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왜 찍는가” 끝없는 물음[한겨레 신문] 흑백사진에 짤막한 단상 섣불리 ‘어떻게’를 가르치지 않고 사물의 진실을
길어올려 삶을 대입시킨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필립 퍼키스 ‘사진강의 노트’
서점에 가보면 서가를 가득 메운 사진 책들에
놀라게 된다. 책들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 양과 질의 풍부함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언제부터인가 사진은 사람들의 중요 관심사로 자리 잡은
인상이다. 왜? 그럴까. 말 할 것도 없다. 인터넷으로 말미암은 폭발적 필요 증대 때문인 것이다. 이제 대중은 더 이상 남의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시대, 문화 생산자로서의 대중은 사진이란 강력한 무기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럼 우리는 사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대답은 아쉽게도 ‘별로 알지 못 한다’다. 이는 사용자의 책임이
아니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찍어대는 사진 행위만이 사진이라 믿는 조급함을 진정시킬 정리의 방법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이 근원적 물음의 답을 누군가는 말해 주어야 할 때다.
어찌하다 보니 나도 이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남들을 가르친다는 것, 이는 두려움과 기쁨의 상반된 감정을 오가는
일이다. 두려움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자신감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기쁨은 강의를 매개로 사진의 실체를 탐구해 가는 관심의
공유다. 횟수가 반복되면서 기쁨보다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알고 있는 것은 과연 진실인가? 점점
아리송해질 뿐이다.
이 두려움을 해소시켜줄 좋은 방법은 더 나은 스승을 만나는 일일 게다. 최근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에서 제대로
된 스승과 만났다. 사진가이자 40년 넘게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쳐온 필립 퍼키스가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의 미덕은 사진을 통해 삶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보여주는 데 있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사람만이 말 할 수 있는 진실의 힘은 전율이었다.
필립 퍼키스가 사진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면 난 당장 책을 덮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는
어떻게(HOW)가 아닌 왜(WHY)란 관점에서 사진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 사진의 외형이 아닌 의식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근원적 의미는 자신 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삶의 의미를 재조립하는 수단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책의 첫 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보트를 타고 왔다./모두 겁에 질려 있었고 병들어 있었다./그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이들은 두려움을 배웠다./그것이 인생이었다.”
나는 이 한 구절로 필립 퍼키스의 사진 철학에 매료되어 갔다. 오랜 세월
들과 산을 돌아다니며 사진찍는 동안 풀리지 않았던 ‘사진’이란 실체는 삶을 대입시키면서 정리되기 시작한다.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볼 줄 아는
선생의 안목은 대단했다. 사진 찍고자 하는 사물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사실의 전달이 아닌 감정의 진실로 끌어올린 사물의 의미가 바로
사진의 힘이라 설파하는 그의 사진론은 바로 의식과 행동의 정화였다.
필립 퍼키스는 섣부른 단정을 짓지 않는다. 마치 장자의 우화 같은 30여 개의 짤막한 글로 단상을 교차시킨다.
여기에 자신이 찍은 흑백사진을 함께 실어 작품과 의식의 일체를 잔잔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사물의 느낌을 자기 안에 내재된 감정과 기억으로
고정시킨 그의 사진은 시대의 자의적 해석만을 드러낸다. 크게 소리치지 않고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읽혀지는 그의 사진과 인생은 사진이란 행위의
의미를 곰씹어 보게 한다.
훌륭한 선생님은 많을수록 좋다. [윤광준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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