주宇宙의 드넓은 공간으로 확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화공은 붓에 끈끈한 철사안료로 희고 둥근 공간에 포도를 힘차게 그렸다.
 
그는 우주를 상징하는 것 같은 둥근 공간에 단순히 포도가 아닌 충만한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나의 긴 덩굴이 끝날 무렵, 다른 덩굴 하나가 항아리 목 밑에서 시작하며 사선으로 평행을 이루며
 
서로 어울리고 있었다. 포도 떨기의 무게로 아래로 늘어진 여느 포도 그림과는 달리, 이 포도덩굴은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힘차게 뻗어 나갔으며, 한없이 뻗어 나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여린 작은 덩굴
 
들도 바람에 나보끼듯 율동감이 약여躍如했다. 또한 잎은 엷게 포도알은 진하게 칠했다. 재벌구이
 
때 유약에 섞여 번진 것이 마치 한지에 먹이 번진듯 했다. 농담의 대비가 절묘했고 힘차게 뻗어 나
 
가는 덩굴들은 영원한 생명력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포도를 그려간 과정을 추적해 보면, 주어진 공간 안에 얼마나 치밀하게 구도와 농담의 묘를 살렸는
 
지 알 수 있다. 항아리 입 부분 바로 밑에서부터 그림은 시작한다. 담묵淡墨으로 포도덩굴은 힘차게
 
 긋는다. 연이어 넓적한 농묵濃墨이 이파리와 담묵의 이파리가 입부분에 바짝 당겨져 있다. 포도떨
 
기도 마찬가지로 입부분 가까이 주렁주렁하게 그리니,이 넓은 화폭의 공간 안에 시작이 그토록 견
 
고 할 수 없다. 이파리와 포도떨기 들이 긴장하며 견고한 큰 덩어리를 이루니, 이제 줄기는 자유롭
 
게 길게 빼내어 그려도 괜찮다. 다시 철사 안료를 붓에 듬뿍 묻혀 줄기를 횡으로 길게 내뻗치게 한
 
후 항아리의 가장 넓은 부분에 담묵의 이파리와 포도덩굴을 큼직큼직하게 배치했다. 시작이 견고하
 
니 횡으로 길게 뻗은 가지 끝에 과감하게 큰 덩어리는 매달아도 전혀 무리가 없다. 포도 한 덩굴이
 
끝날 무렵, 입부분에 바짝 붙여 또 하나의 포도덩굴이 시작한다. 끝과 시작이 사선으로 평행하니 그
 
사이에 넓은 공간이 형성 된다. 역시 담묵의 이파리와 농묵의 포도덩굴이 큰 덩어리를 지었다. 두
 
덩굴의 전체적인 구성은 비슷하나 세부는 다르다. 두 번째 가지의 뻗침이 더힘차고 활달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끝에 더 무거운 포도덩굴이 매달렸어도 넉넉히 지탱하고도 남음이 있다. 큰 줄기를 감
 
싸고 이리 뻗히고 저리 뻗히는 잔 덩굴의 코믹한 표정 또한 화면 구성에 균형과 생동감을 준다. 바
 
람에 가볍게 날리듯 그려 넣은 모양이, 크고 무거운 백자 항아리와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경중輕
 
重의 묘妙요, 동정動靜의 묘이며, 거기에 여백餘白의 묘까지 십분 살리고 있다.
 
 
 
 여백의 아름다움
 
 
포도그림이 범상치 않다. 마치 번짐의 효과를 연상하며 그린 듯 우리가 익히 보아온 한지의 번짐보
 
다도 멋지다. 잘생긴 항아리와 넓은 백색 바탕에 횡으로 휘날리는 포도그림을 대담하게 그려냈다.
 
화공이 그려낸 것은 포도가 아닌 여백이다. 항아리 하나가 우주만큼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 바로
 
두 포도덩굴이 빚어낸 흰 여백의 공간 때문이다.

