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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의 종류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6. 7. 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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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書의 種類

 

  중국고대에 저술한 서학이론 중에서 초서의 명칭은 확실히 적지 않은데, "赴急書"·"藁草"·"章草"·"草藁"·"藁書"·"篆草"·"隸草"·"急就"·"行草"·"今草"·"狂草""醉草"·"大草"·"小草"·"全草"·"半草"·"獨草"·"連綿草"·"游絲草" 등과 같다. 참으로 명칭이 아주 많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나 자세히 분석하면 바로 드러난다. 어떤 명칭이든 의미하는 것은 일종 초서와 같으며, 다만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이해했을 뿐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넓은 의미의 초서를 의미하는 것이 있는데, "藁草"·"草藁" 등과 같다. 어떤 것은 字帖을 대표해서 이름 지은 것인데, "急就"와 같은 것으로 실은 章草를 가리킨다. 어떤 것은 모종의 초서 특징으로써 이해하였다. 예를 들면 "連綿草"는 대초로써 글자마다 서로 연결된 것을 말하는 것이고, "獨草"는 小草로써 글자마다 연결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은 行書와 草書의 비중으로써 보면 "半草"와 같은 것으로 실은 行草, 즉 반은 행서 반은 초서를 말한다. 그리고 "全草"는 곧 모두 초서를 말한다. 그중 어떤 명칭은 시대가 서로 다름에 따라 내용상에서도 서로 다르게 표현된다. 예를 들면 "今草"는 唐 이전에 내포하는 것과 唐 이후에 내포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명칭이 번잡하고 다양한지를 막론하고 그 부류 상에서 보면, 초서체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바로 章草·小草[今草]·大草[狂草]이다.

 

  .章草

  장초의 드러난 이름과 실상의 문제는 역대로 쟁론이 끊이지 않은 문제이다. 우선 명칭 상에서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이 다소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漢 元帝 시기의 游史가 지은 것으로 득명하였다. 둘째, 漢 章帝가 애호하였거나, 혹은 창조하여서 득명하였다. 셋째, 杜度가 초서에 뛰어나 한 章帝는 杜度에게 초서로써 일을 기재케 하였기 때문에 서사한 것이 秦章이 되었으며, 후세에 바로 그와 같이 초서로 불리다가 章草가 되었다. 넷째, 장초의 "章" 자는 章程(여러 조목으로 나누어 정한 규정)의 "章" 자인데, 이 말은 그 일정한 규정이 있어, 서사법칙은 章程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章草가 되었다. 장초의 명칭문제는 시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며, 게다가 유력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논법은 가장 정확하고 명확하게 판정하기 매우 어려우나, 장초가 한나라 때에 결코 장초로 불리지 않았고, 단지 초서로 불렸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현존하는 자료 중에 가장 일찍이 장초로 불린 것은 張懷瓘의『書議』로써 왕헌지는 그의 부친에게 "옛날의 장초는 매우 훌륭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1)"고 하여 서체를 바꿔 서사할 것을 설득하였다는 기록이다. 실질적으로 중국 고대에는 왕왕 서체의 내부가 분화되어 발생한 이후, 서체 내부의 양식은 비교적 큰 구별이 출현하였으며, 분별을 위해 비로소 다시 두 종류의 다른 특징의 서체에 각각 하나의 명칭을 부여하였다. 예를 들면 篆書는 秦代에 이르러 이전의 正書와 다른 전서체가 출현되어, 후세사람들은 바로 秦篆 이전의 전서를 "大篆"으로 존칭하였고, 秦篆의 새로운 전서를 "小篆"으로 칭하였다. 그리고 章草를 漢代에 최초의 今草와 함께 초서로 칭하였고, 이후 두 종류의 초서 구별은 점점 더 커졌으며, 분별의 편의를 위해 비로소 "章草"와 "今草"의 구분이 출현하였다. 금초와 장초는 상대적이어서 말하는 각도에 따라 새로 나온 초서의 앞에 "今" 자로써 덧붙였는데, 이러한 분별 법은 옛날로부터 처음 古今으로써 분별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장초로 일컫지 않고, "古草"로 하였으며, "古章草"로써 일컬었는지? 현재 대다수 사람들은 금초가 성행한 시대에 장초는 이미 완전히 성숙되었고, 이미 秦章으로써 우아한 자리에 올랐으며, 동시에 또한 전문적으로 아동을 교육하는 식자 교본이 있었고, 게다가 사법상 이미 章程에 적합한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왕헌지는 "옛날의 장초는 매우 훌륭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2)"고 말했을 것이다. 따라서 규정에 적합한 章程의 古草를 "章草"라고 칭하였고, 비교적 자유스런 초서를 "今草"로 칭하였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결코 명칭의 근원이 아니고, 명칭이 대표한 바의 실물이며, 관심은 그것이 발생한 상한과 하한 및 이런 초서의 구체적인 내포와 서예예술로써의 풍격양식이다.

