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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草書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6. 7. 2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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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草書

 

  漢代는 강성한 제국이었으며, 중국 서체 발전변화에 있어서 가장 강렬한 시대였다. 漢朝 426년간 篆書 외에 모든 서체가 완성되었으며, 초서분야에서 章草와 今草 모두 體를 정할 수 있었고, 게다가 대대적인 업적이 있는 초서작가가 동시에 출현하였다.

  漢代 초기의 초서는 章草를 위주로 삼았으며, 중요한 서적이 대량으로 竹木簡 중에 현존하고 있다. 출토한 대량의 竹木簡 중에 초서발전과 성숙의 자취를 볼 수 있다.〈天水秦簡〉중에 자형이 기울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일부분의 필법은 간단하게 생략하여, 연루되고 연결되어 있으나, 대부분 여전히 秦隸의 풍모이다. 이러한 풍모는 漢代에 이르러 매우 빠르게 양극 분화의 정황이 출현하였다. 한 부분은 더욱 정연하고 편평하게 되어 隸書가 간편하게 이루어 졌으며, 최후로 발전하여 漢代의 隸書가 되었다. 다른 한 부분은 더욱 방종하고 기울어지게 해서 성향으로 변화 발전되어 한대의 예서가 되었다. 초서의 線條 상에서 발전한 부분이 주요하게 차츰차츰 省減과 연루와 연결의 비중을 크게 하여 표현하였으며, 省減과 연루와 연결로 하여금 점점 고정의 규율을 형성케 하였다. 이러한 규율 상에서 약간의 비교적 고정적인 자형의 寫法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자형의 대량적인 출현은 마침내 초서로 하여금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비약을 생산케 하였고, 통일되게 사용한 漢代 초서를 출현케 한 것도, 바로 후인들에 의해  章草로 일컬어진 초서이다. 西漢시기 이미 공식적으로 초서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초서는 단지 원고에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기록에도 사용하였으며, 심지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도 초서를 사용하여 서사하였다. 漢 元帝시기의 史游가〈急就章〉을 지어 처음 장초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온다.(張懷瓘의『書斷』에서 언급하였음.) 현대 학술계에서는 각 방면의 논증을 거쳐 위작으로 판단하였으며, 게다가 하나의 서체가 한사람에 의해 창제될 수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민간에서 서사한 대량의 竹木簡 중에 장초는 이미 성숙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종류의 초서 簡은 서한시대 역시 매우 많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대표성이 있는 서적으로〈江陵鳳凰山木牘〉,〈神爵四年簡〉등이 있다.

  초서가 동한시대 접어들면서 竹木簡의 굵고 가는 선은 이미 상당히 성숙되었으며, 게다가 여러 종류의 서로 다른 풍모를 나타내고 있다. 초서 竹木簡의 수량 역시 크게 증가 하였고, 그 서사풍격은 각양각색이어서 嚴整하고 放縱하며 典雅한 것 등이 있다. 마치〈武威醫簡〉중의 초서 같이 용필은 이미 매우 많이 개성 있는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강건한 長筆·견고한 短折·연한 가운데 딱딱한 선·점획의 使轉 등이 분명하다. 木牘 초서의 기세는 雄渾하고, 산만한 형태의 布白은 미이 "넓은 시야로 균형이 잡히게 포치한다.1)"고한 매우 높은 요구를 형성하고 있는데, 어느 지방에 있는 甲骨, 金文과 우연히 일치되는 풍모가 있다.

  그 밖에 특색이 있는 것은 和帝 永元 5년에서 7년의〈永元兵物簿〉로써 70여점이 있는데, 이 簡은 방종하고 자유자재하며, 천진난만하고, 들쑥날쑥하고 성기며 빽빽하고, 긴축되고 느슨하며 자유자재하고, 모나지 않고 두루 너그러우며 경쾌하게 연속되어, 후대 글자마다 독립된 장초와 크게 다르며, 분방한 자취를 드러냈다. 게다가 簡중에 이미 여러 곳에서 두자가 서로 연결된 현상이 보이며, 극히 드물게 세자가 서로 연결된 의미도 있다. 唐 韋續, 蔡希宗은 이른바 "장제는 장초를 애호하였다.2)"고 언급하였고, 아울러 張懷瓘은『書斷』에서 "장제는 두도에게 초서로 업무를 기재케 하였다.3)"고 언급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장초는 이 시기 이미 朝野에서 통용된 서체이다.

