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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 청량사(淸涼寺)/경남 합천

☞여행·가볼만한 곳/국내·사찰 답사

by 산과벗 2007. 3. 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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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 청량사(梅花山 淸涼寺), 가을의 품에 들다
-가을, 매화산에는 산으로 부터 가을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나무에 절집에 드는 햇살의 품에 나도 가만히 안겨봅니다-


대구를 지나 해인사 가는 길, 88올림픽 고속도로는 추석 뒤 가을로 가는 길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가야산이나 매화산 인근뿐만 아니라 이 길을 곧장 가면 가을빛 짙어 가는 물 맑은 산청, 함양을 품은 지리산이 나오고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낮 시간으로 갈수록 들녘에 떨어지는 가을빛이 눈부시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소리 맑아서 일부러 속도를 줄이고 하늘, 산, 들판을 바라보며 유유자적이다. 커피 한 모금 과일 한 입 베어 물며 가을 속을 달리다 해인사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이어지는 국도 변에는 아직 물이 빠지지 않은 은행나무가 길게 줄을 서서 손님맞이를 한다.



◇ 가남루 앞의 풍경,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 들찔레

잠시 쉬면서 가야산 홍류동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들판을 보며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곳 가남정(伽南亭)에 발길을 멈춘다. 이곳은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태어나고 자랐던 문암 정인기·금월헌 정인함·우천 정인철·낙제 정인지 4형제를 위하여 문중에서 지은 정자인데 이들 모두는 의병장 정인홍(1535-1623)의 5촌 동생들로 선조(宣祖)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정인홍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정자 앞의 수령 400년 된 큰 느티나무 등걸 아래 그늘을 이고 앉아 물 흐르는 소리, 멀리 들녘의 황금빛, 낮은 산 위를 뒤덮는 푸른 하늘을 보는 기쁨은 소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이곳에 드러누워 낮잠 한 숨 자고 싶다는 욕망을 떨구며 길을 잡는다. 얼마안가 왼편에는 밤이면 달빛 흐른다는 월광천(月光川)이 보이고 우연히 최근 두 세 해 연속 들렀던 월광사지(月光寺址) 3층 석탑이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절터 뒤에 새로 세운 월광사의 공양주 보살 할머니의 꽃 키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란 걸 아는 사람은 알기에 그곳은 언제나 꽃대궐인데 아마 지금쯤은 꽃무릇이 마당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



◇ 청량사 에서 바라 보는 매화산의 가을 ⓒ 들찔레

오늘 가는 매화산(梅花山) 청량사(淸涼寺)는 이 길을 따라가다 해인사 조금 못 미쳐서 홍류동 지나는 왼편으로 길을 잡아야한다. 지난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날 찾았다 입산금지에 묶여 발을 돌려야했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다시 찾은 오늘, 매화산의 가을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매화산은 천 명의 부처님이 산다하여 천불산(千佛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남산 제일봉(1,010m)이라 불리기도 하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절은 막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 모습인데 드문드문 색이 변하는 나무들과 숲의 공기가 신선하다.

절터를 들어서면서 마당에서 보는 매화산 정상의 모습이 절집과 참 잘 어울린다. 친절하게 절 입구에는 <대웅전 가는 길>을 표시해 두었는데 절 중심으로 가는 길에는 오래된 멧돌을 멋스럽게 깔아놓아서 부처님 만나러 걷는 일이 즐거움으로 느껴지게 하는 배려라 여겨졌다.



◇ 대웅전 가는 길, 멧돌을 밟으며 길을 잡는다 ⓒ 들찔레

길을 올라 보게 되는 매화산 아래 청량사에서 가장 깊은 자리의 대웅전은 새로 지어졌다. 그러나 단아한 팔작지붕에 섬세하게 조각되고 세밀한 단청에 벽을 따라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진 대웅전은 그리 가볍게 보이지 않고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나 석등 그리고 뒷산과 잘 어우러져 보인다.

대웅전 마당에 널려 있는 옛 절터의 석부재에 앉아 햇볕이 환한 절을 조망하면서도 바로 눈앞에 자리 잡은 3층 석탑과 석등에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한 천천히 멀리서 그들을 조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것일수록 아껴보는 습관을 들여야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 햇살에 역광으로 잡힌 삼층석탑과 석등 ⓒ 들찔레

천천히 석탑 앞으로 발을 옮긴다. 청량사 삼층석탑(보물 제266호)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탑이다. 아랫 기단에 각각 두 개의 바깥기둥과 안 기둥이 있으나 윗기단에는 안 기둥이 하나로 생략되어 있으며, 특징적으로 두 기단의 갑석 끝 부분이 지붕돌의 낙수면처럼 약간씩 들려있다. 각각의 지붕돌은 5단의 층급받침을 하고 있으며 낙수면이 완만하고 몸돌은 맨 위에 남아 있는 노반에 이르기까지 높이와 폭이 비례적으로 줄어드는 모습이라 안정감이 더한다.

더구나 별 다른 장식이 없기 때문에 앞에 위치한 장식성이 강한 석등과의 조화가 더 잘 이루어져 보인다. 마치 탑은 키 큰 형과 같아서 고운 때때옷 입은 아우 같은 석등을 보듬어 안는 그런 모습이다.