  서체의 발생은 절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며, 반드시 그것의 발생기와 성숙기가 있는데, 초서도 예외는 아니다. 초서는 篆書의 분화체이다. 이러한 서체가 갖추어야 할 요소의 존재는 물론 매우 이르지만, 그러나 반드시 일종에 완전히 독립된 서체로써 존재하기에는 결코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서는 속체의 도중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우아한 자리에 오를 수 없었고, 그것의 발생과 발전 모두 민간에서 잠행타가 다만 성숙기에 이르러 비로소 면모를 드러냈다. 이러한 서체는 어떤 즉시 나온 사법에서 발생하여, 후에 점점 대가들에 의해 함께 사용하고 약정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서체의 출현 시기는 마땅히 秦나라 말기에서 漢나라 초기쯤이다. 趙壹은『非草書』에서 "군대 문서는 서로 질주하였고, 羽檄(옛날 깃털을 뽑아 꽂아 지급의 뜻을 나타냈던 격문)을 흩날리었기 때문에 隸草로 하였으며, 급속함을 재촉하였을 뿐이다.3)"라고 언급하였고, 東漢 許愼은『說文解字序』에서 "한나라가 흥하고 초서가 있었다.4)"고 언급한 것 등은 바로 이를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秦漢시대 竹木簡 중에서 "급속함을 재촉하하였다.5)"고한 篆書의 해체 정황을 볼 수 있다. 이 한시기 대단히 많은 군사사무 중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러한 정식이 아닌 사법을 창조하여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사법이 점진적으로 많아졌고, 양적인 변화에서 질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여 대량의 초서 사법을 발생케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초법을 사용할 때에 생리와 심미로써 부합된 자형을 선별하였고, 어떤 자형은 약정하여 함께 사용하였으며, 어떤 것은 점점 도태되었는데, 바로 이와 같이 최후의 초서는 곧 사람에 의해 약정되어 體를 이루었다. 후에 또 호사자의 정리에 의해 계통이 되었으나, 점점 字法은 삼엄하였고, 고정적인 寫法이 형성되었는데, 바로 현존하는 急就章의 사법이다.(『急就』는 한나라 때 식자교본이다.) 이러한 字體는 천천히 원고의 초고로써 제멋대로 갈겨쓰는 서체를 이탈하여 秦章을 쓰는 신분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章草가 발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이다.

