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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서예(書藝)사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6. 9. 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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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서예(書藝)사

중국 문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남겨진 유물을 근거로 한다면 기원전 3,000년경 황하유역의 문자와 함께 시작한 결승(結繩)으로부터 언급된다. 이 결승은 그 이후 삼황(三皇), 오제시대(五帝時代)의 대희씨(代戱氏)가 창제했다는 팔괘(八卦)와 서계(書契)로 이어진다. 그 이후 사관(史官) 창힐(蒼詰)이라는 사람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조적문자(鳥蹟文字)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바가 없다.

1) 은시대 (殷時代, B.C 1,120년경)
銅器에 각을 한 것을 금문(金文)이라 하고, 귀갑이나 수골에 새긴 것을 갑골문(甲骨文)이라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중국 문자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은대(殷代)의 문자 곧 갑골문자(甲骨文字)이다. 은대의 문자는 대부분이 동기(銅器)에 각(刻)을 하였으며, 귀갑(龜甲), 수골(獸骨)등에 새겨져 있다. 銅器에 각을 한 것을 금문(金文)이라 하고 귀갑이나 수골에 새긴 것을 갑골문이라 한다.
송곳이나 칼 따위의 날카로운 쇠붙이로 새겨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글자들은 선(線)이 거의 직선이고, 글자의 모양도 매우 간단하며 소박하다. 이런 귀갑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진 글자는 전쟁, 사냥, 농사등 여러 가지 일들을 神에게 물어보는 기록이었다. 갑골문은 초기에 있어서는 계각적(契刻的)인 書風이 많고 후기가 될수록 필사적이 되어 金文의 서체나 서풍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2) 주시대 (周時代, B.C 1,120~222년)
周시대에도 중국 최고의 석각(石刻)으로서 석고문(石鼓文)이라는 것이 있다.
이 시대는 정교한 청동기(靑銅器)가 만들어졌는데 기물(器物)의 형태가 우수한 만큼 문자의 조각도 우아하고 장엄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대의 문자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유문 종정고문( 文 鐘鼎古文)이라 하는데 이를 총칭하여 金文이라 한다.
殷의 갑골문과 비교해 보면 문자가 대체로 방형(方形)이던 것이 주대(周代)가 되어서는 원형(圓形)으로 바뀌면서 자형(字形)은 한층 장식성을 더하고 左右 균형이 유지되면서 線에는 대소의 구별과 함께 필의(筆意)가 더해지고 있다. 周시대에는 중국 최고의 석각(石刻)으로서 석고문(石鼓文)이라는 것이 있다. 제작년대(製作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것은 周의 금문과 진(秦)의 소전(小篆)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소산(所産)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석고문은 금문에 비해 자수(字數)도 많고 형태에 있어서도 上下左右의 균형미까지도 잘 이루어진 체로 유지되어 있는데, 한 字 한 字가 잘 조화(造化)되어 있어 훨씬 정제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3) 진시대 (秦時代 B.C 221~206년)
복잡하고 체계가 없는 대전(大篆)을 정리 소전(小篆)으로 통일시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키 위해 문자의 통일을 기했다. 이 시대의 재상인 이사(李斯)는 당시의 권량문자(權量文字), 동부(銅斧), 옥새(玉璽)등에 많은 필적(筆蹟)을 남기고 있는데, 복잡하고 체계가 없는 대전(大篆)을 정리 소전(小篆)으로 통일시켜 정치는 물론 문자통일과 서예사에 있어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시 제정된 문자가 석각(石刻)된 것으로는 태산(泰山) 및 낭야( 椰)의 석각이 있다. 이는 기념적 성격이 명확한데다 書의 형태에 있어서 고금 독보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후 정막이라는 사람이 전서체(篆書體)를 더 간략하게 하여 진예(瞋隸)라는 예서(隸書)를 창제하기도 했다.

4) 한시대 (漢時代 B.C 202~220년)
後漢은 예서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으며
漢代가 되면서 중국의 문화는 급진전되어 그 위세가 四方에 빛이 났다. 전한(前漢)은 문화가 발달하였고 정치문화의 기조를 유학(儒學)에 두고 서숙(書熟)을 열었었기 때문에 서예도 점차 발전하게 되었고 전문서예가도 배출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전서가 차츰 쇠퇴하고 예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書體는 진전(秦篆)과 고예(古隸)가 행해지고 팔분체(八分體)가 완성되어 일반 통용문자가 되었다. 또 前漢 末期에는 초서의 선구라고 할 장초(章草)가 생기기도 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문방구(文房具)의 발달로 서예 발전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후한(後漢)시대 서기 105년에 채윤(蔡輪)의 종이 발명은 서예는 물론 일반 문학 발전에 크나큰 공헌으로서 특이할 만하다. 後漢은 예서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藝術書가 발생 서예사상 새로운 시대로 부각되면서 서법, 서론(書論)등이 쏟아져 나온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팔분(八分)과 초서, 행서가 자연 통용되고 장식적인 비백체(飛白體)가 출현했으니 지금에 상용되고 있는 서체가 모두 출현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石刻이나 碑로서는 중후하며 기상이 넘치고도 묵중한 을영비(乙瑛碑), 예서의 비문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예기비(禮器碑), 잘 정돈된 漢碑의 전통적인 서풍인 사신전비(史晨前碑), 정교하고 깔끔하며 여성적이고 기교에 뛰어난 조전(曹全碑), 그외에도 서협송(西狹頌), 장천비(張遷碑), 희평석경(熹平石經), 서악회산묘비(西岳懷山墓碑), 윤주비(尹宙碑)등 명품이 즐비하다.