◇ 청량사 삼층석탑 ⓒ 들찔레

이 탑은 이 주위에 있는 월광사지나 법수사지등의 절터에 남아있는 3층 석탑들과 같은 양식을 보이는데 아무런 장식성이 가미되지 않은 이런 3층의 전형적인 탑들은 보면 볼수록 좋고 날이 갈수록 친근함을 느낀다. 예컨대 장식이 두드러지거나 모양이 파격적인 이형탑(異形塔)들이 주는 느낌은 화려하고 새로우나 오래가지 못한다. 이에 반해 이런 전형적인 탑들은 묵은 친구처럼 그 화강암의 결하나, 이끼 하나에도 애틋함을 느낀다. 더구나 그런 탑들의 단순함이 주는 여유와 절제는 나에게는 또 다른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햇볕이 거의 수직으로 절을 내리꽂히고, 가을이라는 계절에 덧칠을 하는 한낮, 연화문 새겨진 석등 앞 배례석이 있는 자리에서 등 뒤에 해를 두고 청량사 석등(보물 제253호)을 바라본다.



◇ 청량사 석등 ⓒ 들찔레

네모난 지대석 위의 아랫돌인 하대석은 팔각이다. 각각의 면에 안상을 파고 그 속에 번갈아 사자상과 운상누각(雲上樓閣)을 돋을새김 해놓았다. 여기서 보는 사자상은 울산 태화사지 부도나 영암사지 금당 석축에 새겨진 그것과 닮아있는데 영암사지에서 나를 반기며 씩 웃던 사자상이 그립다.

장구 모습을 닮아 고동형(鼓胴刑)이라 칭하는 간석(竿石) 즉, 중간돌은 아래위로 각각 복련과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중간에 손아 나온 원형의 중심엔 띠를 두른 꽃을 부조해 놓았다. 다만 그 파임이 얕아서 지금은 뚜렷하게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아쉬움이 있다. 복련과 앙련도 다른 부도들이나 연화대좌등에서 보는 것처럼 조각의 파임과 솟음이 두드러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완벽해 보이지 않는 경향은 통일신라의 말기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 석등의 간주석 조각 ⓒ 들찔레

팔각의 화사석(火舍石)에는 네 면에 구멍이 뚫린 화창(火窓)이 있고 나머지 네 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들도 조각의 얕다. 더구나 지붕돌의 두께도 얇고 낙수면이 완만하여 무게감이 덜하며 상륜은 소실되어 없다, 다만 9세기 후반의 석등 양식에서 전체적인 균형미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탑과 석등 자리를 몇 바퀴를 돌아보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선다. 사시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인데 빈 대웅전 내부에는 마침 카자흐스탄 교향악단이 방분하여 한참 사진 찍기에 분주하고 불교의 의식을 모르는 그들 중 한사람은 중심에 모신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 265호) 앞에 앉아 엉성한 결가부좌를 틀고 사진속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경망스럽지 않게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퍼뜩 두어 장 사진을 찍는다. 이 불상은 210cm의 높이에 대좌 높이가 75cm이며 불신, 광배, 대좌 등 불상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석불좌상이다. 오른쪽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여래불은 나발위에 낮은 육계를 조각하였고 우견편단의 신라하대의 특징이 보이고 옷 주름이 도식적으로 평행하게 잡혀 부드러운 느낌이 덜하다.



◇ 석조여래좌상의 모습 ⓒ 들찔레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형태로 무릎위에 얹은 상태에서 손가락을 펴 아래로 내리고 있으며 왼 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에 오른 발을 외다리에 얹은 깅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뚜렷하고 바깥으로 불꽃 무늬와 작은 부처님 조각이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나 어째 불상에 비해 광배가 작아 보이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불상의 머리 부분이 상대적으로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광배가 작아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방형의 대좌가 놓여있는데 하대석에는 복련과 귀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중대의 두건을 쓴 듯 보살상이 또렷하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보존상태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서 9세기를 대표하는 석불좌상으로 꼽는다.

더하여 이 석불과 더불어 일가람 일 탑 양식에 충실하여 단아한 3층 석탑과 더불어 석등까지 제 위치에 각각 자리를 잡고 있는 절은 많지를 않다. 그런 면에서 이곳 청량사의 세 보물은 높은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받을 수 있다.



◇ 대웅전의 단청, 건물 안밖으로 용이 날고 있다. ⓒ 들찔레

그냥 있는 대로 보고 말면 그 뿐 일 것을 요모조모 얕은 지식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워 부처님 앞에 삼배한다. 돌아 나와 천천히 나오려는데 공양간이 시끄럽다. 밥 때가 된 것이다.

기와로 잘 쌓아올린 공양간 앞 굴뚝은 한낮에도 모락모락 가는 연기를 토해내고 가을 햇살에 녹아들고 있다. 그 모습을 굴뚝 앞에 핀 코스모스도 몇 살아남은 봉숭아도 나도 같이 보고 있다. 다 같이 가을 햇살 속에 안기어 가을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을에 안기고 녹아드는 것들 중 가장 먼저인 것이 나무들이지 싶은데 나무들도 종류에 따라 색깔들이 제각각이다. 이르게 빨리 가을로 달려가서 이미 붉어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 새파랗게 광합성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또한 같은 나무에서도 햇볕을 잘 받은 이파리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청량사의 가을, 햇살이 녹아들고 있다 ⓒ 들찔레

사람도 그러해서 급한 사람도 있고 느긋한 사람도 있으며 같은 뿌리를 두고 자란 형제간에도 마찬가지다. 이 가을 청량사 맑은 그늘에 서서 좀 더 느긋하고 조급함이 덜 할 나의 가을을 만들어볼 요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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