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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자취 - 창원 백월산의 절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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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06. 4. 1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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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3>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자취 - 창원 백월산의 절터들

폐허(廢墟): 집이나 성 따위가 허물어져 거칠게 된 빈터.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폐허'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폐허'라는 말은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니어서, 그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뜻이 함축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추상명사가 아닌 보통명사 폐허를 하나 떠올려 보면, 폐허는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 경우 '폐허'는, 아늑하고 고즈넉하기도 하고, 허무하고 무상하기도 하고, 애잔하고 소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난폭하고 참혹하기도 할 것이다.
  
  폐허에는 으레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내려앉아 있기 마련이다. 그 더께의 두께가, 적게는 수백 년에서 많게는 천년이 넘도록 다양한데, 그 수백 년 또는 천년이라는 세월을 그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기와로 지어진 건물이 불과 1, 2백년만 되어도 허물어져 내려서 종내는 기와조각들로만 흩어져 있다든가, 석탑 같은 것이 무너지고 부서져서 조각나 있다든가 하는, 서글픈 풍경을 마주치면 우리는 그 무상한 나이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폐허란, 세월이 무언가를 허물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조각내고 한 자취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전편이 그런 폐허들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 나오는 유적들 대부분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기에 『삼국유사』가 쓰여졌던 당시에도 그 현장들은 이미 수백 년 폐허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쓰여지고 다시 8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삼국유사』의 폐허들은 거개가 천년이 넘는 나이를 안고 있는 셈이다.
  

 
백월산 남쪽 월산마을 입구의 이정표들 ⓒ프레시안  

  경남 창원시 북면에 자리한 백월산에는, 『삼국유사』 탑상편 '남백월 이성(二聖) 노힐부득 달달박박'조의 현장이 두어 군데 있다. 천년이 넘는 나이를 안고 있는 이 현장들 중에는 전혀 폐허처럼 보이지 않는 곳도 있다. 백월산 남사(南寺)가 있었다는 산 남쪽 기슭 일대는 얼핏 보기에, 페허는커녕 요즘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개발의 현장 같아 보인다. 산 아래쪽 초입에는 무슨 공장 건물이 하나 있고 거기를 지나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양지바른 경사지에 조립식으로 지은 가건물이 나오고, 그 위쪽에 요즘 유행하는 식의 전원주택도 한 채 나온다. 다시 위쪽으로는 새로 지은, 기둥과 서까래에 단청도 입히지 않아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절집이다. 그 새로 지은 절집이 최근 복원된 '백월산 남사'이며, 양지바른 경사지의 조립식 가건물은 '성불사'라는 절로 '백월산 남사'의 임시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곳은 도시 외곽의 난개발 현장에 영락없다.
  
  그러나 이곳은 엄연한 『삼국유사』의 현장이다. 그것도, 신라 때에 노힐부득(努?夫得)과 달달박박(??朴朴)이라는 두 성인이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현신(現身) 성도(成道)했다고 전해오는, 그리고 경덕왕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백월산 남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그런 쟁쟁한 내력을 지닌 현장이다. 그래서 『삼국유사』라도 읽어, 고즈넉하고 애잔한 폐허를 예상하고 이곳을 찾아온 사람에게, 눈앞에 펼쳐진 살풍경은 난폭하고 참혹할 수도 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거룩한 사연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백월산 동남쪽 선천촌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친구로, 20세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들은 처자(妻子)를 데리고 살면서 농사를 짓고 서로 왕래하면서 수양하였는데,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라도 버린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의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은 꿈이 똑같았으므로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마침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에 판방(板房)이라 불리우는 판잣방을 지어 살았고, 부득은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뇌방(磊房)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살았다.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은 아미타불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그런 지 3년이 못 된, 성덕왕 8년(709년) 4월 8일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는데 스무 살쯤 된 아름다운 낭자가 박박이 거처하는 곳에 찾아와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다. 박박은 거절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여기에서 지체하지 말고 다른 데로 가시오."
  
  낭자는 산을 넘어 부득의 처소를 찾아갔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부득의 물음에 낭자가 대답했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보리(菩提)를 이루는 데 돕고자 할 뿐입니다."
  
