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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경남 사천

☞여행·가볼만한 곳/국내·사찰 답사

by 산과벗 2007. 3. 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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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때 범승 연기조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고찰이다. 조선 영조때 건물로 가장 오래된 대양루는 극락전, 응진전과 함께 유형문화재이다.

주산인 봉명산 기슭 동쪽에 위치하고 다솔사에 딸린 암자는 봉일암, 보안암등이 있으며, 영악사 중건비문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창건되어, 최초의 寺名을 영악사라 하였으며, 선덕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중창하여 사명을 다솔사라 하였다.
그 후 원효대사 의상이 문무왕 16년(676)에 세 번째로 중수하고 다시 사명을 운봉사라 했으며,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네번째로 중수, 사명을 영악사로 다시 개칭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때(1352∼1372)에 왕사 보존제자 혜동이 다섯 번째 중수하였다.
절 이름인 다솔에 대해서는 이 절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위의 기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절의 주산이 마치 대장군이 앉아 있는 듯 하기에 많이 거느린다는 뜻에서 다솔이라 붙여졌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울창한 숲으로 경치가 수려하여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며 등산코스가 좋아 해발 300m가 넘는 봉암산, 봉명산, 천왕산들을 연결하여 국립공원인 다도해를 관찰할 수 있는 등산객의 좋은 길목이다.

 다솔사 들어가는 입구의 길은 양쪽에는 하늘을 볼수 없을만큼 수많은 나무들이 가득하여 걷기에 더없이 좋을듯 한데 시간이 촉박하여 참으로 아깝게도 차로 지나쳐버리는 아쉬움에 산사의 깊은 향기를 맡을수가 없었다. 차는 절집 코 앞에 있는 주차장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  절 입구에서부터 걸어간다면 10여분 정도 걸릴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쪽을 바라보아도 돌축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도솔사의 구조는 참으로 교묘하게 몸을 숨겨 네모 번듯하게 다듬은 회색 화강암 덩어리가 아니라 멋스러운 돌계단을 걸어오르면 나무 터널 끝에 대양루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대양루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다솔사의 현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서 1748년(영조 24)에 건립된 대양루는 맞배지붕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건평 약 350㎡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아래·위층의 높이가 모두 13m에 달하며,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그 육중한 몸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아래층은 본래 출입문 구실을 하였으나 누각 왼편에 새로 돌계단이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로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2층은 승려들의 수도장일 뿐 아니라 불교 신자들의 집회장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광복 전에는 민족정신 함양의 도장이었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는 좌우익의 혼탁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역사회 청년들의 교육도장이 된 때도 있었다. 또한 6·25전쟁 때는 서울에서 피난온 동여중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와 학생들의 교실로서 4년간이나 활용된 적도 있어 2세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대양루는 안양루처럼 대웅전 앞의 건물 역할을 하면서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아래층을 통과하면서 대웅전을 바라보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절 아래쪽에서 안쪽을 볼수 없고 맨 앞에 있는 대양루 마져도 돌계단의 숲길 끝에 있는 것처럼 다솔사의 주전각인 적멸보궁도 대양루 아래를 통과하면서 보는 구조가 아니라 대양루의 옆을 지나 나무 숲 터널의 끝에 살짝 내비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금은 설법이나 강의용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적멸보궁
부처님을 모셔야 할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놓여 있다. 또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야 할 자리는 창으로 훤히 뚫려 있어 뒤에 있는 사리탑이 보이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적멸보궁으로는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태백산 정암사, 영월법흥사와 달성 비슬산 용연사 등이 있다.

감추어지고 또 감추어지는 전각들의 모습을 보면서 옛날 고종황제가 화공에게 春畵를 한 폭 그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화공이 그려 바친 그림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임금의 명령을 받은 화공은 한낮 조용한 산속의 오두막 집을 그리고 댓돌 위에는 예쁜 여인의 신발 한켤레와 남자의 신발 한짝, 그리고 나머지 한짝은 마당 한 가운데...닫힌 문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에 맡긴다는 이 얼마나 황홀한 춘화인가! 
 
