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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충남 예산

☞여행·가볼만한 곳/국내·사찰 답사

by 산과벗 2007. 3. 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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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041-330-2557) 수덕사(041-337-6565)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 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 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 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 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수덕사 대웅전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 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 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 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 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 입장료 : 개인 - 어른 2,000원 / 중,고등학생 1,5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 어른 2,000원 / 중,고등학생 1,200원 / 어린이 800원 (30명 이상)
이용시설
박물관 240평 규모 - 역사관 / 일반불교 미술관 / 경허,만공 기념관 / 중앙홀 전시대 / 불화관/ 비조관
도로안내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 국도21호선(35㎞) - 예산 - 국도 45호선(22㎞) - 지방도622호선(5㎞) - 수덕사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서해대교 - 당진I·C - 국도32호선(15㎞) - 합덕 - 지 방도622·609호선(16㎞) - 덕산 - 국도45호선(2㎞)·지방도622호선(5㎞) - 수덕사
대전 - 유성 - 국도32호선(81㎞) - 예산 - 국도45호선(23㎞) - 지방도622호선(5㎞) - 수덕사
현지교통
예산터미널 - 수덕사(06:25-19:15, 12회/일, 1시간 소요)
주요문화재 :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정보제공자 : 340-920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041-330-2557)

충남 예산 덕숭총림은 만공 선사가 기틀다진 선불교 본가 (한겨레 신문)


▲ 하안거를 마치고 정혜사를 떠나기 전 덕숭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선승들.

충남 예산 덕숭산은 조선시대 사실상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선을 되살려 근대 선의 첫새벽인 경허 선사의 가풍을 잇는 곳이다. 수덕사의 산내 말사인 정혜사는 덕숭산 정상 부근에 있는데, 경허의 제자인 혜월 선사와 만공 선사가 머물면서 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혜월이 51살에 부산 쪽으로 내려간 뒤 만공이 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옛부터 ‘사자의 포효에 백수의 뇌가 파열되며, 사자굴에 다른 짐승은 살 수 없다’고 했다. 만공의 문하엔 새끼 사자들이 몰려들었다. 보월, 금봉, 고봉, 벽초, 혜암, 전강, 금오, 춘성, 원담, 숭산 등 비구 선사와 법희, 일엽, 만성 등 비구니 선사 등 훗날 한국불교의 선을 일으켜세운 기라성 같은 법기들이었다. 따라서 신의 근본도량인 뜻의 선지종찰로 추앙된다. 또 덕숭산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었던 영산회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공은 선승들을 발심시키는 데 천재적인 기지를 발휘하곤 했다. 당시 내로라 하는 선지식 다섯 명에게 견성을 인가받은 전강선사에게 “네 깨달음은 저 불목하니(절 머슴)보다 못하다”고 단칼에 내리쳐버렸다. 이 말에 분심이 격발된 전강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처절한 정진 끝에 사자후를 토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인 김일엽이 처음 절을 방문했다가 밤에 화장실에 다녀와 자기 방을 못 찾아 여러 방문을 두드리자 다음날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 여성이 남자 생각이 나 밤에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다”고 공개망신을 주었다. 만공은 그런데도 일엽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그 자리에서 출가를 허용했다. 일부러 망신을 주어 그릇을 실험했다는 것이다.

덕숭가풍을 잇는 설정 스님은 “이제 좀 더 중생 구제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활발한 선풍이 덕숭산에서 어떻게 세상 속으로 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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