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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강원 고성

☞여행·가볼만한 곳/국내·사찰 답사

by 산과벗 2007. 3. 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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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건봉사 

절대 고요품은 민통선 안 최북단의 `고성 건봉사`
한국 전쟁 때 불탄 극락전 공터엔 야생화만이 여행객을 반기고… [일간스포츠 박상언 기자]  
 


강원 고성의 금강산 건봉사는 늘 조용하다. 남한땅 최북단 사찰로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불타 버린 데다 워낙 오랜 세월 민간인 통제 구역에 묶여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던 탓이다.

건봉사는 한때 한국 4대 사찰 중 한 곳으로 동해안 금상산권의 정신적 지주였다. 낙산사·신흥사·백담사 등 금강산과 설악산 일대 아홉 개의 절을 말사로 거느릴 만큼 대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웅전 등 일곱 채의 건물만 있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다. 오랜 세월 무관심 속에서 잊혀졌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춧돌에서 과거의 규모와 영화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 3000칸이 넘는 대가람이었다는데
정식 이름은 ‘금강산 건봉사’. 아마도 금강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어서인 듯하다. 실제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건봉산(911m)이다.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서봉사라 불렀고. 1358년(공민왕 7년)에는 나옹이 중수한 이후 건봉사라고 개칭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점은 건봉사가 융성기에 무려 3183칸이나 되는 대가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규모 덕분에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승병을 일으켜 훈련을 시켰고. 일제 강점기 때는 항일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봉명학교를 사찰 내에 설립·운영할 수 있었다. 

 
■지혜의 칼로도 지키지 못했다

절 입구에 불이문(不二門)이라는 누각이 있다. 사찰의 대문인 금강문 구실을 하는데 1920년 세워진 것으로 ‘두 가지 마음을 갖지 말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누각의 돌기둥 네 개에는 붉은 색 칼 문양의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불교에서 ‘예리한 지혜의 칼’이란 뜻으로 사찰 수호를 상징한다.

하지만 전능의 능력을 가진 금강저도 막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19세기 후반 큰 불로 많은 건물이 소실됐고. 남은 수백 칸도 한국전쟁 당시 모두 잿더미가 된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불이문과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돌다리 ‘능파교’(천연기념물 1336호)뿐이었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 종각 뒤로 너른 공터가 나온다. 한국전쟁 전까지 극락전을 비롯해 열 채의 건물이 있던 자리다. 돌계단과 주춧돌 등의 흔적 위로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천국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를 건너야 한다. ‘고해의 파도를 지난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30여 개의 돌이 반원을 이루고. 네모난 돌을 그 위에 수평으로 쌓은 석축 양식으로 1904년 세워졌다.

능파교를 건너면 바라밀 문양이 새겨진 두 개의 ‘10바라밀 석주’가 반긴다. 각 문양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열반에 들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의미하는데 건봉사의 일주문인 셈이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친견하다

건봉사에는 부처님 진신 치아 사리가 8과 봉안돼 있다. 원래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12과를 가져와 봉안했으나 8과만 남아 있다. 현재 부처님 진신 치아 사리는 스리랑카 3과를 더해 세계적으로 11과뿐이다. 이 가운데 5과는 일반인이 친견할 수 있도록 대웅전 옆 종무실 건물 내에 마련된 법당에. 나머지 3과는 절 뒤편 적멸보궁에 봉안돼 있다.

이 사리는 자칫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이 훔쳐 갔으나 사명대사가 전쟁 후 강화사로 가 찾아왔고. 1986년에는 도난당했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기도 했다.

■철책 너머 찾은 등공대

건봉사의 영역은 사방 십리에 이른다. 하지만 절터와 등공대를 제외하곤 대부분 출입 금지 구역이다. 등공대는 1248년 전인 758년 발징이 1만 일 동안 염불을 외는 염불 만일회를 열었는데 만일째 되는 날 마지막 회향을 했던 장소이다. 이것은 한국 불교 사상 첫 만일회였다.

이후 이 자리에 서면 성불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실제 31명이 육신 등천했다고도 한다. 오랜 세월 다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약 100년 전에는 인근의 한 여인이 거액의 시주를 내놓아 탑을 만들었는데 현재의 등공대탑이다.
워낙 영험하다는 소문으로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면서 건봉사 측에서 국방부에 줄기차게 개방을 요구했고. 그 결과 지난해 부처님 오신 날부터 출입이 가능해졌다. 종무소에 미리 신청하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

등공대에 가려면 건봉사 뒤편에 쳐진 민간인 통제 구역 철책문을 지나 30여 분 올라가야 한다. 철책문부터 등공대에 이르는 오솔길 좌우에는 철조망이 따라오는데 그 너머로는 온통 지뢰밭이다.
등공대에 오르면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영길 건봉사 종무실장은 “건봉산에서 내려다보면 건봉사가 연꽃 모양을 하고 있는데 등공대가 연꽃의 꽃술 자리”라고 설명한다.