  부득은 놀라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부득은 낭자를 맞아 암자에 머물게 했다.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이슥하여 낭자가 부득을 불렀다.
  
  "내가 공교롭게 해산 기미가 있으니 짚자리를 좀 깔아 주십시오."
  
백월산 남사 자리를 차지한 감나무 과수원(좌), 노힐부득의 거처 뇌방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백월산 남쪽 기슭의 암자 백운사(우). ⓒ프레시안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니 낭자는 해산을 끝내고 목욕하기를 청했다. 부득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하여 물을 데워 낭자를 목욕시켰다. 그러자 목욕물에서 향기가 풍기면서 물이 금빛으로 변했다. 부득이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스님도 이 물에 목욕하시라."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을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옆을 보니 연화대(蓮花臺) 하나가 생겨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그 위에 앉기를 권하였다.
  
  "나는 관음보살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고 낭자는 사라졌다. 한편 박박은,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부득을 찾아갔다. 가서 보니 부득이 연화대 위에서 미륵 부처가 되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박박이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부득이 사연을 말해 주니 박박이 탄식했다.
  
  "나는 마음 속에 장애가 있어서, 부처님을 만났는데도 기회를 놓쳤소. 그대는 덕(德)이 크고 지극히 어질어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 교분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기 바라오."
  
  부득이 말했다.
  
  "통 속에 금물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소."
  
  박박이 목욕을 하여 무량수 부처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마주하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을 설하고는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백운사 마루기둥 받침돌로 쓰이고 있는 백월산 남사 석등(추정)의 화사석과 연화대석(좌), 달달박박의 거처 판방 터로 추정되는 백월산 북쪽 골짜기의 산신각 (우). ⓒ프레시안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이 일을 듣고 정유년(757년)에 사람을 보내 백월산 남사를 세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절은 764년에 완공되었으며, 미륵존상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현신성도 미륵전"이라 하고, 아미타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시고 "현신성도 무량수전"이라고 하였는데 아미타상에는 금물이 모자라서 다 바르지 못해 얼룩진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백월산 남사는 나라에서 세운 절이라 규모가 큰 절이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절도 1,3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언제 무너져 내렸는지 건물들은 사라져 버리고, 절터는 감나무 과수원으로 변하였다. 그곳이 절터였던 흔적이라고는 과수원 여기저기 나딩구는 기와조각 뿐인데, 산 위쪽으로 백운사라는 암자에 백월산 남사의 유물로 보이는 석물이 두어 점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요행이라면 요행이다. 거기 암자의 마루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돌이 백월산 남사의 석등 연화 대석과 화사석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암자는 백월산 정상에서 동쪽 방향에 있는 너덜 지대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고 거기에 샘도 있는데, 그 위치가 『삼국유사』에서 노힐부득의 거처였다고 하는 "동쪽고개 돌무더기 아래 물 있는 곳"으로 비정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는 달달박박의 거처였던 판방이 백월산 북쪽 고개 사자암에 있다고 적고 있는데, 창원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사자암의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산신각 자리를 판방 터로 추정하고 있다. 거기 다 쓰러져가는 산신각 근처에 탑신석이 하나 나딩굴고 있고 골짜기 건너편 대밭 속에 온전치 못한 3층탑 하나가 신우대 속에 파묻혀 서 있다.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예전에 그곳에도 제법 번듯한 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예컨대, 백월산 북사(北寺)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절 이름은 말할 것 없고, 탑의 내력이라든가 또는 달달박박에 얽힌 사연 같은 것이 있었는지 여부 등등은 전혀 확인해 볼 도리가 없다. 탑과 판방 터만 그렇게 백월산 북쪽 기슭에 고아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산신각 옆 치성드리는 곳 귀퉁이에 있는 탑신석. 이 탑신석은 그 건너편 골짜기 3층탑의 탑신석일 수도 있다.(좌), 산신각 건너편 골짜기의 3층탑. 3층 탑신석이 원래의 것이 아니다.(우). ⓒ프레시안

  백월산 남, 북쪽의 옛 절터들은 미륵부처가 나고 아미타부처가 났다는, 말하자면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유적지가 저렇게 방치되고 있음을 볼 때, '폐허'라는 말 속에는 망각이라는 뜻까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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