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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 이전의 초서조건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6. 7. 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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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代 이전의 초서조건

 

  초서는 어느 시기에 기원했을까? 또 무슨 원인으로 탄생케 하였으며, 무슨 요소의 촉진 하에 발전하게 되었을까? 각 시대의 초서는 무엇 때문에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었을까? 이 확실한 것은 비교적 복잡한 문제여서, 반드시 草字의 함의와 그 변화요소를 재촉하여 빨리 이루어지게 했는지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草"자가 문자로써의 개념은 초고를 작성하다. 거칠고 침착하지 못 하다의 뜻이다. 그런 까닭에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무릇 난잡한 것과 똑바르지 않은 글자는 모두 초서라고 부를 수 있다. 때문에 宋代의 성리학자 張栻은 말하길 "초서는 반드시 근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찰 이래로부터 바로 있었으며, 자유 분망하게 써서 초서가 되었다.1)"고 언급하였다. "草"자가 문자로써의 개념과 張栻의 견해에 근거하면, 초서의 기원은 갑골문시대까지 추론하기 쉽다. 이렇게 보면 서예를 배우는 사람, 특히 초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력을 잃게 한다. 때문에 갑골문을 막론하고 금문 역시 실물 상에서 분석하면, 실재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어느 한편의 갑골문, 혹은 금문이 정성스럽고 바르게 서사했으며, 거칠고 침착하지 않게 서사했는지! 갑골문 또는 금문 중에 어느 것이 "草字"이며 "正書"인지 확실히 분별하기 어렵다. 때문에 광의의 초서는 서예학과 문자학에서 언급한 초서가 아니다. 엄격한 의의로써의 篆隸 行楷가 병렬된 서체 ― 초서는 특정의 범위와 여러 속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초서는 어느 정도 오랜 세월을 거쳐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이며, 완정함이 있는 서예계통은 기타 서체와 구별되어 사용된 문자를 독립되게 하였다. 그렇다면 바로 비교의 방법으로써 이러한 서체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正體와 서로 비교하면, 초서의 최대 특징은 다음과 같은 몇 개방식에서 표현된다. 첫째 省減과 代替이다. 상응한 正體의 자법은 완정한 결구을 요구하나, 초서는 매우 많이 중요치 않은 일부분을 생략할 수 있으며, 어떤 일부분은 점선으로 대체할 수 있다. 둘째 필획과 필획 사이이다. 결구 중 각종 부분의 관계사이는 왕왕 遊絲2)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遊絲로 연결된 결과 초서의 결구형태와 필획형태로 하여금 변혁을 발생케 하였다. 셋째 변방부수의 새로운 약속이다. 예를 들면 正體 중의 "言" "사람인 변"은 서로 다르나, 초서에서는 오히려 이따금 한 종류의 부호로 쓰는데, 이것은 더욱이 초서 중에서 합병한 현상이다. 이상 세 가지의 관계는 필획의 연루와 연결을 빠르게 서사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에 필획의 연루와 연결은 또 부수로 하여금 합병을 출현케 하였다. 빨리 서사하기에 편리한 省減과 代替가 출현하였기 때문에 초서로써 그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省減과 代替이고, 둘째는 연루와 연결이다. 생략과 연결의 기초위에서 출현되어 오랜 세월 사회적으로 약속된 서체가 초서체이다. 이 때문에 초서가 體를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 고려해야 하는데, 두 요소 중 하나만 부족해도 될 수 없다.

  마땅히 이 두 요소의 출현은 선후 순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省減과 代替의 발전은 비교적 이르나, 연루와 연결이 출현한 것은 비교적 늦다. 때문에 초서가 體를 정하는 요소의 구비는 비교적 긴 과정이었으며, 문자규율의 매우 많은 제약을 받았다.

  문자는 초창기에 편안한 서사의 省減과 代替를 수반하였다. 최초 상형 문자는 대체적인 물체

    "(虎) 자와 같이 조기의 갑골문은 주둥이와 몸통의 줄무늬를 그렸으나, 후에 간편하게 매우 많이 생략했다. 특히 선을 잡아 늘려서 몸통 등을 대체하였다. " "는 바로 省減과 代替를 한 가장 좋은 예이다. 당시 어찌되었든 관계없이 省減과 代替는 줄곧 역시 호랑이 모습과 비슷해야 했지, 초서의 연루와 연결로써 서사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의 상형성은 연루와 연결의 사용을 제약하였으며, 이어진 선조를 매우 어렵게 사용해서 호랑이와 비슷하게 그려야 했다. 금문의 계통 역시 상형의 둘레 하에 있었다. 때문에 어떻게 마구 주조하거나 각을 했는지를 막론하고, 역시 필획의 선조와 선조의 독립성, 형의 모방성을 지켰다.

  문자의 발전에 따라 상형성은 점점 符號性의 요소 때문에 압도되었다. 인간이 서사할 때 더 이상 도형이 어떤 물체인지 분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이것을 하나의 기록 語音과 語義의 부호로 간주할 시기, 문자는 더욱 점점 더 이른바 "隸變3)"을 낳게 하였다. 〈楚王恙鼎, 盤銘〉,〈侯馬盟書〉,〈六國兵器銘文〉,〈楚王天湖簡(포산초간 참조)〉에서 모두 볼 수 있듯이 象形은 매우 큰 파괴를 입었으며, 초서의 요소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그러나 문자사용의 타성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이때 연루와 연결은 여전히 매우 적거나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전환의 요소는 이미 연루와 연결이 출현하게 되어 자형의 토양을 마련하게 되었다. 전국 말기에 이르러 秦國에서 출토한〈靑川木牘〉,〈天水秦簡〉에서 바로 이러한 발전의 결과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蟲"자는 "   "로 쓰고, "足"자는 " ,     "로 썼으며, "色"자는 " "로 썼고, "책받침변"자는 "  "로 썼으며, "止"자는 " "로 썼다. 이미 省減과 연루와 연결은 나란히 일체가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합은 비로소 초서를 진정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초서체로 되게 하였다. 당연히〈天水秦簡〉역시 다만 소수의 草字이며, 대부분 서체는 역시 古隸여서 엄격한 의미에서 초서로 간주할 수 없다. 때문에 서체로써 반드시 계통이 있어야 하며, 사회에서 공인되어야 하는바 함께 사용하는 문자가 되어야 한다. 이따금 출현한 초서 사법으로 말한다면, 결코 형체를 이룬 체계가 없으며, 단지 양적변화에서 질적 변화에 이르는 과도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西漢에 진입한 이후, 竹木簡 중에서 이런 사법의 비중은 더욱 증가되어 지위 역시 분명히 높이 올랐으며, 초서 역시 진정으로 성숙기에 들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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