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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공 최윤덕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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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과벗 2006. 4. 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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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공 최윤덕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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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공최윤덕묘
 주  소  창원시 북면 대산리 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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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 번호 : 지방기념물 제121호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서 태어난 최윤덕은 세종 원년(1419)에 3군도절도사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세종 15년(1433)에는 야인 이만주가 침입하자 평안도 도절제사로 이를 격퇴하여 4군 개척의 길을 열었다. 장군은 무인으로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조선조 최고의 무장이었다.

북면 대산리 사리실마을 뒷산에 위치한 최윤덕 장군의 묘는 봉분의 사면을 호석으로 치장한 조선 초기의 방형원분(方形圓墳)으로 묘 앞에는 상석(床石)과 2단의 계절(階節)이 있으며, 계절의 전방 좌. 우측에 문인석(文人石)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규모는 남북 576cm, 동서 465cm이다. 장군의 묘 뒤편에는 부인의 묘로 추정되는 같은 형태의 봉분이 하나 더 있다. 최윤덕 장군(1376~1445)은 세종때 대마도의 왜구를 소탕하고 평안. 황해의 여진족을 물리쳐 무인으로서 좌의정에까지 오른 창원의 대표적 인물이다..
최윤덕통천최씨()로 호는 임곡(), 시호는 정열()이며 왜구를 물리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였으며 야인() 이만주(滿)를 격퇴하는 등 그 공을 인정받아 무신으로는 드물게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백과사전 옮김)

* 고려시대 분묘

최윤덕의 장상의 죽음

조선초기 무신 최윤덕은 1444년 최윤덕이 병석에 눕게 되자 세종 임금은 친히 어의까지 보내 그의 병을 돌보게 했으나, 1445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종 임금은 사흘 동안 나라 일을 보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으며 정렬공이란 시호를 내려 공덕을 기렸다고 합니다.

최윤덕(崔潤德 1376∼1445(우왕 2∼세종 27))
조선 초기 무신.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본관은 통천(通川).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였던 아버지와 함께 전공을 세워 부사직(副司直)에 올랐다. 1402년(태종 2)부터 낭장과 호군을 거쳐 대호군·지태안군사 등이 되었으며,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그 뒤로도 여러 군직을 거쳤다. 1413년 만주 야인(野人)들을 복속시켰고, 1419년(세종 1)에는 쓰시마[對馬(대마)]를 정벌하였으며, 1433년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한 야인 이만주(李滿住)를 물리쳤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다루고 힘이 세던 그는 수차례의 무공으로 1435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근검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궤장을 하사받았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통천 상렬사(尙烈祠)와 안주(安州) 청천사(淸川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
답변참고 >> 백과사전

 

호국인물 최윤덕(崔潤德)

최윤덕 장군은 1376년 경남 창원에서 지중추부사 최운해(崔雲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자 화살 하나로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활을 잘 쏘았다.
대학자 권근 밑에서 학문을 닦고 1394년(태조 3) 19세에 무과 회시(會試)에 합격했으며, 21세 때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는 등 아버지를 따라 여러 싸움에서 공을 세워 1400년 훈련원 부사직(副司直)에 제수되었다. 1402년 (태종 2) 낭장(郎將) 등을 거쳐 1403년 대호군(大護軍),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使)로 승진하는 등 부친상 중에도 3년 시묘를 끝내지 못하고 왕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변방 방어에 있어 왕의 신임을 받았다.
1419년(세종 원년)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출병 15일 만에 대마도를 정벌하여 하삼도에 창궐하던 왜구를 격퇴했으며 이후 공조판서, 평안도절제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에 온 힘을 기울였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군사 1만 5천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에 침입한 여진족을 물리치고 여연, 자성, 무창, 우예에 4군을설치하였다. 그 공으로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435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최윤덕 장군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앞서 왜구의 침략을 예견할 만큼 뛰어난 장수였다. 장군은 세종에게 “일본이 지금은 저희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정세가 통일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부산 동래에 성을 쌓아 대비하소서”라고 했는데 과연 14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 동래성이 제일 먼저 함락되었다. 또한 북방정책에는 “만주 야인은 여러 힘이 하나로 뭉치면 무서운 세력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니 반드시 저희들끼리 싸우게 하여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으로 세력을 양분하여야 합니다.”라고 진언할 만큼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장군은 평소 나라가 평안할 때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며 틈만 있으며 축성(築城)의 필요성을 왕께 진언하였고, 우의정과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연안과 변방으로 내려가 군사요충지에 성을 쌓는 등 축성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평생을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힘썼다.
또한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 고향인 창원에 내려갈 때는 언제나 말 한필에 종자 한 명만을 거느렸으며, 평안도 도절제사로 있을 때는 여가를 이용하여 관사 앞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을 만큼 근면하고 청렴했다. 이와 같은 우국충정과 인덕으로 무인의 신분이었지만 정승의 반열에 오를 때도 반대하는 관료가 없었다.
1445년(세종 27년)에 70세의 일기로 별세한 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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