나무 숲길 끝에 살짝 보이는 대양루 그리고 또 다시 대양루를 돌아 나무 숲길 끝에 보이는 적멸보궁.....
참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진 절집의 속살들이 한꺼풀씩 벗겨보이는듯 하다.

 대양루를 옆으로 돌아서면 대양루보다 한단 높은 적멸보궁 영역으로 들어온다. 적멸보궁은 원래 대웅전이었는데 1978년 2월8일에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 때에 후불탱화속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높이 2.3미터 30평 정도의 성보법당을 탑안에 설치하여 동양 최대 규모의 적멸보궁 사리탑건립을 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적멸보궁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물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의 모습인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공포가 자못 화려하기 짝이 없고 주산이 봉명산을 뒤로하여 날개를 활짝 편 팔작 지붕의 적멸보궁이 당당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적멸보궁 안에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고 유리창 너머로 사리탑이 안치되어 있다. 열반상의 크기는 대략 2m 정도이고 환조가 아니라 부조의 형태로 만들어 진 점이 매우 특이하다.

다솔사가 품은 다섯 가지 이야기

봉명산 다솔사(多率寺)는 작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절이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거닐며, 숲길 옆의 작은 오솔길을 지나며 흥미로운 옛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기거했고, 작가 김동리가 '등신불', '황토기'를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다솔사로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삼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햇살을 잘 막아주고 있었다. 햇살 따가운 여름이라면 그늘 아래에서의 산책이 상쾌하게 느껴졌겠지만 겨울에는 조금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지나는 바람에 실려 온 나무와 풀 향기는 머릿속을 맑게 정화시켜주고 있었다.

다솔사의 첫 번째 볼거리는 산책로를 통해 다솔사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오른쪽으로 나타나는 커다란 바위이다. 바위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는 한자어가 음각되어 있는데 '임금의 명으로 산에 묘를 쓰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다. 고종황제 때 경상우도 절도사가 다솔사가 임금이 나올 천하제일의 명당이라는 얘기를 듣고 선친의 묘를 이곳에 쓰자 다솔사 승려들이 상소해 얻은 비석이라고 한다. 결국 절도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지금도 이곳에는 묘가 없다고 한다.

어금혈봉표에서 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바삭거리는 낙엽이 깔린 곳으로 접어들자 석축 위에 남근 모양의 '장군바위'가 서 있다. 한때 인근 절의 승려들이 다솔사의 힘이 이곳에서 나온다며, 윗부분을 깨뜨린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절이 멸문을 당했다고 한다. 깨진 부분을 붙여놓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주차장을 지나 다솔사로 이어지는 계단이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그대로 깔아 만든 108개의 계단인데 아래쪽에서 보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늘어선 계단과 대양루(大陽樓)의 기와, 봉명산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준다.

경내로 들어서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현판을 얹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79년 대웅전을 수리하던 중 부처님의 사리가 발견되자, 대웅전을 개수해 통도사의 적멸보궁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는 적멸보궁 뒤편의 사리탑에 모셔져 있다. 이곳이 다솔사의 세 번째 볼거리이다.

네 번째는 사리탑 뒤에 활 모양으로 자리한 녹차밭이다. 5000여 평 규모의 녹차밭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효당 최범술 스님에 의해 '반야로'라는 최고의 명차가 만들어진 곳이다. 반야로는 다솔사 주변과 서울 인사동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적멸보궁 옆으로는 만해가 중수한 전각인 응진전(應眞展)이 있다. 다솔사는 만해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은데 일제시대에는 만해를 영수로 효당, 김범부 등이 조직한 구국운동 단체인 '만당'의 아지트였고, 만해의 회갑기념회가 열리기도 했다.

마지막은 다솔사 입구에 자리한 '해우소'이다. 순천 선암사 해우소의 명성이 훨씬 높지만 이곳도 엉덩이를 까고 앉아 힘을 주면 상당한 깊이까지 떨어져 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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