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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 서예(書藝)사

☞墨香·서예배우기/서예·이론공부

by 산과벗 2006. 9. 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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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韓國) 서예(書藝)사

 

우리나라에 漢字가 들어온 시기는 紀元前 3~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자료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書는 각 시대에 따라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우세남을 비롯하여 송·원(宋·元)의 소동파등의 書家들의 영향을 받아 발전 되었다.

1) 삼국시대(三國時代)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의 漢族과 더불어 정치적, 문화적으로 업적을 이룩한 고려시대의 書로는 광개토대왕비가 그 특출한 유물로서 남아 있으며 이외에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地)와 평양각석광개토대왕호간명(平壤刻石廣開土大王壺杆銘)이 당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7m나 되는 거대한 것으로 한 字의 크기가 30Cm나 되고 예서이면서도 해서의 기운이 있는 고구려의 고아하고 웅건한 서풍을 나타내고 있다. 百濟의 유물은 많지는 않으나 무령왕릉(武零王陵)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서 나온 사택적비(砂宅智積碑)등이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碑가가 北朝의 서풍을 띠고 있는데 비해 백제의 무령왕릉지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품이며, 사택지적비는 순수 남조풍이 아닌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한다. 유려하면서도 기풍이 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 백제문화의 높은 수준을 헤아릴 만한 것이다.
新羅의 유물은 경남 울주군에 있는 휘애각(麾崖刻)을 비롯 진흥왕(眞興王의 창년탁경비(昌寧拓境碑)를 위시한 세 곳의 순수비, 그리고 남산신성비, 적성비등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 당시의 서법의 대체로 중국 남북조 시대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자유분방하게 운필한 가운데에서도 장중하고 우아한 품격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2)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唐의 것을 받아들이면서 書法도 많은 발전을 이룬 시기이며 유물 또한 많이 남아있다. 이때의 서체는 초기에는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주류를 이루다 이후에는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많이 썼다. 이 당시의 명필 대가로서 최치원, 영업, 김언경, 김 생 등이 있는데 특히 최치원은 대학자인 동시에 명필가로서 또한 김생은 예(隸), 행(行), 초(草)에 능하여 人神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우리 역사상 이른바 筆仙으로 일컬어질만큼 숭상되고 있다.
이 시대의 유물로써 화엄석경(華嚴石經), 법경석경(法經石經), 금판금강경(金板金剛經) 등의 명품들이 있으며 이외에도 금석문이 많이 있어 이 시대는 우리나라 書의 전성기라 해도 무방할 만한 시디였다.

3)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이 있어서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기본 과목 외에 眞書, 行書, 篆書의 각 실기를 보게 되었는데, 이 제도가 書의 보급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서법은 唐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歐陽詢體가 많았다. 중엽에 이르러 大書家로 고승(高僧)인 동시에 명필가인 僧 단연(但然)의 書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은 굳센 骨이 있다하여 金生과 더불어 神品이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가 남아있다. 한편 중엽에 뛰어난 서가로서 유공권과 김효인이 있는데 현오국사비(玄悟國師碑)와 보경사원진국사비를 각각 남기고 있으며 특히 김효인의 보경사원진국사비는 단연(但然)의 서법을 이어 받은 명품이다. 고려의 말기에는 元의 우집, 조맹부, 구양현등의 깊은 유대를 갖게 됨에 따라 조맹부의 서법을 따르는 이가 많이 생겼다.

4)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에는 고려 때 들어온 조맹부체를 그대로 따라 한동안 풍비했으나 임진란을 전후한 즈음부터 書聖 왕희지를 추앙하는 기운이 일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왕희지에 대한 숭상과 관심은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는 법첩들이 범람하여 엉뚱한 글씨들이 방방곡곡에서 쓰여지게 되면서 書 발전에 저해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무렵의 서가로서는 많은 적공으로 글씨를 연마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친 명필 석봉 한호(石峰 韓濩)가 있다.
정조(正祖)이후 淸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중국에서 새로이 일어난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서법이론은 한층 활발해진다.
문자학과 금석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박제가, 신위, 김정휘, 권돈인 등이 중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게 되는데 이중 금석학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혁신을 이룩한 이는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는 처음에는 안진경, 동기창등의 서를 익혔으며 후에는 구양순의 서로 썼다고 하는데 그이 작품은 필법부터 분간포치(分間布置)에 이르기까지 격조 높은 겨잊에 올라 있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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