5) 육조시대 (六朝時代 A.D 220~589)
예서의 字形과 用筆法이 정리되고 세련되어지면서
삼국(魏,蜀,吳), 진(晋), 동진(東晋), 서진(西晉), 남북조(南北朝)에 걸친 360여년간의 이 시대는 서예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예서의 字形과 用筆法이 정리되고 세련되어지면서 해서체(楷書體)로 변모 해가는 과도기적인 시대이다.
위(魏), 오(吳)의 유명한 비각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북위의 대표작으로는 석문명(石門銘), 정도소제비(鄭道昭諸碑)와 고정비(高貞碑), 장맹룡비(張猛龍碑)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조상기(造像記)나 묘지명(墓地銘)이 있다. 그리고 東晋에서 서예의 大書聖인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가 나와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서쳬를 정리하여 완성해 보았다.
왕희지의 서체는 字形이 단정하고, 용필의 변화가 다양할 뿐 아니라 격조가 높고, 세련되며 온화하다. 그의 서첩으로 유명한 行書體로서 난정서(蘭亭 ), 草書體인 초월첩(初月帖), 해서(楷書)로 쓴 황정경(黃庭經)등이 있다. 왕헌지는 부친 왕희지의 영향을 받아, 해, 행, 초서 등을 잘 썼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중추첩(中秋帖), 지황탕첩(地黃湯帖)등이 유명하다.
위와 같이 書의 형성 과정을 대관할 때 중국의 문자와 書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用과 美와의 상극성이나 마찰을 극복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서체나 서풍을 빠꾸면서 각 시대에 순응하며 예술성을 지속시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6) 수·당시대 (隋·唐時代 A.D 581~907)
안진경(顔眞卿)의 출현으로 서법 혁신의 기운이
남북 양조의 통일과 더불어 서풍도 혼연히 융합하여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특히 해서에 있어서는 수의 정제, 온건한 서풍이 더욱 발전하면서 초당 三大家(虞世南, 歐陽詢,  遂良)를 거쳐 이른바 정해(正楷)의 진수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런후 안진경(顔眞卿)의 출현으로 서법 혁신의 기운이 나타난 것도 특기할 사항이다.
서법 혁신의 기운이 일어난 것은 初唐의 楷書가 해를 거듭함에 따라 형에 구속되고 法에 속박되어 性情과 雅趣를 잃게 된 반동으로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晩唐에 들어와 유공권(柳公權)등이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는 하였으니 楷法에 있어서 별다른 진전을 이룩하지 않았다.
한편, 이 시대에는 왕희지의 난정서나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가 주요한 範本으로서 받아들여졌는데 太宗의 진사명(晋祠銘), 온천명(溫泉銘), 이북해(李北海)의 여산사비(麗山寺碑), 저수량( 遂良)의 고수부애책(枯樹賦哀冊)등이 특이한 양식을 이룬 것이다.


7) 송·원시대 (宋·元時代 A.D 960~1368)
이 시대의 書는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개성을 발휘하려는
이 시대의 서예 작품의 감상과 임모에 치중하였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보고 감상하고 쓸 수 있는 법첩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새의 書는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개성을 발휘하려는 당시의 일반 문화에 적합한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였다. 이같은 취향에 따라 行草體가 즐겨 선택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이 시대의 能書家로서 제양(祭襄)의 書에는 만안교기(萬安橋記), 화금당기(畵錦堂記),등이 있는데 온건하면서도 醇美한 書를 남기고 있다. 일대의 문호이면서 서예도 능했던, 소동파는 赤壁賦), 취옹정기한(醉翁亭記寒), 식시권(食時券)등을 통해 개선적인 그의 서풍을 보여주고 있다.
미불(米 )은 古法에 충실한 가운데 一家를 이루고 있으며, 의고첩(擬古帖)이나 방원암기평지첩(方圓庵記評紙帖)등 학습에 휼륭한 範本으로서 평가된다.
元시대의 조맹부는 왕희지풍을 배워 일가를 이룬 인물로서 그 중요한 書로는 行書 千字文과 현묘관삼문기(玄妙觀三門記) 등이 있는데, 그의 책속에서는 진당의 書와 같은 품격이 보이고 있다.

8) 명·청시대(明·淸時代 A.D 1368~1912
은나라때의 갑골문자를 발견함으로써 문자 표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특히 왕실에서 서예를 전통적인 문화로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사대부나 고위 관리들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 ), 왕헌지의 임락의론(臨樂毅論)등의 법첩을 임모하였으며 약 300년에 걸치는 오랜세월 동안 행초서가 유행하여 능서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明나라의 서예가로는 고법을 따른 문징명(文徵明), 동기창( 其昌)등과 개성을 강하에 표현한 祝允明의 장서도(張瑞圖), 왕탁(王鐸)등이 있었다.
淸나라에서도 옛 법첩을 존중하여 글씨를 썼으며, 고증학의 발달에 따라 金石學의 연구도 성행하여 고대의 원비에까지 주목을 하게 되었다. 또한 1899년에 하남성에서 3천~4천년전의 은나라때의 갑골문자를 발견함으로써 문자 표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전예에 능한 서가로는 등완백, 양기손, 오양지, 윤묵경, 조지겸, 오대징, 오창석 등이 있으며, 行草에 능한 유석암, 하소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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