  章草는 이미 今草와 상대적으로 말했듯이 "예서 형체를 해체하여 조잡하게 서사하였다.6)"고한 古草書인데, 그렇다면 그것의 포함량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뜻이 있어야 한다. 첫째, 今草와 구별이 있는 古草書는 그 부류가 있기 때문에 현대 매우 많은 사람들이 簡牘 초서를 章草의 한 가지에 귀속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가 있는 것이다. 둘째, 후세의 장초사법은 옛날 竹木簡 장초의 계속이며, 자형의 選用 상 왕왕 古草書는 매우 많은 사법의 일종이다. 셋째, "隸草"는 마땅히 장초의 별칭이며, 장초가 "예서의 형체를 해체하여 조잡하게 서사하였다.7)"고한 이 여러 가지 의의 상에서 말한 것이다. 넷째, 이른바 草篆은 결코 엄격한 의의 상에서의 초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漢字는 최초에 상형으로써 기초가 된 것이기 때문에 문자가 아직 고도의 부호화에 진입하기 이전에 초서는 존재할 수 없다. "隸變"시기에 들어선 전서는 해체된 전서이다. 비록 초서의 요소로써 선도하게 되었으나, 이 시기 성숙은 예서의 성숙과 병행한 것이다. 때문에 초서는 비록 전서에서 분화되어 나온 요소가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결코 전서와 병행하여 발전한 역사가 없다.

  章草는 이미 竹木簡과 帛書殘紙 등 초서를 겸용한 이상, 그것의 특징은 바로 "파책을 나눈 것은 장초라고 이름 한다.8)"고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波磔은 결코 모든 장초를 대표할 수 없으며, 다소 예서 지식이 있는 사람 모두 알고 있듯이, 波磔의 출현과 起伏의 대소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굵은 것으로부터 나부끼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한 과정이다. 碑刻 隸書의 이러한 점진적 궤적은 비교적 뚜렷하다. 이것은 明代 사람들이 波磔의 인식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자각한 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다. 竹木簡 중에서 波磔의 문제가 비교적 자유로운 듯하나, 波磔이 최초에 발생한 것은 바로 즉석에서 서사한 竹木簡 중에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글자가 종결될 때에 최후의 일필은 拖筆9)로 인하여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秦나라 시기의 竹木簡 중에서 이미 표현된 것이 있으며, 漢나라 시기 더욱더 풍부하게 되었으나, 최초에 결코 규율로써 주의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조기의 초서 중에서 설령 波磔이 존재하고 있을지라도, 모두 비교적 작으며 비교적 고정적이지 않았다. 중간부위의 글자 중에서 波磔이 출현한 비율은 비교적 많지 않다. 바로 晉시기의〈平復帖>도 역시 몇 개 없는 波磔을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明 陳繹曾의해 "奇古"라고 일컫게 되었다. 후세에 파책이 출현하면 할 수 록 꾸임 없이 고매해 졌으며, 거의 글자마다 반드시 파책이 있게 되었고, 게다가 파책은 서사하면 할 수 록 크고 거칠었으며, 때때로 무중력상태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今草가 흥기하여 장초의 파책은 이미 今草를 구별하는 하나의 특징이 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장초는 篆隸를 급하게 서사한 한 서체이다. 그런 까닭에 용필은 간결하고 서툴러 기본상 글자마다 독립되었다. 이것은 그것이 전예에서 나온 특징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전서는 비록 縱勢를 취하였으나, 상형의 요소 때문에 글자마다 독립된 결과를 낳았다. 자체가 "隸變10)"된 후 弧線이 서사하기에 쉬운 직선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직선은 平行하게 압축하기에 쉬었기 때문에 예서는 扁方한 字勢를 향하여 발전하였고, 어느 정도 상에서 장초에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장초의 자형은 주로 扁方하거나, 혹은 正方하게 나타났다. 이것 또한 바로 무었 때문에 章草가 橫勢로써 위주가 되었고, 연루와 연결이 비교적 적으며, 글자마다 독립된 원인인지? 당연히 簡牘의 장초 중에서 후기에 이르러 중간에 매우 많은 今草의 요소가 출현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장초의 주류를 대표할 수 없다. 장초의 연루되고 연결된 선은 왕왕 單字의 내부에서 진행되었으며, 글자와 글자, 行과 행 사이의 관계는 주로 字態와 疏密로써 배치하였다.