 사람들은 형상에만 치우친다. 그리고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유마維摩의 침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적 진리란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전달 되는 것이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형상을 벗어난 여백에 무한히 넓고 깊은 공간이 펼쳐져 있고 생명력이 가득 차 있다. 굳이 노자의
 
'무無' 사상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그림에서 여백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여백이 있으
 
므로 그림이 시정詩情이나 여운을 자아내게 되고 , 여백이 있으므로 포도가 사는 것이다. 이처럼 여
 
백이란 그림의 크기나 도자기가 지닌 형태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림을 대할 때는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선종 그리고 성리학의 지식이 아닌, 표현방법 그 자체에서
 
 그림이 전하고 있는 조형언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흔히 고승이나 유생 혹은 신선 같은 삶을
 
산 이들이 그림을 그리면, 여백의 미를 살린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동양에서
 
는 그러한 문인화가 미술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고승이나 문인이 그
 
렸다고 해서 모두가 훌륭항 것은 아니다. 예술에는 예술 지체의 표현원리가 있어서 그 표현방법에
 
통달하였을 때 비로소 '여백의 미'라는 신비하고도 깊은 공간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의 도자기만 보더라도 거의 모든 작품에 여백 없이 무늬가 가득하여 기품이 없어 보인
 
다. 중국의 자기에는 우리나라처럼 문인화풍의 산수나 사군자가 보기 드물다.

 난초나 소나무, 대나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의 소재가 되는 것들 대부분이 아래에서 위로 그
 
림을 그린다. 그러나 포도만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그린다. 그런데 백자에 그림을 그린 화공은 오
 
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빗겨서 마치 풍죽風竹처럼 바람에 경쾌하게 날리며 포도를 그렸다. 생동
 
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또한 항아리의 여백을 최대한 넓게 살렸다. 어깨가 떡 벌어진 당당한
 
윗몸통 아래로 홀쪽하게 오므라든 백자의 형태를 염두에 두면서 화가는 포도라는 소재를 선택했던
 
것이다.

 포도그림은 접시나 편병 등에 그려지다가, 17~18세기에 병풍전체에 포도 나뭇가지 하나가 호쾌하
 
게 그려지게 된다. 백자의 포도그림은 병풍에 그려지던 것이 그대로 커다란 달항아리 등에 반영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파격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였을까. 이처럼 대담한 여백을 살린
 
구도의 묘는 일찍이 조선시대 회화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백자에 그려진 그림을 황집중, 홍수주, 이계고, 심정주, 권경, 이인문(李寅文1745~1821) 등이 그린
 
 포도그림과 비교해 보았다. 또한 다른 백자항아리에 그려진 포도그림들도 함께 살펴보았다. 덩굴
 
의 율동감은 없으나 권경과 이인문의 그림이 문인화 필치와 농담의 구사에서 항아리의 그림에 가장
 
 가까웠다.. 그 중에서 특히 이인문의 것과 비슷했다. 담묵의 빠른 필치로 그린 포도잎과 자유분방
 
한 덩굴의 표현양식이 흡사할 뿐만 아니라 시대도 일치한다. 이인문이라면 문기어린 항아리의 포도
 
그림이 가능하리라. 그러나 아직 누가 그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백자철화 포도무늬 큰항아리는 항아리라 불리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둥근 달항아리의 밑부분을 좁
 
고 길게 뽑아놓은 형태에 가깝다. 달항아리의 상체와 매병의 하체를 합쳐 놓은 것 같아서, 달항아리
 
가 지닌 넉넉함과 매병의 탄력있는 윤곽선이 어울린 중후함을 보여준다. 또 밑부분의 탄력 있는 윤
 
곽선은 그대로 달항아리 형태로 이어져서 전체가 팽만감을 주고 있다. 우주를 담은 듯한, 공기를 한
 
껏 불어넣은 항아리 형태에서는 석굴암 부처님의 몸 안에 충만한 푸르나(호흡)가, 포도덩굴에서는
 
금동 연화관 사유상 옷자락의 나부낌이 느껴진다. 중국이나 일본 것처럼 완벽한 좌우대칭이었더라
 
면 그런 생명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항아리는 바로 신체神體였다. 그래서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다.
 
