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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의 始祖 수로왕릉

☞역사·족보·전통/김해김씨·三賢派

by 산과벗 2007. 4. 3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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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의 始祖 수로왕릉 답사

 

☞ 답사일자 : 2007.4.29

☞ 누구와 : 나와 그리고 친구 부부

☞ 왜 : 가본지가 30년이 넘어

☞ 수로왕과 나의 관계 : 수로왕의 70대 손  

 

오늘은 날씨가 너무 깨끗하고 좋다. 철쭉이 손짖하는 산으로 달려가고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친구자녀 결혼식장 갔다 왔다. 집에 있으려니 너무 따분하다. 김해 친구 모친병문을 핑계삼아 

김해로 발길을 돌린다.날로 푸르름을 더해가는 연초록 봄내음이 너무 싱그럽게 다가온다.

병문을 마치고 수로왕릉에 잠깐 들렸다.

 

 

☞ 수로왕릉의 개요

 

▶ 명     칭 : 수로왕릉(首露王陵)   
▶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고대  
▶ 수량/면적 : 61,784㎡ (18,600평) 
▶ 지 정 일 : 1963.01.21  
▶ 소 재 지 :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   
▶ 시     대 : 가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김해시

 

                                               (수로왕릉 전경)                                                   

        

수로왕은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로 왕위에 올라 서기 48년 인도의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으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능의 경내에는 수로왕, 수로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등 여러 건물과 신도비, 공적비 등 석조물이있다. 능앞의 묘비는 조선 인조 25년(1647)에 세운 것이며 숭선전은 고종 21년(1884)에 임금이 내린 이름이다.

사적 제 73호.

 

수로왕릉의 이모저모(2007.4.29일 촬영)

 

 

 

 

 

 

[수로왕의 신화]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다.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 구지가).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그리고 천신(天神)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다.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뒤를 이었다.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수로왕릉 뒤편에 있는 산책로(아래사진)

김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연미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곳이였다.

 

 

 

 

 

 

 

 

 

 

 

 

 

 

 

 

 

 

 

 

 

 

 

 

 

 

 

 

 

 

 

 

 

 

 

허황후릉(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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