  장초의 풍격이 발전한 것은 시대와 관계가 있는데, 조기의 장초는 篆隸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용필에서 구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예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의 뚜렷한 풍모를 막론하고, 분방한 풍모이거나 전아한 양식에 속하며, 그것들의 전체 면모는 언제나 역시 소박하고 중후하며, 기법이 낙후하여 수수하면서 고풍스럽다. 簡牘 중에서 이러한 서풍류의 가작을 찾아볼 수 있다.

  중기의 장초는 일반적으로 漢魏六朝 및 唐나라 시대의 문인장초를 가리키며, 이러한 종류의 장초의 자법은 이미 비교적 고정되었고, 비교적 강한 章程書의 맛이 체현되었으며, 波磔의 필법상 이미 비교적 다양한 연구가 있었고, 게다가 뚜렷하게 글자마다 구별된 풍격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장초는 민간에서 서예가의 수중에 진입하여 자연스럽게 예술상에서 비교적 진보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서 비교적 안정된 여러 가지 예술풍격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서예가는 史游·張芝·皇象·索靖·陸機·王羲之·簫子雲 등으로 예술성이 지극히 높은 매우 많은 작품들이 전해내려 온다.

  말기는 宋나라  이후를 가리키는데, 趙孟頫가 옛것을 회복하여, 晉唐을 숭배하고, 직접 魏晉六朝시대의 장초를 배웠다. 이후 宋克 등 여러 서예가는 이러한 풍격을 계승하고 배워 장초를 중흥케 하였다. 그들의 장초는 중기 문인장초의 계승이며, 그 서풍과 양식은 중기 장초의 진일보한 발전이었다. 시대가 뚜렷이 늦었기 때문에 현재 아름다운 풍모는 더욱 중시되었으며, 行書와 楷書의 용필방법의 영향을 받아 波磔이 비교적 크다

 

.今草

  今草는 章草와 상대적으로 말한 초서이다. 張懷瓘은『書斷』에서 "장초의 서체는 글자마다 구별이 있으며, 張芝가 금초로 변화시켜 그 속도를 더하였다.11)"고 언급하였는데, 張芝는 바로 기록되어 있는 가장 이른 今草 서예가이다. 위에서 언급한 금초는 장초의 기초 상에서 발생하였고, 行書·楷書와 함께 발전 변화한 초서이다. 당연히 이와 같은 초서는 어느 한 사람이 창조할 수 없듯이, 張芝 또한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今草가 시작될 즈음 장초의 성숙과 매우 오랜 기간 교차한 역사로 여긴다. 금초의 요소는 시종 장초의 발전에 따라서 발전하였는데, 簡牘 자료에서 보면, 定體(관방의 공용문자)의 장초와 금초는 漢簡의 장초에서 나온 것으로 동성동본이다. 東漢시기에 이르러 양자 모두 이미 성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啓功이『古代字體論稿』에서 언급하였듯이 "구체 혹은 신체의 초서를 막론하고 東漢 말기에는 이미 성안 가득히 노래를 다투는 유행가요를 이루었다.12)"

  張懷瓘에 이르러 "張芝가 금초를 변화시켰다.13)"고 제기한 금초 양식은 어떤 초서이며, 초서 중에 "일필휘지로 이루어졌다.14)"고한 大草의 요소는 존재하는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말미암아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나라가 흥하고 초서가 있었다.15)"고 하는 이 점은 인정되며, 게다가 官方文字로써 秦章의 공문서에 사용되었음은 孝武帝(『史記·三王世家』)와 章帝 시기『書斷』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張芝가 출생하기 전에 章草는 바로 이미 성숙되었지, 결코 그가 별도로 창조할 필요가 없음을 설명한다. 張芝 시대에는 동한 말기에 처하였는데, 바로 서체가 분열되고 변화되는 시대였고, 게다가 초서를 주로 구축한 시대였다. 이것은『非草書』가 가장 잘 증명해 준다. 동시에 동한 말기 趙壹은『非草書』중에서 두 가지의 초서 개념, 이른바 "隸草"와 "오늘날 초서를 배우는 사람16)'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게다가 "급속함을 재촉할 뿐이다.17)"와 "오늘날 도리어 어렵고 더디었다.18)"고한 두 종류의 서사 방식을 열거하였다. 게다가 왕희지 등 고대 초서 서예가 모두 한번에 그치지 않고 張芝의 초서를 언급하였다. 왕희지는 그의『自論書』에서 이른바 "장지의 초서는 오직 기러기의 행렬(종요 등과 어깨를 견줄만함을 비유)에 상당하다.19)"고 언급하였으며, 손과정은『書譜』에서 이른바 "장지의 초서를 비교하면, 왕희지의 해서를 여분으로 여기고, 종요의 해서를 비교하면, 왕희지의 초서를 훌륭하게 여긴다.20)"고 王羲之와 鍾繇·張芝를 비교하여 언급하였고, 또한 唐 시기 서성으로 추앙된 왕희지를 결코 張芝보다 능가하지 않다고 여겼다. 동시에 장지보다 시기적으로 빠른 여러 竹木簡과 磚銘 중에서 이미 후세 금초의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 금초는 동한 말기에 성숙되어 서체의 표준을 도모하였다.

