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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의 역사와 기법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6. 9. 1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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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의 역사와 기법

우리나라 서예는 한자가 전해진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지만 남아있는 유물들은 삼국시대 이후의 것으로 금속재그릇이나 비석등에 새겨진 금석문(金石文),목판전적(木板典籍),법첩(法帖: 글자체와 필법의 본보기가 될만한 명필의 글씨들을 모아놓은책), 진적(眞蹟)등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의 범위로는삼국시대 부터의 서예사를 기술할수 있다. 글씨체는 넓은 의미로 세계각국에 쓰이는 글씨의 표현형식을 말한다. 그러나 한자문학건에 속하는 우리나라 에서는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자의 서체가 주류를 이루다가 조선조 세종연간에 우리나라 만의 독창적인 글자인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이후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궁체와 한글판본체 가 형성되었다.

 

한자의 발생을 살펴보면, 복희씨(伏犧氏)가 만든팔괘(八卦)나,황제(皇帝)시대의 사관(史官)이 만든 새 발자국이나 나무가지를 닮은 글자가 있다고 하나, 이것들은 문자 이전의 부호였으며, 글자의 효시는 은(殷)나라때 거북이나 짐승의 뼈에 새긴 갑골문(甲骨文)이다. 주(周)대에는 악기나 제기(祭器)등의 청동기 표면에 새긴 종정문(鐘鼎文)이 있으며, 동주시대에는 북처럼 만든 열 개의 돌에 새겨진 석고문이 출현하였다. 특히 동주의 태사(太史)사주가 대전(大箭)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그책에 사용된 글자를 책이름을 따서 대전이라고 하였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후 승상(丞相),이사(李斯)에게 이전의 복잡한 문자를 통일 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글자가 대전을 고쳐서 단정하고 균형미 있게 만든 소전(小篆)이다. 한편 진시황에게 죄를 지은 적막은 옥중에서 대전,소전을 간략하고 실용성 있게 고쳐서 예서(隸書)를 만들었다. 후한 초에는 유덕승이 행서를 완성하였으며, 후한 말에는 해서가 만들어 졌는데 해서,행서,초서는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기본 서체이다.

1. 해서(楷書)

흔히 정자체(正子體)라고 하는 것인데 누가 만들었는 지는 알수 없으나 가장 이른 예인 위나라의 종요라는 사람이 만든 범책이 이미성숙한 경지에 들어서 있으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 졌다고 본다. 해서를 쓰는 데는 한나라의 채옹이 신선으로 부터 배웠다고 전해지는 영자팔법(永子八法)이 기본이 된다. 길 영(永)자에는 글자의 구성요소인 전과획 삐침등이 모두 들어있어서 서체를 익히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2. 행서(行書)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서체로 반흘림체 이다. 행서는 한나라때 유덕승이 완성한것의 위나라 초기의종요와 호소가 계승한 것으로 흔히 해서를 빠르게 쓰려는 것으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행서가 해서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서체의 발달과정을 보면 예서에서 초서가 생겼는데, 초서를 익는 것이 너무 어려워 다시 예서로 환원 하려는 과정에서 행성 발생했다고 한다. 행서의 특징은 중용(中庸)이므로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방종하는 것을 삼가하고 획과 획의 필순에 따른 연결성을 터득해야 한다.

3. 초서(草書)

보통 행서를 더 각략하게 줄여서 흘려쓴 글씨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전서와 예서를 쉽고 빠르게 쓰려는 데서 초서가 발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초서의 창시자는 두도(杜度)라고 추정되며, 장지가 이것을 정리하여 기승한 이후 널리 쓰이기 시작하여 왕희지(王義之)에 의해 발전 되었다. 초서의 특징은 속기성에 있다. 속기를 일상문자를 약속된 부호로 간단하게 표시하여 누구나 약속만 알면 해독이 가능하듯이 초서또한 오래동안 사용되면서 이루어진 약자로써야만 읽어낼수 있는 문자적인 부호이다.

4. 전서(篆書)

서체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읽고 쓰기도 가장 어려운 글씨체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있는 전서체는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 시켰던 그 소전으로서 왕실과 관청의 의식용 표기체 였다. 전서의 특징은 필선의 굵고 가는 변화가 없어야하고 필획이 둥근 듯 하면서도 둥굴지 않고 모난 듯 하면서도 모나지 않은 것이다. 획과 획이 맞다은 자리에는 흔적이 없어야 하며, 가로와 세로의 획은 반드시 수평과 수직의 개념을 잘 지켜서 전체적으로 장방형의 형태여야한다.

5. 예서(隸書)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되던 전서가 너무 복잡하여 간략하게 고쳐서 전서에 예속시켰기 때문에 예서라고 불렀다고 한다. 추사(秋史) 김정인은 예서를 쓸 때 학문적인 수양이 필요하다며 반드시 옛스럽고 졸박한 것을 으뜸으로 삼고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문자향: (문장에서 풍기는 멋스러움)과 서권기: (책을많이 읽은사람에게서 나오는 아취)를 강조했다. 예서에서 가로획의 경우 파책 은 한 글자에서 한번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냥획을 사용해야 한다. 세로획은 못의 윗부분이 자려나간 듯이 시작하여 끝은 쇠토막이 구부러진 것 처럼 써야한다.

 

예서는 근본적으로 삐침과 경사선 점획없이 어떤 각도나 형태로든 수직과 수평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전통시대에는 서예와회화를 별개로 구별하지 않고 함께 서화(書畵)라고 했는데 그것은 중국의 한자가 그림에서 비롯되서 서(書)와 화(畵)의기원이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다. 더욱이 서화는 모두 기본적으로 지필묵(紙筆墨)을 재료로 사용하며,필묵(筆墨)의 운용(運用)이나 기법 및 제작태도 등에서도 크게 차이가 없다. 이러한 내력으로 보아 정리 해보면 서체완성의 순서는 전서-예서-초서-행서-해서 순으로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때 한자가 유입되어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의 서예자료는 주로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것들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자료로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로 힘찬 예서체로 되어 있으며,백제는 사택지적비와 무녕왕릉의 묘지석으로 중국육조시대에 유행한육조풍의 해서로 쓰여있다. 신라초기의것으로는 육조의 영향을 받아 고졸(古拙)한 해서로 쓰여진 황초령비와 진흥왕순수비 등이있고, 통일후에는 중국 당나라 서체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 구양순 서법이 고려시대까지 계속 유행 되었다. 고려시대의 서체로는 해서는 구양순체가 행서는 왕희지체가 대부분 차지하고 고려말에는 원나라와 밀접한 교류에 따라 조맹부의 송설체가 조선초기 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초기에는 천자문이나, 적벽부 등이 송설체로 쓰여져 일반인에게 까지 유행되었으나 곧,중국 명나라의 문징명등의 서체와 섞이게 되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서예가 들로는 , 몽유도원도의 발문을 쓴 안령대군과 선조때 우리나라 서예사상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한 한호(한석봉)가 활약 했다. 그는 왕희지체를 비롯해서, 행서,초서,해서,에 모두 능했으며 서당에서 한석봉체를 본보기로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나라 서예에 끼친 영향이 크다. 그후 백하체라는 품위있는 서체를 이룬 윤순과 초서에 능한 이광사 서화에 뛰어났던 강세황과 청나라에서 유행한 금석학의 영향으로 독특한 추사체를 만든 김정희 등이 유명한데 이들의 진적은 오늘날 까지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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