 
■먹거리

건봉사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북쪽으로 가면 거진읍 산북리에 자리한 산북막국수의 막국수와 돼지고기 편육(사진)이 유명하다. 국산 메밀만 사용하는 막국수는 맛이 매콤하면서도 담백하다. 국수에 부어 먹는 국물은 연한 분홍색을 띠는데 지난 겨울 동치미에 생갓을 넣어 색깔을 낸다. 4000원.
편육은 씹는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고소하다. 함께 나오는 명태식해도 별미. 갓 잡은 명태의 살만 발라내 양념을 버무린 것으로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한 접시 1만원. 033-682-1733.

■가는길
1. 진부령→교동리마을(좌회전)→해상리→검문소→건봉사
2. 간성읍→대대삼거리(좌회전)→교동교(우회전)→해상리→검문소→건봉사

올여름엔 강원 고성의 건봉사를 찾자.



금강산 초입으로 휴전선을 넘지 않고도 금강산을 밟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다. 국도 46호선. 그 동쪽 끝은 강원 고성(간성읍)이다. 인제와 고성을 잇는 대간의 고갯길 세 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그중 유일하게 터널이 뚫리지 않은 진부령의 구절양장 굽잇길이 바로 이 길이다.
그 고개 너머 도로의 끄트머리쯤 건봉사(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이어지는 샛길이 나있다.

숲에 둘러싸인 호젓한 이 길. 건봉사에 이르러 끝이 난다. 절 앞 주차장. 차문을 여니 정신이 번쩍 든다. 또랑또랑한 계곡 물소리, 솜털 설 만큼 서늘한 기온, 숨통 트일 만큼 청징한 공기 덕분이다.
절터는 계곡물 좌우로 나뉘고 길은 계곡 왼편을 따른다. 그 길의 초입, 돌기둥 네 개로 떠받친 큰 문이 있다. ‘불이문(不二門).’ 부처를 향한 마음이 둘일 수 없다는 단호한 주문이다.

자박자박 계곡 물소리에 장단 맞춰 오르는 산길. 계곡 위로 무지개가 섰다.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니다.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능파(凌波)교’다. 다리는 계곡 왼편(남쪽)의 극락전, 팔상전(6·25전쟁 때 소실)터와 오른편(북쪽)의 대웅전, 염불전을 잇는다. 능파란 사바세계의 고통을 불법(佛法·부처님 말씀)으로 헤침을 이른다.
그 다리 건너 만나는 돌기둥 두 개. 표면에 다섯 개씩 상징이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이다. 이승의 번뇌에서 해탈,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열 가지 수행법이다. 대웅전은 그 석주 앞 누대(봉서루)의 통로를 지나 닿는 절 마당의 정면(북쪽)에 있다.

건봉사는 대찰이었다. 1930년대만 해도 국내 4대 사찰에 들었을 정도. 지금은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지만 당시는 거꾸로 신흥사와 낙산사를 거느린 본사였다. 그 건봉사를 규모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의병을 일으킨 호국불교의 터전, 이 세상 단 두 곳(스리랑카, 한국)에만 봉안된 부처님 진신치아 사리를 모신 사찰, 28년간 쉬지 않는 염불수행 ‘만일염불’의 도량으로 더더욱 이름났기 때문이다.
경내에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두 곳. 대웅전 옆 ‘만일염불원’과 계곡 건너 적멸보궁이다. 염불원에서는 투명한 ‘석가세존 치아사리함’(5과)을 통해 친견한다. 적멸보궁에서는 사리탑에 봉안(3과)됐다. 치아사리는 사연도 많다. 임란 때는 왜군에게 침탈당해 사명대사가 되찾아 왔다. 1986년에는 도둑을 맞아 총 12과 가운데 4과를 잃었다.
당시 도난당한 치아사리를 되찾은 경위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범인이 자발적으로 되돌려 주었는데 이유는 꿈. 웬 할아버지가 현몽해 돌려주지 않으면 후손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단다.

건봉사 계곡은 금강산 길목이다. 민통선이 절 뒤로 물러선 1989년까지 35년간은 불자의 범접조차 어려웠다. 그 민통선이 절 뒤로 지날 만큼 비무장지대에 가깝다. 남방한계선 철책도 예서 4km 북쪽이다. 산양의 서식지인 고진동 계곡(비무장지대)도 멀지 않다.

이런 건봉사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1km 거리의 ‘등공대’를 다녀오는 것. 이 전망 좋은 봉우리는 만일염불의 효시인 발징 스님의 다비식(758년)을 올린 곳. 민통선 철책 문을 통과한 뒤 최전방부대 보급로를 가로질러 지뢰 경고판이 설치된 철조망 친 오솔길로 간다. 숲길에는 들꽃과 산딸기도 많다.
건봉사의 멋스러움은 스러진 절터에 있다. 낙서암이 있던 터. 무너진 돌기둥을 들꽃이 덮고 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오솔길. 연꽃 피는 두개의 연못 사이를 지나 팔상전 옛터를 밟는다. 15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찰의 옛터는 수채화처럼 수더분하고 고즈넉하다.