  張懷瓘 등의 사람들이 말한 바와 같이 張芝의 초서에 이르러 "띠를 하나 뽑으면, 다른 뿌리들도 곁붙어 뽑혀나오 듯 상하가 연루되고 연결되었다.21)"고한 "一筆書"를 함유한 대초인지의 여부로 말한다면, 이 문제는 서예계는 물론 더 나아가 문학계에서 쟁론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閣帖 중에서 수록된 부분적인 張芝의 連綿 大草는 시대의 서풍에 합당치 않아 위작이라고 여기나, 그가 서사한 장초『秋凉平善帖』은 그의 작품으로 여긴다. 그러나 만약 시풍에 비추어 보면, 그의 장초와 당시의 簡牘 장초의 서풍은 용필 상에서도 매우 많이 서로 다른 곳이 있으며, 다름없이 역시 후세의 장초 서풍인데, 단지 자체만 장초일 뿐이다. 만약 장지의 대초를 부정하는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그러한 그의 장초조차도 당연히 모두 부인해야 할 것이다.

  장지의 작품은 천년가까이의 유전을 경과했는데, 宋代에 이르러 비로소 閣帖에 올려지게 되었다. 이 중간의 급변한 세월은 확실히 자료의 제약으로 인하여 매우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추론할 수밖에 없다.

  첫째, 장지는 확실히 초서(금초)에 대하여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둘째, 張芝보다 이른 簡牘 중에서 확실한 大草와 小草의 요소가 동시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流沙墮簡·殄滅簡〉중의 "反"·"功"(도 2) 등 字勢와 분방한 사법 및〈永元兵物簿〉의 "之"·"年"의 사법, 그리고 매우 많은 장초의 심한 생략과 소멸, 추상의 사법 모두 대초의 요소이다. 동시대 급인 새로이 출토된 東漢 말기〈曺氏宗族墓磚〉의 매우 많은 자형도 이미 비교적 성숙된 대초이다.

  셋째, 왕희지의 초서는 장지를 계승하였는데, 선택 상 자신의 애호가 있었고, 고상하고 뛰어나며, 성정이 부드럽고 온화한 한 부류의 소초 상에서 매우 크게 돌파하여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리고 붓을 들고 급히 글을 쓴 어떤 부분, 예컨대 "羲之頓首" 및 〈十七帖〉중의 부분사법은 국부적인 대초라고 여길 수 있다.

  넷째, 閣帖 중에서 거두어들여 새긴 장지의 초서는 모두 후세의 정취를 띠고 있다.

