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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성주사지

☞여행·가볼만한 곳/국내·문화.유적

by 산과벗 2007. 3. 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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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성주사지



▲ 늠름한 기백 계백정군의 동상

계백장군 .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뉘어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5,000 결사대의 용맹은 신라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5만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사비성은 함락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치며 백제는 멸망하였다.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속에 흔적만 남은 보령 성주사지

♣ 성주사지

통일 신라 말기 구산선문중 하나로 이름이 높았던 성주사. 오랜 역사를 가진 절터인 관계로 성주사지에서는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조의 유물이 골고루 출토되며 바로 앞에는 성주산 자연휴양림과 ,심연동 계곡,석탄 박물관등이 있어 살아있는 교육현장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성주사지는 1984년 8월 13일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산을 등에 지고 남향으로 면적 2만 9084㎡의 평탄한 지대를 점유하고 있다.

1960년에 발견되어 모으기 시작한 비석의 파편을 통해, 원래 백제 법왕의 명에 의해 616년 오합사(烏合寺)라는 국찰(國刹)이 창건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오합사가 성주사(聖住寺)이며, 신라 제46대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朗慧)화상을 맞아 더욱 크게 중창(重刱)된 사실도 밝혀졌다.
절터 입구로 보이는 곳에 계단석이있고, 그 뒤쪽에 석등과 5층석탑 1기, 다시 그 뒤쪽에 금당(金堂)터인 듯한 단이 있으며, 3기의 석탑이 나란이 있다.
그 뒤에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渰)이 글씨를 쓴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등이 있다.










▲ 원래 이곳에 오르는 돌계단 양옆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어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받았으나 1986년 사자장이 도난당해 현재 계단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 비슷한 모양의 탑이 3개가 성주사 중앙터에 나란히 서있다.

 
▲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 . 보물 20호
성주사의 금당(金堂) 뒷편 북쪽에 동서방향으로 서 있는 석탑 3기 중 가운데 석탑으로 이중기단 위에 서 있다. 이 탑은 서쪽의 3층석탑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으며 탑신 조각이 다른 것에 비하여 화려하다.

지대석과 하대 저석(底石)은 윗면에 각∙호∙각의 3단괴임을 가졌으며 각각 4개, 5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4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하대중석에는 가운데 탱주 1개를 경계로 양분되어 있고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윗면의 경사가 완만한 갑석이 놓여 있는데 상층기단 중석을 받는 부분에는 지대석과 같은 3단의 괴임이 새겨졌다. 상층 기단부는 평면 4각형의 돌 4개를 짜 맞추었는데 동편 1/2은 화강암으로 보수하였다. 우주와 탱주의 폭이 하층 중석에 비해 부연(浮椽)이 있는 것 외에는 형태가 같다. 5층석탑과 같이 1층 탑신과 갑석 사이에 옥신괴임을 별석으로 끼웠는데 소로형에 각∙호∙각(角∙弧∙角) 3단 괴임을 갖추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옥개받침이 모두 4단이다. 초층 탑신은 서북쪽 모서리가 크게 깨져 떨어져 나갔는데 남북면에 조각이 새겨져 있다. 조각은 3중의 문형액 안에 자물쇠조각이 있고 그 아래 둥근 고리 1쌍을 양각하였으며 좌우대칭으로 14개씩의 둥근 정두형을 새겼다. 이 탑신 윗면에 거친 솜씨로 구형의 사리공이 파져 있었는데 71년에 해체 수리 했을 때는 이미 도굴당하여 유물이 없었다.
옥개석은 옥개받침의 외연에 선각을 하였으며 처마의 아랫선은 직선이지만 위쪽은 중앙부분에서는 수평이다가 처마 끝에서 반전하였다. 낙수면(落水面)이 호형으로 급하고 그 위에 1단의 탑신괴임이 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고 3층 옥개석 위에 네모난 찰주공이 있었는데 71년 해체 수리할 때 서3층석탑의 정상에 있던 2개의 노반중(露盤中) 하나를 옮겨 놓았다. 특히 1층 옥개석과 2층 탑신의 결구방식이 주목되는데, 1층 옥개석을 파고 2층 탑신을 끼워 맞추도록 하였다.

서탑과 거의 동일한 양식이고 규모도 비슷하나 서탑에 비하여 경쾌하고 조각수법도 우수하며 상하의 비례나 결구방법도 정제되어 있다. 성주사에 남아 있는 4기의 탑중 가장 많이 손상을 입은 것이지만 화려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성주사 낭혜화상비의 건립연대나 탑의 양식을 고려하면 통일신라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門인가?



 
얼굴 앞면을 다 파내어 가서 근래에 세멘트로 보수를 해놓았지만 본래의 모습을 알 수 는 없다.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渰)이 글씨를 쓴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 주차장은 매우 넓으며 입장료,주차비는 없다. 문화재 해설 안내 자원 봉사자 이인구님의 자상한 안내로 이해가 빠르고 설명이 매우 유용했다.이인구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 돌아오는 길에 고개에서 본 보령시내. 찌푸리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있고 전형적인 가을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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