여행정보
손수 운전 :국도 7호선∼속초∼고성∼대대리 삼거리∼국도 46호선∼건봉사 입구.
대중교통(시내버스)=4km 전방 해상리까지만 운행. 절까지는 걸어서 30분 소요. 버스 승차는 간성읍내.
▽입장료=없음. ◇등공대 트레킹 ▽신청=10인 이상 요청 시에만 사찰 측에서 동행 안내. 왕복 1시간 소요. ▽문의=종무소 033-682-8100 [고성:조성하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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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건봉사’, ‘길없는 길’ 끝에도 석가모니 숨결이··· [스포츠칸 2006-07-19 ]




속초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간다. 짙푸른 녹음, 쪽빛 바다가 출렁이는 길 끝은 북동쪽 최북단 마을 고성이다.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이곳에 사찰이 있다.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금강산 자락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사찰이다.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에 위치한 까닭에 한국전쟁 이후 통행이 제한되다 1989년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35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다 보니 세속의 때가 덜 묻었다. 인적이 뜸해 한적하기가 그지없는 이곳은 사명대사의 사리와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모셔 의미가 특별하다.

간성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거집읍 냉천리에 위치한 건봉사는 국내 4대 사찰 중 하나.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양이 연꽃을 닮은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해 원각사라 이름 붙였다.
이후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중수해 서봉사라 개칭했고, 공민왕 7년(1358년) 나옹화상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란 이름을 되찾았다. 세조 10년(1464년)에는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규모나 사찰의 내력으로 보아 건봉사는 한국불교의 대성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등 강원도 일대 대부분의 사찰들을 말사로 거느린 3,183칸의 대찰이었다. 하지만 1878년 산불에 사찰은 전소됐고, 이후 복원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폐허가 돼 현재는 신흥사의 말사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교동천 제방도로를 따라 홍예교를 건너면 고승들의 영혼이 봉안된 부도밭이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건봉사 관문인 불이문. 사찰 입구에 ‘금강산 건봉사’라 적힌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남한에서 시작되는 금강산자락 초입에 자리잡은 까닭에 금강산이란 이름이 덤으로 붙었다.

1920년에 세운 불이문은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입지 않아 온전한 형태다.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에 새져진 ‘미륵불’을 쓴 주인공이다.
‘두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불심 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의 이곳 불이문은 타 불이문과 달리 기둥이 4개다. 기둥에는 전쟁 때 맞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고, 앞 기둥 두 개에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예리한 지혜의 칼’로 불리는 금강저는 사찰 수호를 의미한다.

건봉사가 과거 번창했던 대찰이었다는 중거는 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일제 때인 1906년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이곳에 봉명학교를 세워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불이문 앞 사명당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비는 이를 기념한 것이다.
불이문을 뒤로하고 개울을 따라 걷다보면 길은 두 갈래. 맞은 편 길은 적멸보궁으로 통하고, 오른쪽 능파교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는 건봉사 대웅전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 숙종 30~33년(1704~1707년)에 축조됐으나 영조 21년(1745년)과 고종 17년(1880년)에 무너진 것을 최근에야 복원했다.

속세의 번뇌를 계곡물에 씻어버리고 다리를 건넌다. 대웅전에 이르려면 십바라밀을 거쳐야 한다. 두 개의 돌기둥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방편, 원, 력, 지 등 피안의 세계로 가기 위한 수행법이 담겨 있다.
십바라밀과 봉서루를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이 염불원이 있다. 염불원에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가 봉안돼 있다.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인 건봉사는 한국전쟁 당시 건물과 국보급 보물들이 모두 소실돼 안타깝지만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오던 길을 되돌아 능파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간다. 건봉사의 옛 절터였던 이곳에는 부처의 진신 치아사리 3과가 보관돼 있다.

건봉사에 들러 꼭 가볼 곳은 등공대. 건봉사 대웅전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간다. 왕복 50분 거리다. 굳게 잠겨진 두 곳의 철문을 통과하는 길은 사람의 발길을 타지 않은 전형적인 오솔길. 길 양쪽은 지뢰밭이다.
이곳은 과거 민통선 지역으로 묶였으나 10여년 전부터 건봉사 종무실에 사전 통보하면(10명 이상) 안내를 받아 갈 수 있다.

등공대는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발징화상이 신도 정신·양순 등과 함께 최초로 염불만일회를 개설한 곳. 기도결사에는 31명의 승려와 1,820명의 신도들이 참여했다. 당시 기도에 참여한 염불승 31명은 극락왕생했다. 1920년 돌무덤이었던 이곳에 한 신도가 100원을 보시해 탑을 세웠다.
탑 표면에는 무수한 총탄자국이 남아 한국전쟁 당시 이곳이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지금은 주춧돌만이 옛 번창했던 시절을 증거하고 있지만 사찰을 한 바퀴 둘러보면 금강산 남쪽 너른 자락에 대가람을 이루었을 당시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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