  이상의 분석에 기초하면, 금초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을 할 수 있다. 금초의 발생기에는 결코 그것들을 다시 대초와 소초로 나눌 뜻은 없었으며, 대초와 소초의 서사는 동시에 존재하였고, 장초와 구별하기 위해서 금초라고 일컬었다. 나중에 이르러 왕희지는 서성으로 추앙되었고, 그의 글은 후세에 초서를 배우는 본보기가 되었으며, 특히 장욱 등 순수한 광초의 출현이었고, 구별을 하기위해 왕희지·지영·손과정 등 비교적 독립되고 규범적인 초서를 소초 혹은 금초라고 불렀고, 분방하고 구속되지 않으며 자체가 여유 있고 이어져 끊이지 않은 초서를 대초 혹은 連綿草라고 불렀다. 狂草 즉 대초를 쓸 때 정서가 분방하고 격렬함을 말하는데, 이러한 정서 하에서 서사한 대초는 筆墨·線條·章法構圖 등이 분방하고 제멋 대로한 듯하다. 그래서 대초 중에서 가장 분방한 서사이며, 후세 일반적으로 張旭·懷素·徐渭 등의  대초를 가리켜 광초라고 한다. 그리고 비교적 학문이 깊고 태도가 의젓한 부류에 대하여 대초, 혹은 連綿草라고 많이 부르지, 결코 광초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상의 근거와 구분을 명백히 하는 것 또한 소초와 대초의 특징을 이해하기 더욱 쉽다.

  소초 또한 今草 혹은 獨草라고 부르는데, 字體 상에서 보면, 소초는 글자마다 많이 독립되었으며, 비록 연루와 연결이 있어도 필봉 하에 드러나 있지, 결코 상하 두자 그 字體의 자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字勢 중에서 필획은 비교적 뚜렷하게 서로 응대하였고, 提按 변화는 비교적 많으나, 언제나 자형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소초는 장초의 波磔 필법을 벗어 냈으며, 결체도 楷行의 요소로 인하여 점차 장초의 扁方 결구에서 長方 결구로 변화되었다. 대표적인 서예가는 王羲之·王獻之·智永·孫過庭 등이 있는데, 광초 대가 懷素조차도〈小草千字文〉를 쓴 적이 있다.

  大草도 狂草 혹은 連綿草라고 부르는데, 結字 상에서 보면, 글자마다 독립된 경계선을 타파하였고, 中途筆의 거리는 한층 길어졌으며, 글자 안에서 연루되고 연결된 선은 왕왕 필획과 결코 구별되지 않았고, 점획으로써 자태를 이룬 초서는 추상적 작용이 더욱 강렬하다. 간편하고 쾌속하기 때문에 왕왕 자체는 이어지고, 이어진 과정 중에 절주의 느낌을 크게 하였으며, 장초와 소초의 자형내부에서 변화 발전은 소조합(몇 글자의 조합도 단락의 절주라고 한다.)과 글자와 글자의 관계로써 변화되고 완성되어 더욱더 전체효과에 주의해야 한다. 또 자형의 구속력이 비교적 작은 원인 때문에 광초의 선조변화는 더욱더 추상화 되었으며, 표현력도 더욱더 강렬하게 되었고, 정서의 표현도 더욱더 자유자재하며, 더욱더 격정을 드러내기에 쉽다. 장욱이 "매번 매우 취하여 고함지르고 미친 듯이 걸으면서 바로 글을 썼다.22)"고 한 것은 바로 서사한 광초이다. 그런 까닭에 후세에도 왕왕 광초를 일컬어 "醉草"라고 하였다.

  大草의 대표 작가는 張旭 이외에도 懷素·黃庭堅·祝允明·徐渭·王鐸·傅山 등이 있다.

  초서는 한 서체로써 약정된 이후 바로 한 독립된 체계로써 발전하였으며, 이것은 그 중 몇 개의 초서종류가 발생할 즈음 일찍이 篆隸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특징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후세에 이르러 각 시대의 서예가는 이러한 서예 중의 각종 노력과 후세에 여러 가지 서체가 교차한 영향에 의하여 초서 발전으로 하여금 화려한 예술색채를 나타나게 하였고, 여러 가지 풍격이 병존하는 현상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후세 서예가들이 예술정감을 표현하는 주요한 서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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