  게다가 또 하나 저명한〈流沙墜簡, 殄滅簡〉이 있는데, 淸 羅振玉은 일찍이 이 簡의 "장초는 매우 정교하다.4)"고 평가하였다. 이 簡은 그에게 있어서 심적 가치를 볼 수 있다. 확실히 簡 중에서 매우 깊은 예술적 조예를 드러냈으며, 用筆은 정확하고 적절하며, 원활하고 典雅하며 구속되지 않았고, 결체는 널찍하다. 비록 한 행 일지라도 字體가 길고 납작하며, 크고 작으며, 움츠려들기도 하고 느슨하기도 하며, 자유자재하고 조화롭게 전체를 구성하여, 簡 중에서 초서 精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하나 제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동한 말년 문인 창작 및 초서 학습의 사승이 출현한 기록이다. 예를 들면『書斷』에서 "장지는 崔瑗과 杜度의 초서 필법을 배워 온고지신하였다.5)"고 한 것과『非草書』에서 "이에 후학의 무리들이 마침내 崔瑗과 杜度를 경모하였다.6)"고 한 것이다. 아울러 초서를 학습하여 광범위하게 "깊숙히 미혹된 자7)" · 추종자 · 감상자는 이미 이런 서체를 예술로써 감상하고 추종하게 되었다.『非草書』에서 말한바와 같이 "조정에서는 이것으로써 관리를 등용하지 않았다.8)"고 한 초서는 오히려 "고상하고 속세를 초월한 재주9)"가 있는 崔瑗, 杜度, 張芝 등에 의해 "학문을 넓히고 남는 시간에, 초서를 손가는 대로 썼다.10)"고 하였으며, 이후의 학생들은 다시 이것으로써 "한결같이 전용하고 노력하였다.11)"고 한다. 이런 것들은 바로 초서예술의 매력적인 작용이다. 이런 상황 역시 대대적으로 초서예술의 발전을 가속시켰다.

  동한 말기 최대의 초서 서예가는 먼저 張芝를 추거해야한다. 기타 명가로는 역시 崔瑗, 杜度, 崔實 등이 있다.

  張芝, 字는 伯英이고 돈황 사람이다. "연못에 임하여 서예를 배우니, 연못의 물이 다 검었다.12)"고한 고사가 유명하며, 게다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草聖" 으로 존경받게 되었다.

  張芝가 생활한 시대는 章草가 이미 성숙되어 보급과 발전이 무려 백년이나 되었다. "草聖"으로서 張芝의 章草 서사는 이미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현존하는 그의〈秋涼平善帖〉은 그가 쓴 장초의 대표작이다. 다만 그의 묵적이 당시 유전이 적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秋涼平善帖〉의 서풍과 용필은 당시에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 현재 역시 충분한 자료가 없어 증명할 수 없다. 다만〈秋涼平善帖〉으로 보면, 확실히 문인 장초의 대표작이다.〈秋涼平善帖〉의 草法 과 用筆은 지극히 서툴러 소박하고 적당하며, 부드럽고 매끄러움 중에 힘이 있어 보인다. 결체는 行氣의 氣勢에 따라서 변화하여 자연스럽고 유창하다. "八月九日"이 취한 모습과〈流沙墜簡·殄滅簡〉은 같은 기예의 묘가 있다. 때문에 張懷瓘은 "장초는 오직 장지가 그 절정을 이룩하였다.13)"고 말하였다.

  張懷瓘 등에 이르러 "장지가 금초를 변화시켰다.14)"고 하는 일설을 의심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특히 張芝의 今草 중에 大草의 부류를 함유하고 있어, 부정적인 사람은 그들과 같이 많이 있다. 유감인 것은 장지의 금초서 서적이 이미 유전되지 않고 있는데, 만약 서적을 볼 수 있다면, 초서사에서 장차 더욱 깊게 王羲之, 張旭, 懷素 등의 초서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지에 대한 금초서의 평론이 가장 훌륭한 것은 張懷瓘의『書斷』으로 이른바 "기이한 형태는 이합집산을 하였고, 다수의 필의는 모두 포괄하였다; 마치 거꾸로 매달린 원숭이가 골짜기의 시냇물을 마시는 모습인 듯 하고, 쇠사슬을 꼬부장하게 녹인 듯 하여,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자유자재하며, 변화형태가 무궁하다.15)"고 언급하였다.

  요컨대 한대 말기는 일차적으로 초서의 각체가 완성되는 시기이며, 많은 서예가와 민간 필경생의 공통적인 노력 하에, 이 서예 예술정서를 표현한 서체를 완성케 하여, 후대 학서 자들로 하여금 서예에서 충분하게 자아를 표현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각 풍격 면모를 갖춘 초서작품을 써 내개 하였다.

  漢 이후 초서는 각각 종류별로 병행 발전하였으며, 삼국시기에 저명한 장초 명작인 皇象의〈急就章〉이 출현하였다.

  皇象, 생졸년이 미상이며, 삼국시기 廣陵江都 사람이다. 字는 休明이고 杜度를 전승하여 "특히 장초에 뛰어났다.16)"다고 전해진다. 또 전서〈天發神讖碑〉역시 그가 서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急就章〉은 본래 한편의 교재로써 魏晉시대 서사한 사람이 매우 많다. 게다가 모두 장초로써 서사하였는데, 다만 皇象의〈急就章〉이 비교적 믿을 만하다. 그러나 皇象의〈急就章〉도 후대사람이 반복해서 모사하고 새겼기 때문에 筆法과 線條 상에서 적지 않게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나, 字形의 草法 상에서 보면, 기본상 본래의 모습을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장초 자법을 배우는 글씨본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急就章〉의 波磔 방법과 구도방식은 민간의 장초와 더불어 서로 참고하여 학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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