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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 보현사/강원

☞여행·가볼만한 곳/국내·사찰 답사

by 산과벗 2007. 3. 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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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 보현사

반달의 겸손이 일깨우는 자연과 이웃의 은덕

뎅그렁, 뎅. 풍경소리에 귀가 밝아집니다.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이 은은합니다. 달이 산을 넘은 모양입니다. 조심스레 문을 엽니다. 동쪽 하늘에 반달이 걸려 있습니다. 반달의 은근한 빛은 별빛을 다 지우지 않고 있습니다. 절을 둘러싼 산마루 위 소나무들의 몸태가 대낮보다 더 선명합니다. 산은 더 높아지고, 그만큼 마당도 깊어집니다. 밤하늘은 깊은 호수 같습니다.

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몇 번이고 산사의 적막에 흠집을 내다가 깜빡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언뜻 창호지에 어리는 햇살에 졸음을 씻고 문을 열자, 산은 안개를 풀어 산사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 백두대간의 곤신봉과 선자령 빚어놓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보현사. 절을 둘러싼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청신한 기운이 시리다.
 
보현사는 대관령에서 오대산을 향하는 백두대간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자령(1157,1m)과 곤신봉(1127m)이 빚은 계곡은 절 앞을 감싸며 흐르고, 곤신봉에서 가지 친 산줄기에 자리한 보현산성(일명 대공산성·강원도문화재자료 제28호)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은 절 뒤편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깊은 산의 품에 안겨 있지만 답답한 느낌은 없습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활짝 산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계곡은 강릉 남대천으로 흘러들고, 그 물길이 끝나는 곳에 동해가 아스라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누가 과연 이런 곳에 절을 열 생각을 했을까요?

보현사의 창건에 대한 문헌자료는 전해오지 않습니다만, 낭원대사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보물 제192호)가 940년(고려 태조 23)에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낭원대사(834-930)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의 제자입니다.


 
▲ 가을볕은, 온 세상을 꽃으로 만들어 긴 겨울을 담담하게 견디어 낼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범일국사는 지금까지도 강릉 지역에서 신적으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국사가 개창한 사굴산문의 본산인 굴산사는 보현사의 이웃 마을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었던 절입니다. 폐사된 채로 묻혀 있다가 1936년 홍수 때 주춧돌과 절 이름을 새긴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보현사의 초창이 신라 말기일 것이라는 추정은 무리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낭원대사가 중창한 당시의 절 이름은 보현사가 아니었습니다. 낭원대사오진탑비에는 보현산 지장선원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1799년(조선 정조 23)에 발간된 전국의 사암과 절터를 밝힌 범우고(梵宇攷)에는 보현산 지장사로 기록돼 있고, 폐사된 뒤 그 자리에 보현사가 섰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조에는 ‘부 서쪽 35리에 보현산’이 있고 보현산에 지장사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현재 절 동쪽에 지장선원을 복원하고 있는 중인데, 지표조사 과정에서 풍탁(風鐸)과 기와편이 출토되어 절의 지워진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찰들은 예외 없이 절 이름에 산을 앞세웁니다. 보현사는 보현산이 자신의 거처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보현산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는 보현산성(지도에는 대공산성이라고 표기)의 존재에 산 이름이 가려진 결과일 것입니다. 보현사의 소재지인 성산면의 이름이 산성에서 비롯된 것을 봐도 산보다는 산성의 존재감이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절터의 주맥은 보현산(성)으로 이어집니다. 선자령과 곤신봉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절과 마주해 있습니다. 속히 보현산이 제 이름을 찾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하늘과 땅의 기운을 담고 있는 장독들. 

보현사는 들머리가 아름다운 절입니다. 성산면에서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방향 초입에서 415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보광교를 지나면서부터 아늑한 산골 분위기에 절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예쁘게 화단을 가꾸어 놓은 식당을 겸한 민박집들은 관광지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투철한 상혼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버스가 드나드는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인적은 끊어집니다.