 
이 작품은 원래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공부과장이었던 시미즈 고오지의 소장품이었다. 그는 뛰어
 
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일본이 패전하자 그 밑에서 일하던 권씨에게 수집품들은ㄹ 모두
 
 맡기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백자철화 포도무늬 큰항아리 한 점만은 훗날 반드시 찾으러 오
 
겠다는 말을 남겼다. 권씨는 그의 부탁대로 백자항아리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런데 철없는 아들이
 
백자 항아리를 아버지 몰래 골동품 가게에 5만 환을 받고 팔아버렸다. 당시로 치면 기와집 한 채 값
 
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권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을 팔아 항아리를 다시 사들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권세가들에게 미술품을 대주던 한씨라는 사람이 항아리를 보고 장택상에게 팔자고 제안한
 
다. 장택상은 광복 후 수도 경찰청장을 지낸 이로 당대 제일 가는 감식안을 지닌 미술품 수집가였
 
다. 그런데 흥정과정에서 엉뚱한 방해자가 나타나 한씨와 권씨 두 사람은 작물 취득 혐의로 구속되
 
고, 백자 항아리는 결국 장택상씨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장택상은 백자 항아리 한 점만 들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에 남
 
겨진 나머지 수집품들은 인민군 포격으로 모두 파손되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1957년 가을,
 
당시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우월 김활란을 시흥에 있는 별장으로 초대했다. 김 총장은 백자 항아리
 
를 보고 "저렇게 큰 물건은 개인이 갖고 있기 보다는 박물관에 진열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
 
다."라고 했다 한다. 얼마후 장택상이 거금 2.200만 환에 수집품을 내놓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우여
 
곡절 끝에 백자 항아리는 이화여대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1.500만 환에 사들인 백자 항아리는
 
일 년 후에 국보 107호로 지정되었다. 백자 항아리가 민족의 분열과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조
 
금도 손상되지 않고, 감식가들의 보호를 받으며 마침내 이화여대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니 명품은 반드시 제 주인을 만나기 마련이고, 하늘은 이를 돕는 것이리라.
 
 
 
한 양식을 완성하는 불가사의
 
 
이 글은 다섯 해 동안 내가 관여했던 '불교미술 특별전'의 개막식에 참가하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쓰여졌다. 뉴욕을 거쳐 캐임브리지에 도착한 후 도자기를 전공한 하버드대의 마우리 교수를 만났
 
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르지만 아시아 아니 세계의 도자기
 
 가운데 최고의 걸작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나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걸작 반
 
열에 오를 만한 것이 3점이 있는데 그 중 두 개가 한국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중국 것이라며, 첫째로
 
'백자철화 포도무늬 큰항아리'를 꼽았다. 말을 마친 마우리 교수는 항아리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
 
며 자못 감개어린 표정이었다.

 그때 한국미술의 한 특징이 잡혔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아름다운 자기들이 많다. 그러나 매우 빼어
 
난 절대무비의 명품을 하나 들라면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러한 명품이 있으되 한국에
 
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으뜸가는 것이 반드시 있으니 불가사의 하지 않은가. 그런 예는 도자기 뿐
 
만 아니다. 불상 가운데서는 '연화관 금동사유상'과 '석굴암 건축과 본존'이 있으며, 탑으로는 '불
 
국사의 다보탑'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명품이다. 또 '성덕대왕신종'과 '백제 금동 대항로' 그리고 '평
 
양의 고구려 우현리 대묘와 중묘 벽화의 사신도'가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처럼 미술품의 양이 많지 않다. 그러나 위에 예를 든 것처럼 각 장르에 걸
 
쳐 한 차원 높은 빼어난 명품들이 하나씩은 꼭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것이 인류문명의 대동맥이며, 그 종착역이라 할 한반도에서 최고의 걸작이 완성되어
 
온 것을 말함이 아닐까. 그러니 한국인은 인류문화의 전파과정에서 위대한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여
 
온 셈이다. 자기를 공예의 차원을 넘어 회화나 조각처럼 순수감상의 대상으로 한 단계 높인 나라는
 
 바로 한국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역사적 전개의 정상에 바로 '백자철화 포도무늬 큰항아리'가
 
우뚝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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