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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 안심사/충북 청원

☞여행·가볼만한 곳/국내·사찰 답사

by 산과벗 2007. 3. 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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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 안심사

물 긷고 땔감 나르는 일이 바로 神通妙用(신통묘용)

한 사람이 스승을 찾았습니다. 겨울이었습니다. 온몸으로 눈을 맞으며 제자로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눈이 허리에 찰 때까지도 곁눈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토록 처절했습니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와 이조(二祖) 혜가(慧可)가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달마 스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혜가 스님은 스스로 자신의 팔을 자르고 말합니다.

“저의 마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합니다. 부디 스승께서 저를 안심시켜 주십시오.”
이윽고 달마 스님이 답합니다.
“네 마음을 가지고 와라. 그럼 내가 안심시켜 줄 터이니.”
“마음을 찾으려 하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노라.”

선가(禪家)의 고전인 무문관(無門關)에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선문염송’과 ‘전등록’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 진표 율사가 목숨을 건 계행(戒行) 끝에 비로소 ‘안심(安心)’을 얻고 창건한 안심사(安心寺). 산세의 흐름에 순응한 가람 배치에서 자연에 어긋남이 없는 도인의 삶을 읽을 수 있다.

강남 아파트라는 ‘미친 바람’이 우리 사회를 집단적으로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무소유, 느림, 청빈, 웰빙 따위의 주제를 내건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소비되는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욕망의 가면무도회’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비극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심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천민자본주의 국가의 슬픈 초상입니다.

또 길을 떠납니다. ‘안심’을 찾는 혜가 스님의 심정으로 안심사(安心寺)를 찾았습니다. 절마당 앞 감나무에 매달린 까치감들이 마지막 가을볕을 받으며 졸고 있습니다.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선 팽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밟고 돌계단을 오릅니다. 구룡산이라는 이름과 달리 소 잔등처럼 순한 산자락에 기댄 전각들이 산세의 흐름을 따라 앉아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영산전(충북 유형문화재 제112호)의 석축과 계단이 먼저 눈길을 끕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서로 빈 곳을 채우며 영산전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조화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 조선 중기 건축의 전형을 보여 주는 대웅전(보물 제664호) 

정면으로는 역시 자연석 기단으로 터를 얻은 대웅전(보물 제664호)이 그윽한 눈길로 불쑥 찾아든 길손을 맞아 줍니다. 바람 한 줄기 슬쩍 산허리를 간지럽힙니다. 대웅전 옆 산자락에 선 은행나무가 파안대소합니다. 은행잎이 꽃비처럼 내립니다. 산마루에 선 소나무들이 은근히 웃습니다. 나도 따라 웃습니다.

안심사는 775년(신라 혜공왕 11)에 진표 스님이 창건한 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표 스님이 어떤 스님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전설처럼 전하는 스님의 출가 인연은 이렇습니다.

스님은 어릴 적 활쏘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을 가는 길에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서 물에 담가 두고는 사냥을 즐기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봄 어느 날 또 사냥을 나섰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문득 지난 일이 생각나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니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크게 뉘우쳤습니다. “어찌 먹기 위해 이렇게 고통을 받게 했단 말인가.”

스님은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금산사의 순제 법사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때 스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스님의 행적을 간단히 옮겨 보겠습니다.

순제 스님이 진표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으로 가서 간절히 참회하고 법을 구하라. 그리고 친히 계법을 받아 널리 세상에 전하라.”



▲ 진표 스님이 창건할 때 세운 것이라 전하는 세존 사리탑. 양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계를 받고 물러나온 진표 스님은 명산을 두루 돌다가 27살 되던 해 쌀 스무 말을 져서 말린 뒤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갔습니다. 쌀 다섯 홉을 하루 양식으로 삼고, 한 홉을 들어 쥐를 길렀습니다. 스님은 미륵상 앞에서 3년 동안 간절히 계법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미륵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벼랑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이 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스님을 안고 바위 위에 올려 주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분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돌로 온몸을 두드리는 참회를 했습니다. 사흘만에 팔이 부러졌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지장보살이 나타나서 금장(金丈)을 흔드니 손과 팔이 예전처럼 되었습니다. 이어서 지장보살은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를 주었습니다. 스님은 더욱 정진했습니다. 21일이 되는 날 드디어 천안(天眼)을 얻고 도솔천의 대중을 보았습니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장하구나, 대장부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참회하고 계를 구하다니.”

불교 역사에 진표 스님이 ‘율사’로 기억되는 내력입니다. 바로 이런 스님이 42살 되던 해 비로소 ‘안심(安心)’을 얻고 제자들을 맞은 절이 안심사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알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물신’을 부처와 예수로 여기는 건 결코 가치관의 부재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꾼도 그것이 바람직한 가치가 아니라는 건 잘 알 겁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림 없이 가치를 지켜 나가는 굳건한 신념이겠지요.



▲ 대웅전 뒤에서 바라본 안심사. 소잔등처럼 순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심사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의 사동리라는 산마을에 있는 작은 절입니다. 산세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외양이나 비범에서 안심을 찾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안심사는 산마을 작은 절입니다만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국보 제297호인 영산전 괘불탱은 1652년(조선 효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중기 충청 지역 불화의 정수를 보여 줍니다. 보물 제664호인 대웅전은 조선 중기 건축의 전형으로, 현존 건물은 1626년에 중건한 것입니다. 맞배지붕이면서도 측면까지 공포가 있는 양식이 이채롭습니다.

작고 아담한 절이 대부분 그렇듯이 안심사의 가람 배체는 철저히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특히 영산전은 특별한 좌향을 고집하지 않고 산의 흐름대로 앉아 있습니다. 따라서 마당 모양이 바른 네모꼴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당은 실제보다 더 넓어 보입니다. 자연석 기단은 거기에 깊이를 더합니다. 바람결을 따라 춤추는 낙엽을 따라서 절마당을 거닐며 방온 거사의 다음 게송을 읊조려 봅니다.

무엇이 신통묘용인가?
물 긷고 땔감 나르는 일이 바로 그것.
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

평범한 일상을 떠나서는 비범도 없고 안심도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알뜰히 살아내야겠습니다.

(덧붙임: 이 글이 강남 아파트에 목숨 걸지 않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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