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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산과 남사의 전설

☞나의 포토갤러리/나의 고향

by 산과벗 2006. 4. 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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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사에서 전하는 白月山의  전설

 

신라 굴자군에는 모습이 아주 괴이하면서도 오묘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白月山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중국 당나라 황제가 황궁안에 아름다운 연못을 만들었는데,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황제가 연못가를 거닐다다 우연히 연못속에
어려있는 풍경을 보게 되었다.
황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사자처럼 생긴 바위산이
연꽃사이로 보이는데, 그 산봉우리가 리이하게 빼어났다. 황제는 연못속에
비친 산을 찾으려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사자형상을 한 산봉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보름달이 뜨면 그 산의 모습이 연못 속에 어려서, 황제는 화공에게
산을 그리게 하고 신하를 시켜 연못속의 산을 찾게 하였다.
신하들이 중국전역을 샅샅이 돌아 보았으나 그 산을 찾지 못하여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전국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우리 고장 창원에 이르러
그림과 똑같은 산을 찾게 되었는데,
그 산은 줄기가 수 백리에 뻗어 있는 진산이라 할 만한 산이다.

신하는 산을 찾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생각하다가 바위산 정상에 신발 한 짝을
얹어 놓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신하는 황제를 만나뵙고, 그 산을
해동국에서 찾았다고 말하자 황제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물었다. 신하는 자기가 신었던 신발 한짝을
산봉우리 바위 위에 놓고 왔다고 말했다.

 

보름이 되자 황제와 신하는 연못가에 서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밝은 달이 떠오르자 연못속에
바위산이 비치는데 바위 위에 신하가 벗어둔 신발 한짝도 선명하게 보였다.
황제는 감탄하여 그 산을 보름달과 같이 연못속에
하얗게 비친다라고 하여 '白月山'이라 부르게 하고
정상부근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 세개는 사자가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암이라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오고 있다.
白月山(해발 428m)은 신라 때부터 명산으로 알려진 산으로 창원시 북면에 있는 마금산 온천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완만한 능성으로 된 산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우람한 바위산을 만나게 된다. 산봉우리에 커다란 바위 세 개가 있어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白月山과 노힐부득,달달박박 에 얽힌 전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옛날 신라의 진산으로 알려진 白月山(지금의 경남 창원 소재)아래 자리한
어느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란 두 청년 선비가 살고 있었다.
풍채가 좋고 골격이 범상치 않은 두 청년은 속세를 초월한 높은 이상을 지닌 좋은 친구였다.
이들이 20세가 되던 어느 가을날.

두 사람은 白月山에 올라 먼 산에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이때 부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게, 우리가 이렇게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여 지낼 수가 없지 않은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나도 동감일세.』
두 청년은 그날 함께 출가할 것을 결심, 그 길로 마을 밖 법적방(창원에 있던 절)에 가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부득은 회진암에, 박박은 유리광사에 각각 터를 잡은 뒤 처자를 데리고 와서 밭을 일구며 정신수양을 했다.
양쪽 집이 서로 왕래하며 오손도손 재미있게 지냈으나 두 사람은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지내며 의식이 풍족하니 좋기는 하지만, 연화장 세계에서 여러 부처가 즐기는 것만 못하네.
더구나 불도를 닦아 참된 것을 얻기 위해 머리를 깎았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인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것일세.』
추수를 끝낸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장차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꿈을 꾸었다.
백호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그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상서로운 꿈이었다.
이튿날 아침,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똑같은 꿈을 꾸었음에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드디어 白月山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쪽에 판잣집을 만들어 살면서 미타불을 염송했고, 부득은 남쪽 고개에 돌무더기를 쌓아 집을 만들어 살면서
아미타불을 성심껏 구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경덕왕 8년(709) 4월 8일.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릴 무렵,
20세 안팎의 아름다운 한 낭자가 난초 향기를 풍기면서 박박이 살고 있는 판잣집으로 찾아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글을 지어 박박 스님에게 올렸다.

 

"갈 길 더딘데 해는 져서 먼 산에 어둠이 내리니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런 스님은 노하지 마소서 "

 

글을 읽은 박박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므로 그대가 머물 곳이 아니오. 지체하지 마시고 어서 다른 곳으로 가 보시오.』
낭자는 다시 부득이 살고 있는 남암으로 찾아갔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맑고 고요하기가 우주의 근본 뜻과 같거늘 어찌 오고감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스님의 뜻이 깊고 덕행이 높다는 풍문을 듣고 보리를 이루는 데 도움을 드릴까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답한 낭자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고
존사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을 들어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

 

부득은 이 게송을 듣고 내심 몹시 놀랐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은 아니나,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밤이 깊자 부득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을 마주한 채 고요히 염불삼매에 들었다.
새벽녘이 되자 낭자는 부득을 불렀다.
『스님, 제가 산고가 있으니 스님께서 짚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자리를 마련해 준 뒤 등불을 비추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다시 목욕하기를 청했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일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물을 덥히고 낭자를 통 안에 앉혀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부득이 놀라 크게 소리치니 낭자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을 하시지요.』
마지못해 낭자의 말에 따라 목욕을 한 부득은 또다시 크게 놀랐다.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더니 자신의 살결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옆에는 연화좌대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했다.
『나는 관음보살이오.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말을 마친 낭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한편 북암의 박박은 날이 밝자
『부득이 지난밤 필시 계를 범했겠지. 가서 비웃어 줘야지.』
하면서 남암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부득은 미륵존상이 되어 연화좌 위에 앉아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서 이리 되셨습니까?』
부득이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박박은 자신의 미혹함을 탄식했다.
『나는 마음에 가린 것이 있어 부처님을 뵙고도 만나지를 못했구료. 먼저 이룬 그대는 부디 옛 정을 잊지 말아 주시오.』
『통 속에 아직 금물이 남았으니 목욕을 하시지요.』
박박도 목욕을 하고 무량수를 이루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 법을 청하자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한 뒤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

훗날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말을 듣고는 白月山에 큰절 남사를 세워
금당에 미륵불상을 모시고 아미타불상을 강당에 모셨는데
아미타불상에는 박박이 목욕시 금물이 모자라 얼룩진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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