선자령과 곤신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너럭바위를 환히 드러내며 귀를 씻어 주고, 굽이 도는 곳의 작은 못은 단풍잎을 띄워 마음 한 귀퉁이를 붉게 물들입니다. 깊고 넓은 계곡은 아니지만 청신함으로 충만합니다. 그 맑은 물살에서 나는 백두대간의 정령을 봅니다. 고인들도 이러한 보현사 골짜기의 기운을 끔찍이 아꼈던 모양입니다. 보현사에 구전하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중국의 오대산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구해 해동 신라의 오대산에 봉안하기로 하고 뱃길로 강릉땅 남항진에 도착하여 한송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때 문수보살이 보현보살에게 말하기를, 내일 대령(대관령)만 넘게 되면 오대산에 당도하게 되는데 오대산 안과 밖에 각기 절을 세우기로 하고 그 위치는 활쏘기로 결정하자고 했답니다. 다음날 아침 활을 쏜 결과 문수보살의 화살은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에 떨어지고 보현보살의 것은 보현사에 떨어졌다는 얘깁니다.

오대산에는 다섯 대(臺)마다 1만씩 5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전설에서 부회한 얘기가 아닌가 합니다. 다 알다시피 문수와 보현은 늘 짝을 이루어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하는 보살입니다. 그런데 오대산에는 문수보살만 머물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착안하여 맞은편의 보현산에 보현보살이 머문다는 전설이 만들어졌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가히 보살이 깃들만한 계곡입니다. 

계곡이 깊어지고 선자령에서 곤신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가 시야를 압도할 즈음 ‘보현성지’라고 쓴 입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보현사의 경내에 발을 들인 셈입니다. 이어서 길가에 20여 기의 석종형 부도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 300m쯤 더 가면 보현산 자락에 기대어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보현사가 옆모습을 드러냅니다.



▲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들. 언젠가는 빛으로 돌아갈 존재의 실상을 보여 준다.

보현사의 전각들은 바른 네모꼴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내 진입은 누각인 금강문 아래를 통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는 저절로 대웅전으로 눈길을 주게 됩니다. 조선 후기에 지은 대웅보전(도유형문화재 제37호) 뒤로 멋들어지게 휜 소나무가 후광처럼 시린 기운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수선당과 삼성각이 나란히 서 있고, 오른쪽에는 종각과 요사가 배치돼 있습니다. 그리고 대웅보전과 삼성각 사이에 영산전이 앉아 있습니다. 영산전 뒤쪽으로 산기슭을 오르면 낭원대사 오진탑(보물 제191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슥한 숲속에 자연석으로 만든 돌계단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아껴 걷게 만드는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보현사는 작은 절입니다. 계곡을 앞에 두고 산기슭을 다듬은 입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량에 서 보면 작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계곡이 만들어내는 확장감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산세의 우람함 덕분일 것입니다. 절과 마주한 선자령과 곤신봉 줄기는 백두대간 전 구간 중 가장 유장하게 흐르는 곳입니다.


 
▲ 보현사와 마주한 백두대간 기슭의 소나무 숲. 

보현사에는 건성 바라보는 눈길에는 잡히지 않는 이채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종무소로 쓰는 요사에 걸린 ‘보현사’라 쓴 편액도 그 중 하나인데, ‘賢’자의 ‘又’ 부분이 ‘忠’자인 것도 특이하고 그 글씨를 쓴 사람이 10살 소년이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1884년에 창동(滄洞)에 사는 여재복(呂在卜)이 10살 때 써서 걸었다’는 내용의 관지가 적혀 있습니다. 대웅보전 앞에 고개를 돌려 부처님을 바라보는 사자상이 있는데, 아무리 뜯어봐도 순한 강아지처럼 보입니다. 종각 옆에서 바라보는 동해 일출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어떤 절에서건 나는 저물녘의 풍광을 가장 좋아합니다. 보현사처럼 깊은 산속 절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산이 서서히 먹빛을 풀면서 계곡물 소리와 풍경 소리를 살려내는 분위기는, 밤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깊은 밤 홀로 절마당에 몸을 세우고 하늘을 우러릅니다. 반만 남은 달빛이 더 매혹적이라는 걸 처음으로 느낍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태양의 빛이 닿을 때만 빛을 발합니다. 무릇 자연의 은덕으로 사는 것들은 저 반달의 은근함과 겸손을 닮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웃들의 은혜가 태산보다 더 크고 높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겠습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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